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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사상과 공로사상의 대결 - 칭의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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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CM뉴스| 작성일2020-10-13 | 조회조회수 : 5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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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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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교회 말기 면죄부 ⓒGetty Image 


이신칭의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비난


종교개혁자들이 ‘이신칭의’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개혁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중상 모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 교리가 우리 편에서의 아무런 행위나 공로 없이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신칭의 교리가 ‘선행을 배제한다’ 혹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지 못하도록 유혹한다’는 비난이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자가 칭의를 말할 때, 행위에서 칭의를 분리시킨 것은 결코 선행을 하지 말라든가, 어떤 행위를 선하다고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선행을 의지하고 그것을 자랑하며 그것으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III.xvii.1).


그리고 우리는 반대자들의 주장과 달리 칼빈은 “믿음은 선행을 결하고 있지 않다”(III.xi.1)고 강조했습니다. 개혁자들 가운데 칼빈만큼 성화를 주장한 개혁자도 없다는 것을 앞선 장들에서 확인했습니다(III.vi-viii). 그런데 지금 칭의가 문제될 때, 칼빈은 인간의 그 어느 행위도(중생한 사람의 행위도, 성령의 능력에 의한 행위조차도) 중요하지 않고, 모든 것은 하찮은 것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문제될 때, 그는 모든 행위들은 중요하고, 하찮은 행위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이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으므로 그 자신이 의로울 뿐만 아니라, 그의 행위까지도 자체의 가치 이상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III.xvii.9)는 놀라운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칼빈의 로마 가톨릭 공로사상 비판


우선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제14장에서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칭의가 어떻게 시작되며 또 어떻게 인간의 삶 속에서 발전되는지 이야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칼빈이 여기서 말하는 선행은 중생한 자들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되고, 죄의 용서에 의해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동시에 양자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성결케 됩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진 자로서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며,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결국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삶을 원하게 됩니다(III.xiv.9). 그러나 우리가 이 같이 주의 길을 걸으며 자기를 잊고 교만하지 않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지만,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전7:20)는 말씀대로 우리는 여전히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불완전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의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의 엄격한 판단에 따라 검토할 때는 결코 정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설령 그러한 순결한 행위가 있다고 가정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용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위자 자신이 죄의 짐을 지고 있어서, 그 행위도 곧 약화되고 오염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바로 이것이 논쟁점입니다. 로마 교회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한번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선행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며 선행의 공로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의로 인정한 것은 믿음이었다(롬4:3)고 말하며, 중생한 자의 행위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주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정하셨다고 선언하신다(롬4:3). 이것은 아브라함이 아직 우상을 섬겼을 때가 아니고, 그가 거룩한 생활을 다년간 훌륭히 계속한 후였다. 그러므로 그는 오랫동안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했으며, 죽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율법에 순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의는 믿음에 의한 것 이었다(III.xiv.11).

참으로 우리는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자기를 무익한 종이라 여기라(눅17:10)는 명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대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행위들을 “우리 것”이라 부르시며, 그것을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상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약속에 감격하여,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도록(갈6:9) 용기를 내고, 하나님의 큰 친절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행위에 참으로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III.xv.3).


그러므로 선행은 결코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칼빈이 로마 교회의 그릇된 공로사상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주장할 때, 그의 칭의론은 예정론에 굳게 기초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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