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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과 대제사장 힐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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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⑻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요시야 왕(? - 609)


    ‘요시야’는 교회에서 많이 언급되는 왕 중 한 명입니다. 그가 ‘히스기야’와 마찬가지로 종교 개혁을 일으켰기 때문이고, 특히 「열왕기하 23장 22절」에 따르면, 그는 사사시대 이후로 유일하게 유월절을 지킨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22장, 23장」이 긴 절을 할애하며 ‘요시야’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 고고학적 자료는 전혀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여호아하스’를 살펴볼 때 ‘요시야’가 주전 609년 이집트 파라오 ‘느고(네카우 2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관해서도 ‘느고’가 당시 아시리아를 돕기 위해 북진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지, 남왕국의 왕 ‘요시야’를 죽이고 속국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열왕기하 23장 28-30절, 33절」의 기록에 따라 ‘느고’의 북진 시에 ‘요시야’가 죽었고 귀환 시에 ‘여호아하스’가 폐위되었다고 추정할 뿐입니다.


    열왕기에 ‘요시야’에 관한 내용이 두 장이나 있으면서도 ‘요시야’ 개인에 관한 주변 기록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간단합니다. 「열왕기하 22장 3절 ~ 23장 27절」에 나타난 두 장에 걸친 이야기는 종교 개혁에 관한 내용만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의 이야기에서 종교 개혁과 관련된 이야기를 빼면, ‘아버지 아몬이 죽은 후 왕이 됨(왕하21:26)’, ‘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31년간 다스림(왕하22:1-2)’, ‘바로 느고에 의해 므깃도에서 죽음(왕하23:28-29)’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종교 개혁을 빼면 ‘요시야’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요시야’ 개인에 관한 고대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요시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과 유적 발굴 작업은 진행되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요시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장입니다. ‘왕의 종 나단멜렉’이라고 적혀 있는데, 「열왕기하 23장 11절」에 나타난 내시 ‘나단멜렉’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부 학자들은 남왕국과 그 주변 지역에서 발견되어 ‘요시야’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인장’, ‘인장 자국’, ‘오스트라카’(ὄστρακα, 도기 파편들), ‘무게추’ 등을 종교 개혁과 연관하여 해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요시야’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남왕국의 문자와 문화가 보급된 증거라고 해석했습니다.


    이와 함께 「열왕기하 23장」의 기록에 의하면 종교 개혁은 과거 북왕국 영토였던 지역에서도 이루어졌는데, 이를 미루어 ‘요시야’가 영토 확장 정책을 펼쳤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유적 발굴 연구에 따르면 ‘요시야’ 시절에는 외부 확장보다 내부 안정 정책이 우선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멸망한 북왕국의 남부 지역이 남왕국에 편입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요시야’의 영토 확장 정책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최근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이 최근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더 큰 이유는 신명기에 관한 연구 때문인데, 이에 관해서는 ‘요시야’ 종교 개혁을 조금 더 살펴본 이후에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요시야’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종교 개혁을 살펴봐야 합니다. 많은 학자는 요시야 통치 기간이 31년이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지만, ‘요시야’ 재위 18년(왕하 22:3)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을 살펴본 후에 추정 연대를 기록하려고 합니다.


    ‘요시야’ 종교 개혁에 관해서는 아직도 많은 학자의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어쩌면 글이 길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요시야’가 열왕기 안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과 그의 종교 개혁을 둘러싼 많은 부분이 바벨론 포로기 시기와 그 이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다뤄보려고 합니다.


    왜 구약성경에는 ‘힐기야’라는 인물이 많을까


    종교 개혁의 내용을 다루기에 앞서 「열왕기하 22장」에 나타난 ‘요시야’의 주변 인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종교 개혁의 중심적인 내용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요시야’ 시대로부터 바벨론 포로기에 이르기까지 권력 집단 간의 갈등 상황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요시야’와 함께 종교 개혁을 이룬 대표적 인물은 두 명이 있습니다. 대제사장 ‘힐기야’(חִלְקִיָּ֙הוּ֙)와 서기관 ‘사반’(שָׁפָ֣ן)입니다. 먼저 대제사장 ‘힐기야’에 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힐기야’는 성경에 종종 이름이 등장하는 이름이기에 가끔 혼동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히스기야’ 시절 왕국 책임자인 ‘엘리야김’의 아버지 ‘힐기야’(왕하18:18, 26, 37; 사22:20; 36:3, 22)도 있고, ‘예레미야’의 아버지 ‘힐기야’(렘1:1)도 있습니다. 히스기야 시절의 ‘힐기야’는 제사장도 아니었고 시간대의 차이도 크기 때문에 혼동하는 분들이 없지만, 간혹 학자 중에도 ‘예레미야’의 아버지 ‘힐기야’를 대제사장 ‘힐기야’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아버지 ‘힐기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대제사장 ‘힐기야’와 다른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과의 혼동은 약간의 오해로 넘길 수 있습니다만 조금 자세히 봐야 할 부분은 「역대기 6장」에 나오는 제사장 족보, 특히 ‘사독’ 집안의 족보입니다. 「역대상 6장 3-15절」에는 ‘아론’과 ‘엘르아살’로부터 이어지는 ‘사독’ 제사장 집안의 족보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힐기야’는 ‘살룸’의 아들이며 ‘아사랴’의 아버지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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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대기상 6장에 기록된 제사장 족보 ⓒ이성훈 


