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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목사 자서전 “이 풍랑 인연하여서”] 안동과 안동교회의 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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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광현 목사 자서전| 작성일2025-02-13 | 조회조회수 : 4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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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가 주도가 된 경안노회는 전국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사참배, 유기 공출, 타종 헌납은 물론, 교회 안에 가미다나(神棚)라는 신사 위패를 모시게 하고, 1면 1교회를 목표로 한 교회 폐합을 단행했다. 그때 선교사들은 이미 전쟁으로 철수해 없었고, 그들이 경영하던 병원과 성경학원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읍내에 있던 신세와 안기 두 교회가 안동교회로 폐합되었고, 개척하던 기도실들은 소멸해 버렸다. 그런 와중에서도 정말 장하게 생각하는 일은 안동교회만은 전 노회 모든 교회가 다 두고 있던 가미다나를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시무하시던 김영옥 목사님은 연만한데다가 귀마저 어두워서, 날로 극심해 가는 일경들의 시달림을 받으셨다. 


그들이 내리는 이런저런 지시를 혼자서 대처하기가 어려워서, 당회를 해야 하느니, 제직회를 모아야 하느니 했다. 일경은 저희 지시를 추진키 위하여 장로들을 찾아다니고 모모한 제직원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니 자연 교인들의 사기가 위축되어서 교회 집회가 부진해졌다. 300명이 넘던 교인이 100명도 모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런 때에 내가 안동에 오게 된 것이다. 1943년 1월 17일이었다. 나는 교인들의 동정을 살피고 먼저 안심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직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후로는 일정 당국에서 무엇이든 교회 일에 대하여 묻거든, 모든 일을 목사에게 미루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도 덜 시달리게 될 것이고, 나도 여러분들이 무슨 말을 하셨는지 알 필요가 없으니 대처하기가 차라리 쉬울 것입니다. 문제에 따라서는 여러분들과 의논해야 할 것도 있을 터이므로, 그때는 내가 먼저 여러분과 의논해서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이 직접 그들과 부딪히지 않고 우리끼리 의논하는 것이니 한결 쉬울 것입니다.” 


나는 위축된 교회의 사기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당회에 의논하고 새로운 시책을 강구했다. 먼저 예배시간부터 고쳤다. 오후 2시에 해 오던 주일 낮예배를 오전 11시로 고쳤다. 또한 엄숙하고 긴장감 있는 예배를 갖기 위해 예배순서를 고치고 사회자를 따로 두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오르간과 성가대와 주보의 역할이 많아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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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첫 주보. 창립 이후 43년 동안 주보가 없었던 안동교회는 1953년 둘째 주일인 1월 11일(주일)부터 주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김광현 목사의 자서전에는 몇 년부터 주보를 발행했는지가 정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 마루에 줄을 지어 꿇어앉아서 예배드리게 했다. 주보도 곧 발행하게 되었다. 주일학교도 아이들이 모두 마루에 줄을 지어 꿇어앉아서 예배케 했다. 누가복음 2장 52절과 소안톤 노래 마두원 곡 “나 예수같이”를 주일학교의 표어와 노래로 삼아, 예배 때마다 일어서서 제창케 했다.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급격한 변혁으로 혹 어떤 반발이 있을까 했는데, 이상하게도 때가 때여서인지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좋아했다. 


그리고 성례를 베푸는 날짜도 당회에서 의논하고 대폭적으로 바꾸었다. 봄가을로 한 해 두 차례씩 거행해 오던 것을, 세례식은 성탄일과 부활주일에, 유아세례는 성탄일과 아이주일에, 성찬식은 성탄일과 부활주일과 만국성찬주일(10월 첫 주일)에 거행하기로 했다. 그날과 그 식의 뜻이 맞아서 좋기도 했으며 모든 교인이 자기의 세례일을 기억하기에 편리하게 되어 좋아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모이던 제직회와 당회를 매달 모이게 했다. 당회는 매달 마지막 주일에, 제직회는 매달 첫째 주일에 모이기로 했다. 마침 새해가 되었으므로 임시직을 새로 선정하고, 항존직은 모두 신임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세 교회가 합쳐진 뒤 세 교회 제직이 모두 그대로 있어서 일체감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정한 날에 항존직을 투표에 부치니, 당시 전도사가 되어 타교회를 맡아 시무하던 남수진 장로 외의 전원이 재선되었다. 장로에 배영찬, 김재성, 조홍로, 임도현, 배영문 씨 등이었고 집사에는 이재심 씨였다. 


예산편성도 새로 짜고 헌금과 재정 지출 제도도 고쳤다. 헌금은 주정 헌금을 주로 하여 예배 헌금, 절기 헌금, 특별 감사 헌금으로 하고, 재정 지출은 회계를 따로 두되 부서와 항목을 새로 설정하여 그 부서의 예산은 그 부서의 합의로 예산에 따라 쓰게 했다. 새로 설정한 항목은 교역자 사례금, 교무비, 회당비, 기관비, 전도비, 구조비, 예비비 등이었다. 그때 특색이 있는 항목은 군하(郡下) 교회 보조비였다. 재정 능력에 따라 우선 군하 교회를 돕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안동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자라지도 않았으며, 교육도 받지 않았지만, 내가 안동 김씨여서인지, 이 지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리고 교인들이나 사회인들의 내게 대한 사랑도 컸다. 당시 나의 동역자는 잿집 따님인 권옥영이란 분이었는데 매우 좋은 성품을 지난 분이었다. 그래서 나의 목회 일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때 안동교회의 지역은 동쪽 송천에서 서쪽 호암과 저분골까지, 남쪽 강정과 수하리에서 북쪽 서지와 이송천까지였다. 


그리고 안동군 전역에 시무목사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어서 나는 30군데나 되는 교회들의 당회장이 되어서 돌보아야 했다. 나는 그 여러 교회들을 꼭꼭 한 해 두 차례씩 순행했다. 이때 일제의 압박으로 교회마다 교인수가 많이 줄었는데, 끝까지 교회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대개 장로들이었다. 성경에 장로직이 성령의 은사라고 한(고전 12:28) 말씀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내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은 분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그들도 나를 지극히 사랑해 주었다. 그로 말미암아 뒤에 교회가 분열의 고역을 치를 때에도 그분들은 무조건 나를 따라 주었다. 그때 전국의 모든 노회가 다 분열되었으나 경안노회만은 한 번도 분열되지 않은 것은 그 덕이 컸다고 생각한다. 힘도 들었지만 그 기쁨도 컸다. 


그 해 1943년 12월 4일에 다시 나의 가정에 귀한 선물이 있었다. 둘째 딸이 태어난 것이다. 아이의 이름은 “상서로운 은혜”란 뜻의 “서혜(瑞惠)”라고 지었다. 민족 앞에 상서로운 은혜가 있기를 기대해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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