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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천사 가브리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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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36 




     

    ‘성경 인물 탐구,’ 오늘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명의 죄수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왜 십자가형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다만 이들이 ‘강도’(마 27,38; 막 15,27) 혹은 ‘죄수’(눅 23,32)라고 표현합니다. 당시의 십자가 처형은 정치범에게 주어지는 처형방식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강도들이 단순한 절도를 범한 죄수가 아니라, 로마 제국에 저항한 ‘첼롯파’ 테러리스트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 인물 탐구’는 두 명의 강도 가운데 한 사람이 자술하는 형식으로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 1 >


    내 이름은 가브리엘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혹은 하나님의 힘’이라는 뜻을 가진 천사의 이름이기도 한데, 태어나면서부터 허약하여 아버지가 붙여주었다고 합니다. 성장하면서, 같은 이름을 가진 천사가 구약성서의 예언자 다니엘에게 나타나 환상의 의미를 설명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나도 다니엘처럼 나라를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아버지의 기대가 반영된 것이겠지요. 비록 몰락한 사제 계급에 속하기는 하지만, 아버지는 예루살렘의 변두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언제나 나라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남 왕국 유다가 주전 5세기 멸망한 이래, 평온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특히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틴을 정복한 때부터, 기원후 74년 4월, 로마 장군 실바가 유대 저항군의 마지막 항전지 마사다를 함락할 때까지, 크고 작은 저항운동들과 테러가 그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나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간 것은 친구였습니다. 갈수록 무거워지는 세금과 대지주들의 착취와 억압, 가뭄과 기근으로 악화되는 가난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나를 저항운동에 참여시킨 것이지요. 우리는 로마 군대와 유대 왕 헤롯 안티파스, 대제사장들의 통치와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도시 변두리에 숨어 살면서, 비밀리에 암살과 납치로 대항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의 압박은 물론, 로마 총독의 잔인한 군사적 진압으로 수많은 비적들, 강도들, 그들과 동조한 평민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자신도 한 때는 유대 저항군이었지만, 포로가 되어 통역관으로 로마군단을 따라가면서 ‘유대전쟁사’를 쓴 요세푸스는 우리를 로마 제국의 군인들처럼, ‘도적들’, 혹은 ‘강도들’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되찾으려던 저항집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흔히 ‘시카리오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자객, 단도를 가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로마 총독과 군대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지방에서 도시로 숨어들어, 긴 옷 속에 짧고 구부러진 단도를 숨기고 있다가, 적을 살해하고 도주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요.


    그러나 민족해방과 자유를 위해 저항하는 집단은 우리 ‘시카리오이’ 만이 아니었습니다. 무거운 조세 부담 같은 억압과 착취, 기아 때문에 일어난 ‘사회적 비적 떼’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산악지대나 늪지대, 숲지대 같은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고, 총독의 관할권이 애매한 경계지역도 이들의 주요 활동지였습니다. 또 다른 저항집단은 민중이 직접 선출하여 기름을 부은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메시아 운동의 성격을 가진 단체들, 또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선언하고 추종자들을 모은 민중적 예언자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나는 친구와 함께 로마 총독의 앞잡이 일을 하는 대제사장 귀족 한 명을 살해하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유월절 축제 절기가 가까이 와, 도시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군중들 속에 뒤섞여 있다가 암살하기도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의 검문검색도 강화되었습니다. 명절이 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왔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소요와 시위를 사전에 막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온 것이지요. 로마 군인들을 피해 도망가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 내 목덜미를 낚아채는 것이었습니다. 놀라 돌아본 순간, 로마 군인이 방패로 내 머리를 내리쳤고, 나는 기절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깨어보니 나는 동료와 함께 로마 총독의 예루살렘 주둔 군영인 안토니오 요새 지하 감옥에 있었습니다. 얼굴에까지 흘러내린 말라버린 피를 닦으며 어두운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옆방에 다른 한 죄인이 엎드려 있었습니다. 밖은 소란했습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총독에게 고발하는 소리였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눅 23,2).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해? 그럼 지금 옆에 갇혀 있는 사람도 우리와 같은 ‘시카리오이’란 말인가? 아니, 그런데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자칭한다고? 그럼 메시아 운동가인가?


    ‘당신은 누구요?’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안토니오 군영 마당은 잠시 조용하더니, 다시 시끄러워졌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기 때문입니다. ‘이 자를 없애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시오!’(눅 23,18)


    ‘바라바라면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혀있는 우리 편이 아닌가! 그런데 바라바를 풀어주고, 대신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차피 우리도 죽은 목숨. 어쩌면 셋이 함께 십자가에 매달릴지도 모르지요.


