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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목사 자서전 “이 풍랑 인연하여서”] 2. 나의 갇힘과 놓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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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광현 목사| 작성일2025-04-03 | 조회조회수 : 4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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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갇힘  


8월 7일이었다. 나는 교회 일로 대구에 가게 되었다. 일도 일이지만 나는 정보 듣기에 몰두했다. 어떤 친구의 말이 지금 대화숙(大和塾) 관련자들을 예비검속하라는 지령이 내렸다는 것이었다. 긴장은 되었지만, 나는 대화숙 관련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내 차례는 아니구나 하고 안심하고 그날 저녁 안동으로 돌아왔다. 열차가 많이 연착되어서 새로 한 시나 되어서야 안동역에 도착했다. 


역에는 많은 형사가 깔려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도경 고등과장이 예비검속자의 명단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었다. 오월이 동주(吳越同舟)한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몸을 씻고 잠자리에 들자마자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아무런 심문도 없이 나를 곧바로 감방에 집어넣었다. 그때 감방에는 안동농림학교 사건으로 들어온 젊은 학생들이 많았다. 내가 든 감방에는 같은 사건으로 들어왔지만, 학생이 아니고 주모자격인 이승태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민족 지도자들이 들어온다고 하더니 목사님이 들어오셨군요” 하면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조금 있다가 월곡의 이대용 씨가 들어오더니 그 이튿날에는 풍산의 이준태 씨, 임동의 유연술 씨, 그리고 도산의 이원호 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이원호 씨와 이대용 씨를 같은 감방에 들게 하고, 이준태 씨와 유연술 씨를 같은 감방에 들게 하고, 나만 다른 감방에 들게 했다. 나를 괴수 취급하는 모양이었다. 


감방에 있는 동안 나는 사식을 했는데 아내가 도시락을 꼭 신문지에 싸서 넣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신문을 감방 안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그때 간수는 징병을 피하기 위하여 경찰에 들어온 오영호 씨였다. 뒤에 한양대학 학장을 지낸 그는 나와 우리집에 연락을 해주었다. 


8월 15일 정오 감방에서 나는 해방을 맞았다. 경찰서 직원들이 서장실로 몰려가는 것을 보았다. 곧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떨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조금 후에 그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우리 감방 앞으로 온 오 씨가 나직한 목소리로 일본 천황이 항복하는 방송을 했다고 했다. 


나는 반갑기도 하고,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얼떨떨해졌다. 눈에서 눈물이 솟았다. 감방에 있는 학생들을 부둥켜안고 기뻐했다. 진정된 다음에 다 함께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더욱 마음을 가다듬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 나는 앞으로 해나갈 나의 목회 계획도 세우게 되었다.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하게 된 것은 8월 6일에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곧 이어 9일에 나가사키(長崎)에 제2 탄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폭탄 하나가 수십만의 사람이 사는 도시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니 최후의 한 사람이 되기까지 끝까지 싸운다던 일본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그들은 8월 15일 무조건으로 항복하고 말았다. 


뒤에 들은 말이지만 그날 내가 대구로 호송될 것이라는 오 씨의 말을 듣고, 아내는 나의 행방을 알기 위해 군청 앞 걱정나무 밑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황의 방송 덕분에 호송은 되지 않았다.


나의 놓임 


서울의 정치범들은 8월 16일에 풀려났지만, 안동에서는 17일 정오가 되어서야 풀려나게 되었다. 이날 서장을 위시한 일인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당시 사법주임이던 정 씨 성을 가진 경부가 예비검속으로 들어간 우리 5인과 안동농림학교 사건으로 들어간 학생들을 연무관으로 인도해 들였다. 


안동농림학생 사건은 일제가 반전운동으로 내몬 사건이었다. 그해 2월에 60여 명이나 검거되었다가 대부분 풀려났지만 그때까지도 20여 명이 남아 있었다. 모두 19세에서 20세 정도의 젊은이들로서, 그 중 한 사람인 우리 교회 학생 손성한 군은 옥사까지 했다. 정 주임은 눈물을 흘리며 그간의 일에 대하여 용서를 빌었다. 그때 내 느낌에 이대로 석방되어 나가면, 결코 평온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이가 든 세대들은 몰라도 혈기방장한 젊은이들이 반 년이나 갇혀 있었고, 동료 한 사람이 죽기까지 했는데,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나는 평소 설교하던 버릇대로 일장 연설을 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풀려납니다. 여러분의 감정대로라면, 일인들을 모조리 때려잡고 집과 재산을 불태워 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방이 되었고, 그들이 가졌던 모든 재산은 유리 한 장, 종이 한 장까지 다 저희 것이 아니고 우리 것입니다. 그것을 없애 버리는 것은 우리의 재산을 없애는 것이니,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맙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괴롭혔지만 우리는 보복하지 말고 선하게 대하여, 저희 나라로 고이 돌려보냅시다.” 


모두 감방에서 나왔다. 그날은 소나기가 한 차례 내린 다음이어선지, 온 세상이 깨끗해 보였다. 경찰서 앞의 걱정나무 잎도 더 한층 푸르렀다. 그때 거기 마중 나온 이들 중에 김경한 씨가 우리를 환영하면서, 자기 집에 유지 여러분이 모여 있으니 그리로 가자고 했다. 


나는 “고맙지만 아직 부모님을 뵙기 전이니 할 말은 뒤에 하자”고 하고, 아내와 마중 나온 교인들과 함께 교회로 왔다. 오면서 보니 “일본인을 선대하자”는 벽보가 사방에 붙어 있었다. 교회에서 붙인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것이 고마웠고 무슨 큰 승리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감방 안에 있던 나와 밖에 있던 장로님들의 마음이 이렇게도 서로 통하는가 싶어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안동의 일본인들이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평안히 그들의 나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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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광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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