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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30] 종교개혁자들이 갈라놓은 두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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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CM뉴스| 작성일2020-11-03 | 조회조회수 : 5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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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문학과 미술이 오랫동안 즐겨 채택한 모티브였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은 나사로의 누이들입니다(요 11,1-2).

언니 마르다는 매우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여인입니다. 마르다는 베다니 마을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드릴 만큼 적극적인 성격을 가졌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는 오시는 예수님을 맞으러 밖으로 나가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라도 주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요 11,21-23)라고 말할 정도로 확신에 찬 믿음의 여인입니다.

마르다는 부지런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손님을 접대합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음식을 장만하느라 부엌에서 땀을 흘리면서 일합니다. 이런 마르다 같은 여신도들이 없다면 지금의 교회도 유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고, 심방하고, 헌금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접대하고 설거지까지 하는 마르다 같은 여신도들이 없다면 과연 교회가 어떻게 될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하여 ‘일곱 귀신’에게서 해방된 여인(눅 8,2)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귀신이 하나도 아니고,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혔던 여인이었다면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의 여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프랑코 제피렐리(1923-2019)의 ‘나사렛 예수’(1977년)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진실에 가깝게 묘사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후,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을 때에도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요 11,20). 마리아는 매우 소극적이고 병약한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나드 향유 한 근을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은 죄 많은 여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요 12,1-8; 마 26,6-13; 막 14,3-9).

그런데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신 날, 마르다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마리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단지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언니 마르다는 못마땅한 것처럼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주십시오.”(눅 10,40)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 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눅 10,41-42)

후기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거장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1518-94)가 그린 ‘마르다와 마리아 집을 방문한 그리스도’라는 작품(1567)에는 마르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동생에게 무언가를 따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마르다는 음식 준비는 않고 예수님과 이야기만 하고 있는 마리아를 보고 잔뜩 울화가 치밀어 있는 모습입니다. 바로크 시대 스페인의 거장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의 작품(1618)도 불만스런 얼굴로 절구질을 하는 마르다를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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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copo Tintoretto, 「Christ with Mary and Martha」 ⓒWikipedia


그러나 마리아는 ‘중요한 일이 뭔지를 알고, 부수적인 일은 포기할 줄 아는 현명한 여자’, ‘결단성이 있었으며, 비록 잠시 방탕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는 하나 주님을 알고 난 후부터는 오직 주님 섬기는 일에만 열심이었던’ 여인, ‘존경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이 소유한 귀한 것을 아낌없이 바칠 줄 알았으며 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정말 그래서 예수님이 마르다보다 마리아를 더 사랑했을까요? 물론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를 매우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온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한 말이 그 근거라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와 계시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마르다가 가만히 말하자마자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예수님께 온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려서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울면서 말하자,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통해 하면서 우신 경우가 별로 없는 것에 비추어보아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예수님도 비통해 하며 괴로워하고(요 11,33, 38), 눈물을 흘렸다는 것(요 11,35)은 얼마나 예수님이 마리아를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뿌리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는 마리아의 행동 역시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요 12,3).

그렇다면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한 것이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개혁자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대립적인 인간상으로 그린 이후, 다시 말해 율법과 복음, 행위를 통한 구원과 말씀의 경청에서 오는 믿음을 통한 구원, 업적을 통한 의인과 믿음을 통한 의인으로 대립시킨 이 후, 지금까지 마르다와 마리아는 대립적인 인간상으로 그려진다는데 있습니다. 마르다는 활동적인 봉사의 삶을, 마리아는 명상적인 기도의 삶을 나타낸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한 것이 결국 행동보다는 기도를, 봉사보다는 명상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말일까요? 만일 우리가 오늘의 말씀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서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비밀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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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마르다를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으신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인에게 기대된 모든 일을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한 여인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이 자기 집에 오실 때,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도 마르다의 친절과 접대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처음에는 마리아와 마르다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본 마르다가 마침내 예수님에게 와서 말 합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주십시오.”(눅 10,40)

혼자서 땀을 흘리며 분주한 데 동생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못마땅해서 마르다가 그랬을까요? 마르다의 불평 뒤에는 단순히 도움에 대한 요청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유대 전통을 아는 사람은 곧바로 이 점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언니 마르다를 놀라게 한 것은 동생 마리아가 자기를 돕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여자로서 매우 점잖지 않게 행동한 것입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선생의 발 곁에는 오직 첫 번째 남자 제자만이 앉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남자 제자는 물론이지만 더욱이 여자가 랍비의 발 곁에 앉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랍비도 여자가 자기 발 곁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대단히 선동적으로, 다시 말해 해방된 여성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런 태도가 언니인 마르다를 놀라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순간에, 다시 말해 마르다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행동기준으로 삼고 그것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순간에 말씀 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눅 10,41-42)

예수님은 그 누구의 태도도 폄하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마르다와 조용하고 소극적인 마리아의 태도를 대립시킬 의도도 없습니다. 다만 누구도 자신의 행동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은사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거나, 다른 사람을 차별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경시하거나, 자신의 경건을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평가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형태가 어떻든 각각의 신앙생활은 존중되어야 하고, 각자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져야 합니다. 신앙과 은사의 다양성은 서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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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ego Velázquez,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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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것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서로 간섭하지도 말고, 너무 가까이 하지도 말고 그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성서는 그런 무관심을 권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마르다가 아니고 마리아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주님, 제 언니가 저렇게 부산을 떨면서 음식을 만들고 손님을 접대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제발 그만두고 조용히 앉아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해주십시오.”

만약에 마리아가 그렇게 말했더라도 예수님은 ‘마리아야, 마르다는 좋은 몫을 택하였으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같은 대답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우리가 성서로부터 아는 것처럼 당시의 관습에 의해 변두리로 밀려난 여인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 스스로의 힘으로는 독립할 수도 없을 만큼 허약하고 사람들의 편견과 곱지 않은 시선에 시달리는 여인이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지켜 보호하십니다. 그것은 지금 마리아가 말씀을 듣는 바른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를 탓하지 않으셨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에게는 인간관계의 조화로운 균형과 더불어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도 있습니다. 청년만이 아니라 노인도 있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교인도 있고 열심히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충만한 은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가 무엇이든지, 그것이 서로를 구별하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돕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쓰여야 합니다.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가 교회의 성숙한 성장을 돕는 때는, 우리가 언제나 약자의 편에서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은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가장 약한 곳, 가장 약한 성도들을 찾아 그들의 은사를 존중하면서 자신의 은사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직분과 은사는 섬김을 위해 주어진 것이지 지배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구를 가장 큰 사람으로 칠 것이냐를 놓고 말다툼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누가 더 높으냐? 밥상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밥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눅 22,27).

주님이 섬기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도 섬기는 사람으로 교회 안에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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