    우선 이 족보는 신뢰성이 떨어집니다. 「사무엘상 8장 17절」에 따르면 ‘사독’은 다윗 왕조가 세워졌을 때, ‘아히멜렉’과 함께 제사장이 됩니다. 이 ‘사독’은 「역대상 6장 8절」에 나옵니다. 「역대상 6장 10절」은 ‘사독’의 4대손인 ‘아샤랴’가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이었다고 말합니다.


    「열왕기상」의 기록에 따라 ‘사독’이 제사장이 된 시점은 통일 왕조가 시작된 이후였고, 다윗의 헤브론 통치 7년 이후인 통치 8년차입니다(왕상2:11). 솔로몬은 통일왕국을 40년간 다스렸기 때문에(왕상11:42) 이 둘의 통치 기간을 합치면 73년이 됩니다. 73년의 기간 동안 한 집안에서 다섯 세대가 바뀌었다는 점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아사랴’ 이후 바벨론 포로기가 시작될 때까지 9세대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일전에 성경에 나타난 연대만으로 추정한 수치를 보면 ‘르호보암’에서 바벨론 포로기까지 360년이 걸립니다. 역대기는 한 사람이 대략 40년씩 제사장 직분을 수행한 느낌을 주며 족보를 전합니다.


    「역대상 9장 11절」에 따르면 포로에서 귀환한 이들의 명단 중, ‘힐기야’의 아들 ‘아사랴’가 하나님의 성전을 맡았다고 말합니다. 이미 6장에서는 ‘아사랴’의 손자 ‘여호사닥’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고 말했는데, 60년이 지난 포로 귀환 시에는 그 할아버지가 제사장 직에 오릅니다. 특히 「역대상 9장 11절」은 그 ‘아사랴’가 누구의 자손인지를 밝힙니다. ‘힐기야’의 아들, ‘사독’의 증손, ‘아히둡’의 5대손 등 성경 안에서 유명한 제사장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이는 「에스라」, 「느헤미야」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스7:1-5; 느11:11).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야」의 기록에 따르면 ‘힐기야’는 ‘사독’ 집안의 계보를 잇는 대제사장이었고, 그의 후손들은 ‘느부갓네살’에 의한 1차 포로기에 바벨론에 끌려갔다가 페르시아 시대에 귀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29장 3절」에 따르면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는 남왕국에 남아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함께 당시 왕이었던 ‘시드기야’를 돕습니다. ‘예레미야’는 포로기 이전의 예언자이고 ‘사반’ 집안과 ‘힐기야’ 집안과는 ‘요시야’ 시절부터 교류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기록이 더 신뢰가 갑니다.


    열왕기 역사가들이 기록한 역사서 속에서 대제사장 직분은 하나의 집안에만 세습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애초에 다윗 왕조에서 제사장으로 세워진 인물인 ‘사독’은 어디에서 나타난 인물인지조차 모호하고, ‘아히멜렉’은 놉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장 42절」에 따르면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은 제사장이 아니라 용사였습니다.


    또 대제사장이라는 표현 자체(הכהן הגדול, 하코헨 하가돌)도 사무엘과 열왕기 역사서 내에서는 「열왕기하 12장 10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 이전에는 그냥 제사장(הכהן, 하코헨)이라는 표현만이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 역사서는 제사장의 족보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직 연구 중에 있지만, 바벨론 포로기 이후 포로로 끌려갔던 제사장 집안의 인물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족보를 이용했다고 봅니다. 그 족보에는 과거의 유명했던 인물들의 이름이 유입됩니다. ‘사독’, ‘힐기야’와 같은 인지도가 있는 인물들의 이름이 사용됩니다. 


