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 목사 자서전 “이 풍랑 인연하여서”] 3. 치안유지회와 인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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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유지회의 조직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김경한 씨 집에서 곧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곳에 가니 그날 저녁에 군민대회를 열고, 금후 대책을 강구하자는 논의를 하고 있었다. 나도 찬성했다. 모두들 그날이 마침 장날이기도 하니 잘되었다고 하면서, 벽보도 붙이고 확성기로 군민대회가 열리는 것을 알리자고 했다. 그날 저녁 읍사무소에서 열린 군민대회에서는 검속되었던 5인을 포함한 15인을 전형위원으로 택하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전형위원들은 곧 모임을 갖고, 서울에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으니 우리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의 의견은 달랐다. “우리가 안동국을 세운다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마는 그렇지 않다면 해방된 지금까지도 일인들에게 치안을 맡기고 있는 자기모순을 깨달아 무엇보다 먼저 치안유지회를 조직하자”고 했다. 모두 내 말에 따라 주었다. 전형위원들이 모두 치안유지회의 위원이 되기로 하고 위원의 증원이나 부서는 전군(全郡)을 망라해서 선출하기로 했다.
모두 나에게 위원장이 되어 달라고 했다. 나는 치안유지회 위원장은 임시 경찰서장 임무를 맡는 것이니 이대용 씨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대용 씨는 임정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씨의 장손이다. 그대로 합의가 되었다. 그러면 고문이라도 되어 달라고 했다.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전군을 망라해서 위원을 증선했다. 그리고 중앙 정세를 알기 위하여 위원장과 고문, 두 사람을 곧 상경시키기로 합의하고 산회했다.
그래서 나는 그다음 날에 상경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수집한 중앙의 정세는 다음과 같았다.
8월 15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遠藤)의 요청으로 그를 만난 여운형은 송진우측의 협력을 못 얻은 채, 안재홍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에 착수했다. 17일에는 다음과 같이 부서 조직을 정하여 발표했다.
총 재 이승만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부장 최근우, 재무부장 이규갑
조직부장 정 백, 선전부장 조동우
무경부장 권태석
이때 민족진영 인사들은 송진우, 백관수, 한학수, 윤보선, 이인 등의 집에서 각각 모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건국준비위원회에 맞서는 임시정부 환국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곧 활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이에 앞서 16일에 안국동 풍문여학교를 본부로 하여, 장권을 대장으로 하고, 정상윤을 사무국장으로 한 건국치안대가 조직되었다. 그때 거리에는 치안대의 완장을 두른 청년들의 활동이 특별히 눈에 띄었다.
19일이었다. 미국 공군기가 서울 하늘을 날면서 삐라를 뿌렸다. 동경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에서 뿌린 것이었다. 영문으로 된 삐라의 내용은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일본군에게 치안책임을 맡긴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일본군은 기관총을 서울역 베란다에 설치하고, 한 놈이 군모를 눌러 쓰고, 역전에 몰린 군중을 노려보고 있었다. 착하기만 한 한인들은 모두 겁을 집어먹고 행동을 삼갔다. 전과 같지는 않았지만 일경들이 다시 집무하는 체했다.
나는 그 상경길에 애국가 전문을 구해 안동으로 돌아왔다. 교회에서 제일 먼저 부르고 등사를 하여 각 학교에 나누어 주어서 부르게 했다. 나는 애국가를 부르며 감격에 겨웠지만 삼천리라는 말이 거슬렸다. 새 나라의 기상을 펴는데 부족한 말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우하사라는 말이 있어서, 이 말을 국민 모두의 입으로 불리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서 그대로 보급했다.
인민위원회의 출현
안동에 미군이 진주한 것은 9월 8일이었다. 치안유지회에서는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나와 백태성 씨, 전봉빈 당시 안동군수 등 3인에게 의성까지만이라도 마중을 나가 줄 것을 부탁했다. 수락을 하고 갔다가 돌아와 보니, 그 사이에 치안유지회를 해체하고 인민위원회로 바꾸어 버렸다. 그들의 술책에 넘어간 셈이었다.
인민위원회는 며칠 사이에 일사천리로 각 면부에 면인민위원회 민주청년동맹농민조합 등을 조직했다. 인민공화국 천지가 되어 버렸다. 많은 유림 출신들이 인민위원회에 앞장섰다. 군내 인재를 총망라해서 조직한 치안유지회가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고 만 것이다.
사실 안동 유림 중에는 일정 때부터 좌경한 사람이 많았다. 안동은 인구에 비하여 경지 면적이 부족하므로 살기가 어려운 편이었다. 그래서 유림들은 본래 과거를 보아서 벼슬살이를 하며 근근이 살아왔는데 일정 36년 동안 벼슬도 못하고, 또 농사짓는 기술도 부족하여 생활하기가 힘들자, 절로 좌익사상에 물들게 되었던 것이다. 풍산 같은 데서는 일정 때도 소작 쟁의가 끊이지 않고 이어 일어나곤 했다. 그래서 북 단청, 남 안동이란 말이 생기게 될 정도로 좌익 명사 중에는 안동 출신이 많다. 해방 후 '정판사 위폐사건'의 권오직 같은 이도 안동 사람이다. 갑자기 천지가 뒤바뀌자 인심이 매우 혼란해졌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일정 때 일인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친일파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고 기를 못 펴게 했다. 한 동네, 한 집안 사이에서도 재산이 있고 없는 것으로 인한 수화불통하는 일이 심해 원한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권중순 같은 이는 청년들을 규합하여 헌신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되고, 권현섭 같은 이는 우국노인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좌익계의 기세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했다.
나는 정교분립주의를 취해 일체 정치적인 일에 가담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고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안동이 인민공화국 천지가 되어 버리는 것을 좌시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교회가 직접 정치운동을 하는 것은 삼가더라도, 나 개인적으로는 무엇인가를 나서서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뜻을 통할 만한 인사들을 찾아 상의를 했다. 모두 뜻은 찬동했으나 앞장서기를 꺼렸다.
나는 우선 우익진영을 만들 기초를 장만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그때 안동에 진주한 미군 장교 가운데 미국 프린스턴 대학 교수를 지낸 밀러(Miller)라는 중위가 있었다. 그와 백태성 씨와 내가 강사가 되어, 우리 교회 아래층에서 영어 강습회를 열었다. 청년들이 200여 명이나 몰려들었다. 나는 영어 강습도 강습이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강습에 주력했다.
그때 안동에 평남 진남포 출신인 최매지라는 치과 의사가 있었다. 아주 능변이신 여자분으로서 3•1운동 때 3년이나 복역을 하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분을 중심으로 활동력이 있는 여전도회 간부들과 안동 읍내에 거주하는 중학교 이상을 졸업한 여성을 가능한 한 모두 모아 애국부인동지회를 조직했다.
때마침 미군정청에서 군정고문제 실시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미 진주군은 맨 먼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모든 행정을 접수하여 군정을 폈다. 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아놀드 소장을 군정장관으로 임명하고 유능한 한인 인사들을 고문으로 위촉하여 중앙관서 조직을 개편했다. 미군정청의 발표는 곧 고문제를 지방에도 실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동에는 이•동 고문을, 읍•면에는 읍•면 고문을, 시•군에는 시•군 고문을, 그리고 각 도에는 도 고문을 두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고문선거 기회를 이용하여 우익단체를 조직하기로 했다. <계속>

고 김광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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