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 목사 자서전 “이 풍랑 인연하여서”] 경남노회에서 안수받음, 그리고 초량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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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노회에서 안수받음
나는 아직 목사안수를 받기 전이어서 그 해를 전도사로 지냈다. 감사하게도 복잡하고 시끄럽던 교회가 평온해졌다. 당회에서는 교회를 더욱 새롭게 하는 의미에서 임시직을 새로 임명했다. 그리고 나를 부목사로 청빙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강도사 고시를 치르고 12월에 열리는 경남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받았다. 노회에서는 나를 우대해 주었다. 본래 외국에서 신학을 마치고 오면, 평양신학교에서 1년을 수학한 다음에 안수 절차를 밟게 하는 법이었는데 내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일본으로 간 것과 이미 반 년 이상 전도사로 지낸 것을 감안하여 바로 안수받게 해준 것이다.
당시의 노회 형편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지난 역사를 간단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부산에 처음 온 외국 선교사는 1889년에 온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G. W. Davies)와 1891년에 온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W. M. Baird)이었다. 그 후 선교구역 협정으로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경북으로 옮겨 가고, 경남은 호주 선교회의 전담 선교구역이 되었다. 호주 선교사들은 모두 한 곳에 몰려 있지 않고 부산, 마산, 진주, 통영, 거창 등 여러 곳에 분산하여 있으면서 선교활동을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경북으로 간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보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적었다. 이 점을 경남지방 교회 지도자들은 늘 불만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참배 문제가 일어났을 때, 끝까지 참배를 거부한 지사들은 전국에서 경남이 가장 많았다. 한국 교회의 자랑이요, 꽃인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최상림,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은 모두 경남 출신이었다. 이런 분들이 많이 난 곳이니 따라서 그분들이 끼친 영향이 컸고 교인들은 모두 그분들을 추앙했다. 그런 판국이니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하는 현직 지도자들의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쪽 세력이 강하면 다른 쪽 세력도 강해지는 법이다. 많은 참배 거부자가 나온 경남에서도 한편으로는 참배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경남노회도 점차 그들에게 이끌리고 있었다. 이미 선교사들은 전쟁으로 모두 철수한 다음이었다.
초량 시절
초량에서 나는 신혼살림과 교역생활을 함께 시작했다. 나는 교회 행정은 당회장의 소관이니, 그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내가 할 일만 했다. 특히 심방하는 일에 힘썼다. 아내가 음악에 재능이 있어서, 예배 때 반주와 성가대 인도를 하게 되어 교회 분위기에 많은 활기를 불어넣었다.
해가 바뀐 1942년 2월 13일에 일본은 싱가포르를 함락시켰다고 매우 법석을 떨었다. 그 직후인 22일에 나의 가정에는 귀여운 선물이 있었다. 맏딸이 태어난 것이다.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한참 유행하고 있는 자(子)자를 붙이기가 싫었다. 때가 때인 만큼 일본식 이름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어서 일본식과 한국식이 다 통하는 정혜(靜惠)라고 지었다. 세상이 매우 어수선하고 시끄러운데, 하나님께 서는 나의 가정에 “고요한 은혜”를 주셨다는 뜻이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순교자 주기철 목사
그때 초량교회 안에는 특별한 기도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매월 모여서 기도회를 열고 성금을 모아서 평양 감방에 수감 중이신 주기철 목사님께 의복이나 음식물을 차입해 드리는 일을 했다. 그들은 그 모임에 나를 청하기도 했다. 나는 당회장 목사님과 상의한 다음에 다른 지장이 없는 한 가서 그들을 도와주었다.
부산에서 평양이 얼마나 먼 곳인가. 그런데도 그들은 매달 그 일을 계속했다. 갸륵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물론 주기철 목사님도 참으로 훌륭하신 목사님이셨지만 교인들의 그분에 대한 사랑도 특별한 것이었다. 아마 목사님 중에 주 목사님처럼 교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신 분도 드물 것이다. 주 목사님은 그때 초량교회의 시무목사도 아니었다. 초량에서 마산 문창교회로 가셨다가 거기서 다시 평양 산정현교회로 가셨던 분이다.
일경 당국은 내가 초량으로 간 후에 한 번도 교인들을 데리고 참배하러 나오라고 한 일이 없었다. 참배는 원칙적으로 다 하는 것으로 낙착이 된 때문인 듯했다. 그리고 날로 확장되어 가는 전선의 뒷바라지에 급급하여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나 도경찰국에서는 자주 찾아왔다.
하루는 경찰이 찾아와 어떤 시국에 관한 문제에 대한 내 의견을 물었다. 대답하기가 좀 난처한 문제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신의 질문이 일반 교계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묻는 것이냐, 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묻는 것이냐?”고 역습을 했다. 물론 그가 내 자신의 의견을 물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내 말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겁이 났던지, 그만 좋다고 해서 간신히 위기를 넘긴 적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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