    이들이 실제 ‘사독’의 자손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요시야’와 함께 했던 대제사장 ‘힐기야’의 자손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힐기야’의 자손은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사독’ 자손들과 ‘예레미야’와 함께 ‘시드기야’를 도왔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들은 포로 귀환 당시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족보와 다르게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족보를 구성합니다. 서기관인 ‘에스라’가 자신을 그 계보를 잇는 인물이라고 말하는 점을 보아도 이 족보가 어떤 독자적인 정통성을 위해 사용되고 있음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를 포함한 이 집단은 분명 자신들의 정통성을 ‘사독’과 ‘힐기야’에 두고 있지만, 이들은 대제사장 직분을 계승하기 위해서 족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정확히 무엇을 얻기 위해 족보를 이용하고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만, 이들의 행동은 어떤 문헌의 기록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 「역대기」에도 이들의 손길이 미쳤고, 「에스라」, 「느헤미야」에도 이들의 손길이 닿아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세’에게로 돌리는 오경에도 이들의 손길이 닿아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제사장과 서기관의 중간 역할을 수행한 이들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언자들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소명 사건’을 말합니다(사6:1-13; 렘1:4-10; 겔1:1-3:15 참고).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전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포로기 이후 이러한 소명 사건은 자신의 예언자적 정통성을 주장하는데 사용하기 어려워졌습니다. 포로기가 시작될 당시 너무도 많은 이들이 소명을 받았다고 말해왔고, 이들의 예언은 대부분 틀렸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에스겔’의 예언도 그가 이상 중에 보았던 제2차 성전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틀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고 말하는 집단, 제사장 집안 출신으로 바벨론 포로기를 겪었고 다시 귀환한 집단은 과거의 유명한 제사장들의 이름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또 과거의 예언자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면, 이들은 ‘글’을 통해 동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고 했다고 보여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기를 겪으면서, 또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선택한 방식은 ‘문서’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국 이들이 남긴 문서입니다.


    아마도 이 시기에 구약성경 대부분이 편찬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부분은 구약성경이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시까지 구전되던 이야기들이 이 시기에 글로 기록되고 편찬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일부 창작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 성전의 대체재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신약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성전 중심의 사두개파와 율법 중심의 바리새파는 이런 영향 아래에서 나뉘게 되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에 다루게 될 ‘사반’이나, ‘예레미야’와 연결하여 당시 이스라엘 고위 집단의 권력 갈등의 입장으로 역사를 보기 때문에 이들의 모습을 좋게 보지만은 않습니다. 다만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족보를 통해 정통성을 얻으려고 애썼고, 문서라는 새로운 방식을 통해 신앙을 전달하려고 했던 이들의 노력만큼은 무시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인해 지금 우리가 성경을 손에 놓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 왕 시대의 대제사장 힐기야


    ‘힐기야’에 관해서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지만, ‘요시야’ 시대의 ‘힐기야’는 ‘사독’ 계보를 잇는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예레미야’의 아버지도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요시야’ 시대의 ‘힐기야’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열왕기하 22장 4-7절」에서 ‘요시야’는 ‘사반’에게 성전에 드린 은으로 성전 수리를 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7절에서는 은을 회수할 때, 이를 회계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열왕기하 12장 4-15절」에서 유래한 내용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란에 의해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당시 제사장들이 성전에 바쳐진 은을 성전 수리에 사용하지 않고 제사장 개인이 취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성전에 바쳐진 은은 오직 성전 수리에만 사용해야 하며, 궤에 은이 가득 차면 이를 서기관과 대제사장이 계산하여 봉하고 성전 수리하는 목수와 건축자에게 그대로 넘기도록 했습니다.


    ‘요시야’는 ‘요아스’의 전례에 따라 성전 수리 절차를 진행합니다. 다만 당시 제사장이었던 이들을 믿기 때문에 따로 계산하는 과정을 거치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이 부분만 보아도 ‘요시야’와 당시 제사장 집단, 특히 대제사장이었던 ‘힐기야’의 관계가 양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요시야’는 반대로 이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이런 조치를 취했는지도 모릅니다.


    ‘힐기야’는 서기관 ‘사반’에게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전달합니다. 이 율법책에 관해서는 나중에 신명기와 연관하여 더 구체적으로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가 간혹 성경을 슬쩍 읽다가 오해하는 점이 있는데,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한 시점은 성전 수리 도중이 아닙니다. 그 전에 율법책을 발견하였고, 성전 수리를 위한 은을 회수하기 위해 서기관 ‘사반’이 성전에 왔을 때, 그것을 전달한 것입니다. ‘힐기야’가 성전 어디에서 율법책을 발견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후 ‘힐기야’는 ‘요시야’의 명령에 의해 율법책의 내용을 확인하는 작업을 수행하였고(왕하22:12-14),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우상숭배의 흔적을 모두 없애는 작업을 합니다(왕하23:4-7). 이런 작업 과정에서 그가 ‘요시야’에게 반대하거나 주저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요시야’ 종교 개혁 집단의 중요한 일원이었습니다.


    ‘힐기야’의 이야기에서 너무 길어지긴 했습니다만, ‘요시야’ 시대가 왜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이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일면은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반’에 관해 다룰 때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예레미야’가 자신에게 협조적인 인물로 ‘사반’의 아들과 ‘힐기야’의 아들을 언급한 것은 쉽게 간과할 수 없기에 ‘힐기야’에 관해 조금 더 생각해보았습니다.


    이후에는 서기관 ‘사반’과 여예언자 ‘훌다’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서기관 ‘사반’은 나중에 남왕국의 총독이 된 ‘그달리야’의 할아버지이기 때문에도 살펴볼 필요가 있고, 서기관이라는 직책에 관해서도 신명기 역사와 관련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훌다’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부분이 있기 때문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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