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 목사 자서전 “이 풍랑 인연하여서”] 일본의 전쟁 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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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쟁 형편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다음해에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세우기까지 했으나, 전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온 중국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 일찍이 중국에 많은 이권을 심어 놓은 구미 여러 나라들과도 충돌하게 되어 전쟁은 멀리 인도지나반도와 전 동남아까지 확산되었다.
일본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미국의 막강한 전력이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을 기습하여, 거기 모여 있던 미국의 해군력을 약화시키고 싱가포르까지 쉽게 점령해 버렸다. 그러나 국력이 강한 미국이 곧 해군과 공군력을 회복하기에 이르자, 일본의 해군력은 전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의 대본영은 매일 많은 전과를 올리고 있는 것처럼 발표했지만 패색은 날로 짙어만 갔다.
우리 민족의 형편
그러니 일제는 우리 한민족 단속에 혈안이 되어 합방 당시에는 일시동인(一視同仁)하던 것을,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하여 한인을 완전히 일본인화하려고 들었다. 그들은 우선 우리의 정신부터 일본인화시키기 위해 일본 왕실 조상을 위하는 신사에 참배하게 했다. 그러나 참배나 시키는 것으로는 소기의 목적 달성이 더디다고 느낀 것인지, 바로 우리의 모든 것을 저희와 같게 하는 일에 착수했다.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없앴으며(1938), 창씨를 하게 하여 이름을 일본인화 시켰고(1939), 언론을 통제하여 한글로 된 신문 잡지들을 폐간시켰다(1940). 또한 한글학회사건을 일으켜 한글 학자들을 모두 투옥하고(1942), 한국말까지 없애려고 일반인에게도 일어 상용을 강요했다. 그리고 한인들의 옷이 일본인들의 것과 다르므로 남자들은 국방복을, 여자들은 ‘몸빼’라는 바지를 입게 했다. 황국신민서사라는 것을 만들어 누구나 다 외우게 하고 어떠한 모임이든 반드시 그것을 제창한 다음에 회의를 시작하게 했다.
위와 같은 조치들은 한국인들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데는 일익을 했을는지 모르지만 날로 급박해지는 전력을 증강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일제는 한인들도 당당한 일본인이 되었으니 일본인이 하는 모든 의무를 수행하라고 했다. 국방 헌금, 쇠붙이 헌납, 비행기 헌납 등을 시켰다.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보국대나 징용으로 나가게 하다가, 직접 병역으로 동원하기까지 했다. 지원병으로 시작하여(1938), 징병으로(1942), 학병으로 끌고 갔다(1943).
이 모든 것들을 설득, 강요하기 위하여 우리 민족 지도자들을 동원했다. 그들은 전에 105인사건이나 3•1운동 때의 지도차들이었거나. 언론, 종교, 교육 등 각계의 저명인사들로 당시 사회에서 존경받던 이들이었다. 강한 것 같으면서 약한 것이 인간이다. 그들에게 과거 그러한 경력이 없었더라면 겁을 덜 집어먹고 그런 일을 피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때 그렇게 쉽게 일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는 얼마 후에 맞게 된 해방 정계에 떳떳이 나타나지 못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의 형편
일제의 기독교인에 대한 단속도 이만저만 심한 것이 아니었다. 신사참배를 시킨 것, 신사 위패인 가미다나를 두게 한 것, 교회 폐합을 시킨 것 등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뿐인가, 교회에 압력을 가하여 각종 행사를 하게 했다. 경안노회록에 기록된 것을 발췌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40년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연맹을 결성했고, 그 해 12월에는 국민총력연맹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연맹을 결성했다. 1941년 9월에는 유기 헌납을 했고, 1942년 3월에는 징병제 실시에 대한 축하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1942년 10월에는 여신도대회를 열었고, 1943년 1월에는 전승기도회를 열었다.
개인을 일일이 단속하여, “천황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하고 물어 하나님이 높다고 하면 불경죄로 몰아붙였다. 경안노회 안에서도 전계원 씨와 박충락 씨가 거기 걸려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종말론을 취체했다. 그래서 안식교와 성결교가 폐쇄되었다. 일제가 이렇게 기독교인을 단속한 것은 기독교인이 ① 친미적이고② 이성이 발달되어 있으며 ③ 민족정신이 강하여 저희 말을 잘 듣지 않으며, 따라서 동화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드디어 기독교에 대하여, 선교사가 주도하던 체제에서 탈피할 것을 요구했다. 교회 지도층에서는 일본 본토 교회의 지도자들이 무슨 힘이 되어 줄까 하여 변호를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한반도 안에 있는 일본인 교회들과 조선기독교연합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교단의 통리였던 도미다(富田滿)나 조선기독교연합회장 니와(丹羽淸次郎)는 한인 지도자들에게 한 가닥 기대감은 갖게 했지마는 결코 선한 사마리아인은 아니었다.

강제 추방되기 직전인 1941년 2월 환갑기념으로 유년주일학교 직원들과 함께한 권찬영
선교사 부부
교계는 구태를 탈피하기 위해 온갖 추태를 다 부렸다. 1942년에 감리교회는 장로교 목사 전필순을 통리(統理)로 하여 혁신교단을 창설했고, 장로교회는 1943년에 평양신학교 후속 신학교장 채필근 목사를 통리로 하여,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장로교단은 각 도마다 교구를 설치하게 되었으며 안동교회는 경북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교구장은 대구의 신후식 목사였다. 이 두 교단은 일제에게 온갖 충성을 다하다가 1945년에는 하나로 통합되어, 김관식 목사를 통리로, 김용순 목사를 부통리로 하는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을 이루게 되었다. 그것도 해방 바로 직전인 7월 19일의 일이었으니, 한 치 앞을 못 내다보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이때 교회 지도자들의 유세활동이 두드러졌는데, 그것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일본 교계 저명인사들의 유세여행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정 당국에게 위촉되어서 하는 것이었다. 일본 교계 인사의 유세는 주로 교회 안에서 하게 되었다. 1943년과 44년에 안동을 지나간 이는 오사카 교회 전인선 (全仁善) 목사의 인도로 온 해군소장 미즈노(水野鍊太郞)와 동지사대학 총장 마끼노(牧野虎次)였다.
시국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긴 했지만 너무도 위축되어 있던 때라 다소의 위로를 주는 효과는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송창근, 김동선 두 목사가 경상북도 지사의 위촉을 받아 활동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들은 뒤에 총독부 당국의 위촉으로 전국적인 활동을 하게 됨으로써 경북지역은 신후식, 유재기, 권태희, 박내승 목사들이 그들에 이어 활동했다. 주로 도내 각 군의 면 단위로 다니며 전력 증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내용이었다. 안동에는 1945년 6월에 정인과 목사가 총독부의 위촉으로 와서 강연을 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