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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목사 자서전 “이 풍랑 인연하여서”] 안동으로 오게 된 경위와 안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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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광현 목사 자서전| 작성일2025-02-13 | 조회조회수 : 5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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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으로 오게 된 경위 


내가 초량으로 간 이듬해 12월, 안동교회 김재성 장로님이 내가 있는 초량으로 찾아오셨다. 처음 뵙는 분이었지만, 그의 형제분들을 알아서 그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분 말씀이 내가 처음 초량에 부임하여 첫 주일예배에 설교를 하고, 내 아내가 독창을 하는 것을 봤다는 것이었다. 그때 자기는 급한 용건이 있어 설교가 끝난 뒤에 곧 나 갔기 때문에 인사도 못 했다고 했다. 


지금 안동교회는 노인 목사님이 계시다가 그만두셔서 후임을 구하고 있는데, 내 생각이 나서 당회에서 의논하고 모시러 왔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경안노회가 안동에서 열리고 있으니, 곧 안동으로 가면 노회원들도 만나게 되고 인사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다음 노회 때에야 승인받을 수 있는 일을 당겨서 할 수 있으니 시간을 많이 벌게 된다고 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처음 계획한 견습기간인 2년이 다 되기도 하고, 당장 서둘러 가야 시간을 벌게 된다는 말에 끌리기도 하여 가서 본 뒤에 작정하기로 하고 함께 나섰다. 


안동에 와서 보니, 안동교회는 예배당을 석조 2층으로 지었는데, 초량교회보다 컸다. 노회가 열리고 있는 회의장으로 들어가 보았다. 정종원이라는 장로님이 회장으로 사회를 보고 있었다. 회원들은 거의 가 한복 차림으로 양복 입은 이는 불과 두세 명뿐이었다. 휴식시간이 되어 회장님을 비롯해 여러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목사 회원들보다 장로 회원들이 훨씬 더 나를 반겨 주었다. 


그리고 김 장로님의 안내로 아래층에 모여 있는 안동교회 제직들을 만났다. 모두 결정이나 된 것처럼 나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마음이 솔깃했으나 초량교회에서는 아직 내가 여기에 온 것을 모르고 있으니, 가서 이야기를 하고 허락을 받은 후에 오겠다고 했다. 초량으로 돌아간 나는 당회장 목사에게 보고를 하고 사표를 냈다. 초량 당회와 교회도 허락해 주었다. 내가 부목사로 취임한 날이 1월 셋째 주일이었으므로 나는 그 주일을 초량에서 지내고 그 주간에 안동으로 왔다. 


나의 두 번째 교회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단독으로 목회한다고 생각하니, 절로 책임감이 앞섰다. 그때까지는 삭발도 하지 않고, 창씨명도 사용하지 않고, 전에 입던 양복을 그대로 입고 지냈다. 그러나 안동은 부산과 달리 작은 고을이므로, 그런 것으로 일경 당국의 신경을 쓰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면서 삭발도 하고, 창씨 명함도 새로 찍고, 국방복도 새로 지어 입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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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안동교회 2층 돌집 예배당에 모인 성도들

 

안동과 안동교회의 형편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며 태백산 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뻗어내리고, 그 주봉인 태백산에서 다시 뻗어나가 소백산 줄기를 이루는데, 그 사이를 또 일월산 줄기가 뻗어나 있다. 그 뻗어난 세 산줄기와 그 산줄기들 사이를 흘러내리는 두 물줄기가 낙동강과 반변천을 이루어 안동에 와서 서로 마주치게 된다. 


이처럼 안동은 삼산이수(三山二水)가 모여드는 곳에 위치하여,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산들이 과히 높지 않고 토질이 사질양토이며 수원이 좋아서 도처에 샘이 솟고 뒤에 산을 등진 남향이어서 사람이 살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옛날 신라 때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다.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본고장으로, 퇴계의 진성 이씨, 서애의 풍산 류씨, 학봉의 의성 김씨, 그 밖의 많은 명문이 각각 큰 마을을 이루어 사는 고을이다. 그래서 인다안동(人多安東)이란 말이 생겨났을 만큼, 큰 인물들이 많이 났다. 


한국에 와서 선교하게 된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에서는, 안동이 교통이 불편한 그때 형편으로서는 대구 선교회로부터 사흘 길이나 되어 돌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안동에 따로 선교부를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중심지인 안동에 교회가 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안동에 교인이 생겨나게 되자 대구 선교부에서는 풍산교회 교인 김병우(金炳宇)를 매서인으로 하여 1909년 8월에 종교 서적을 파는 서점을 열게 하고, 믿게 된 이들을 모아서 그달 둘째 주일부터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안동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선교회에서는 또 그 일대에 있던 옛 기와집 여러 채를 사들여서 선교사들의 임시주택으로 썼다. 원주에서 선교하던 오월본(A. G. Welbon)과 새로 온 소텔(C. C. Sawtell)과 의사 별이추(A. G. Fletcher)가 초대 안동 주재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이 선교사 임시주택들이 그 후 교회와 병원, 학교가 되었다. 


안동교회는 그 지역성과 설립된 배경에 따라, 선비의 기질과 선교사의 영향이 짙었다.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안동교회의 이 성격은 그대로 드러나서 대체로 참배 반대쪽으로 흘렀다. 그러나 노회는 교회를 유지해야 하므로 그럴 수 없었다. 따라서 안동교회는 노회 협력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노회의 주도 세력은 절로 안동을 떠나 영주로 옮겨 가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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