[김광현 목사 자서전 “이 풍랑 인연하여서”] 정인과 목사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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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과 목사(사진)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를 나와 조선주일학교연합회와 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총무를 역임한 분이었다. 그 전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으로도 활약했으며, 한때는 흥사단 국내 책임을 맡기도 했고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일도 있다. 교계나 사회에 널리 알려진 인사다. 나의 선친과 연기가 같으셨으며 그의 장남인 삼현 군은 나의 숭실전문 시절의 친우다. 그가 안동에 왔을 때, 나는 그의 숙사로 찾아갔다.
인사를 드린 후, 내가 삼현 군의 숭전학교 친구이며 어릴 때부터 목사님을 존경해 오던 사람이라고 한 뒤에, 본론을 꺼냈다. 우선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총독부의 부탁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전쟁은 언젠가 끝나지 않겠느냐, 그러면 전시의 지도자가 반드시 전후에도 지도자가 되라는 법은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나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친구들이 자신을 저버리고 있는 처지에 총독부의 부탁을 받으니, 그래도 총독부에서는 나를 인정하는구나 싶어서 오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이런 거물도 심한 고문과 오랜 고독을 겪으면, 이렇게 약해지는구나" 하고 동정심이 생겼으나 이왕 꺼낸 말이니 직설적으로 “친구들이 저버리면 어떻습니까? 이번 길에는 오지 않으셨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그는 나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김 목사, 고맙다. 나는 선배도 많고 친구도 많지마는 이렇게 바른말을 해주는 사람이 일찍이 없었다. 고맙다. 약속한다. 이 길로 돌아가면 다시는 안 나오겠다.”
그는 이 말을 몇 번이고 거듭했다. 저녁에 강연을 마친 다음에도 강연 후에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도, 이튿날 안동을 떠날 때도,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 뒤로 그는 한 번도 다시는 시국 강연을 하러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 후 일제의 탄압으로 감금되어 있던 나는 광복이 되어 8월 17일에 석방되고, 8월 18일에는 안동치안유지회를 대표하여 중앙 정세를 살피기 위하여 상경했다. 그때 피어선 성경학교에 있는 정 목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서울은 건국준비위원회와 각 정당의 조직활동으로 법석이었다. 그는 사무실에 혼자 있다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그간 어떻게 지냈으며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갇혔던 이야기, 치안유지회를 조직한 이야기, 그리고 대표로 상경하게 된 것 등을 간단히 말하고 그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인가고 물었다. 고려민주당 같은 것을 조직할 생각이며 앞으로 같이 일해 보자고 했다. 나는 교회 일에만 전념하겠다고 했다. 그 후 그는 정당을 만들어 보려고 무척 노력했으나 호응도가 약해 잘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입법의원으로 있던 어느 날 명동을 지나가다가 바로 내 앞에 그의 부자가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왠지 석연치 않은 감이 들어서 그들을 부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것이 나와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는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어져 사람의 밟힘이 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