    < 2 >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재판이라고도 할 수 없는 요식행위였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가능한 모든 일을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기 전, 총독 공관 뜰에서 매질과 채찍질이 있었습니다. 납덩이를 단 채찍은 살점을 뜯어내면서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우리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자칭 그리스도라고 한다는 사람을 조롱했습니다.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운 뒤에,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면서 저마다 인사를 했습니다. 또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무릎을 꿇어서 그에게 경배하면서 희롱했습니다(막 15,17-18).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으로 깊은 신음을 뱉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채찍질이 끝난 후, 병사들은 십자가의 가로대를 어깨에 맨 우리를 끌고 갔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청년은 우리보다 훨씬 약해보였습니다.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지친데다가 혹독한 채찍질까지 당했으니 견딜 재간이 없겠지요. 가다가 쓰러지고 또 쓰러지자, 로마 병사는 길 가던 한 사람에게 강제로 그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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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ns von T&#252;bingen, 「Crucifixion」(1430년경) ⓒWikipedia


    마침내 해골이라고도 불리는 ‘골고다’ 언덕에 다다랐습니다. 언덕에는 이미 십자가의 세로대가 단단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가로대를 땅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병사들이 우리 두 팔을 잡고 땅바닥에 놓인 가로대에 눕혔습니다. 무릎으로 두 팔을 강하게 압박한 후, 순식간에 양 팔목에 대못을 박은 후, 가로대에 묶인 우리를 번쩍 뒤에서 들어 세로대에 걸쳐 놓았습니다.


    이미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습니다. 십자가의 세로대 아래 부분에는 포갠채 못이 박힌 두 발을 받칠 수 있는 아주 작은 받침대가 있어, 고통스럽지만, 무릎을 조금이라도 펼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무릎을 펴면 잠시지만 호흡이 편해졌지만,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두 팔은 점점 하늘을 향하게 되고, 마침내 질식하여 죽게 됩니다. 로마식 십자가 책형의 사인(死因)은 출혈 때문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질식사였습니다.


    고통스럽고, 잔혹한 십자가 처형방식을 처음 고안한 사람들은 사실 페니키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사형집행 방법을 사용했는데, 창으로 찌르고, 기름으로 졸이고, 말뚝에 끼우고, 돌로 치고, 목을 조르고, 물에 빠뜨리고, 불에 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인이 너무 빨리 죽기 때문에, 그들은 죄인을 천천히 참혹하고 고통스럽게 처형하는 방법으로 십자가형을 고안해낸 것이지요.


    로마가 십자가형을 시행한 것은 일종의 공포정치였습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집행된 십자가형의 목적은 고통을 증가시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어, 제국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로마인의 관습으로는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은 십자가 위에 그대로 방치하여 썩게 하거나, 내던져 버려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이 정해진 규정이었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어가야 하는 것도 견디기 어렵지만, 이 고통은 죽음과 함께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참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매장되지 못하고, 우리 후손들이 죽은 이와 함께 음식을 먹고 애도하기 위해 찾아올 장소를 전혀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과 영원히 격리된 채,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치욕은 더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우리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리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고, 십자가형으로 죽은 시체들도 예루살렘 성문 밖 가깝고 낮은 골고다 언덕 위에는 종종 걸려 있어, 낯선 일도 아니었습니다. 주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죽었을 때에는, 반란을 일으킨 유대 사람 2천 명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고,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에는 하루에 500명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같이 이름도 없는 시골 출신의 테러리스트를 누가 기억이나 하겠습니까!


    < 3 >


    그런데 우리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청년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는 죄 패가 붙어 있었습니다(눅 23,38). 한 편으로는 나사렛 출신의 이 청년만이 아니라, 이 청년을 고발한 자들도 조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의 왕도 처형할 수 있는 자기 권한을 과시하려는 빌라도 총독의 계산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 백성들은 서서 다만 바라보고 있었고, 로마 병사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그를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갑자기 나와 함께 십자가형을 받는 동료도 그 청년을 모독하며 말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실패한 테러, 나라를 빼앗긴 울분 때문이었겠지요. 아니면, 이 청년이 전했다는 하나님 나라 복음과 비폭력 저항으로는 결코 나라를 로마 제국과 이들과 유착한 유대 지배자들의 폭정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마땅한 벌을 받는 것이지만, 이 청년은 사실 아무 것도 잘못한 일이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된 것이 도대체 무슨 죄가 된단 말입니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예수라고 불리는 이 청년이 믿고 선포했던 그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모릅니다. 나와 정치적 신념도 달랐고, 내가 원한 새로운 나라도 그가 말한 하나님 나라와 다를지 모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이 내가 믿고 지켜온 신념이었습니다. 힘은 오직 힘에 의해서만 극복되는 것이지, 사랑으로는 이길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주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귀가 의심스러웠습니다. 혹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자기를 조롱하고 모욕하며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 대제사장도 일 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를 막은 휘장이 찢어졌다고 합니다.


    평생을 증오와 폭력으로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사랑과 용서가 하늘도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과 성전을, 사람과 사람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막이 찢어져, 이제는 누구나 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청년 예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


    그 때, 그 분이 처음으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점점 앞이 캄캄해 보이지 않고 머리는 부서질 듯 아팠습니다. 갈증은 입술을 태워 입천정에 붙었습니다. 차라리 내 무릎 뼈를 골절시켜 조금이라도 일찍 숨을 거둘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로마 병사들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서서히 내 앞으로 한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천사 가브리엘이었습니다. 30여 년 전,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에 사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수태를 고지한 천사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눅 1,30).


    마리아에게 그렇게 말했던 천사 가브리엘이 지금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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