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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27 ]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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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CM뉴스| 작성일2020-10-07 | 조회조회수 : 7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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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일 목사(경동교회) 





성서에서 ‘신앙의 어머니, 민족의 어머니’의 전형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에스더를 꼽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로가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지 3년째 되는 해, 즉 주전 485년이나 6년부터 465년까지의 기간에 유대민족의 대량학살을 막은 여인이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페르시아의 영토를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127개의 지방을 다스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이었습니다(에스더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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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수산이라는 도시였습니다. 수산은 페르시아 왕이 거처하는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엘람의 옛 수도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왕의 명을 어긴 왕비 와스디가 폐위되는데서 시작합니다. 새로운 왕비를 찾는 과정에서 수사 궁에 있던 유대인 모르드개가 그의 숙부의 딸인 에스더를 천거, 마침내 에스더는 왕비가 됩니다(에스더기 2,17). 에스더라는 이름은 ‘별’을 의미하는 고대 페르시아어나, 바빌론의 여신인 ‘이쉬타르’의 이름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간다고 생각하던 때, 그런데 갑자기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 하만이 그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리지 않는 모르드개의 태도에 분격하여(에스더기 3,2), 유대인 모두를 학살할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하만은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킵니다. 그는 제비를 뽑아 유대인을 학살하기에 좋은 날을 택합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제비를 의미하는 아카드어 푸루(puru)라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왕의 승낙이 있어야 합니다.

하만은 왕의 승낙을 얻기 위해 고소장을 제출합니다. 내용은 ‘유대인들은 국가 내에 또 다른 국가를 세워, 페르시아를 위험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왕의 권위에도 도전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백성은 마땅히 근절되어야 하며, 하만은 왕의 허가를 받기 위해 은 일만 달란트나 되는 막대한 양의 금액을 왕에게 바칩니다.

왕은 기꺼이 승낙합니다. 포고문이 작성됩니다. 포고문이 작성된 시기는 니산월 13일, 유월절 축제 전날입니다. 전국 각처로 신속하게 전달된 포고문의 내용은 아주 간략했습니다. 아달월 13일에 페르시아 전 지역의 모든 유대인들을 가차 없이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는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비통한 탄식을 합니다. 베옷을 입고서는 왕궁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에스더는 내시를 보내 사정을 알아봅니다. 엄청난 음모를 알게 되었지만 에스더 역시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왕이 30일 전부터 에스더를 부르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왕의 부름을 받지 않고 궁전 앞뜰로 왕을 만나러 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왕이 금으로 된 홀을 내밀어 살려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주저하는 에스더에게 모르드개가 전합니다: “왕후께서는 궁궐에 계시다고 하여, 모든 유다 사람이 겪는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때에 왕후께서 입을 다물고 계시면, 유대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라도 도움을 얻어서, 마침내는 구원을 받고 살아날 것이지만, 왕후와 왕후의 집안은 멸망할 것입니다. 왕후께서 이처럼 왕후의 자리에 오르신 것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인지를 누가 압니까?”(에스더기 4,13-14).

이 말을 들은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합니다: “어서 수사에 있는 유다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시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게 하십시오. 사흘 동안은 밤낮 먹지도 마시지도 말게 하십시오. 나와 내 시녀들도 그렇게 금식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법을 어기고서라도, 내가 임금님께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죽으렵니다.”(에스더기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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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ert de Gelder, 「Esther at Her Toilet」 (1684) ⓒGetty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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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죽으렵니다”, 이것이 에스더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위험과 시련을 에스더는 홀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족에게 같이 사흘 낮밤을 단식하면서 기도해주길 바랬던 것입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에스더의 목숨을 건 결단과 지혜로운 실천은 마침내 왕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사태는 역전됩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처형하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바로 그 기둥 위에서 처형당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한꺼번에 학살당할 운명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생명을 구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기억하기 위하여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매년 경축해야 할 의무를 부여받게 됩니다. 괴로움이 즐거움이 되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 날, 유대인들이 원수들 앞에서 평안을 누리게 된 날을 모든 유대인들은 잔치를 베풀면서 기념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날로 정한 것입니다.

이 축제는 ‘부림절’이라고 불리는데, ‘부르’는 제비뽑기, 혹은 아카드어로 ‘숙명’을 의미합니다. 하만이 유대인들을 몰살시킬 계획을 세우고 그들을 몰살시키기 위하여 ‘제비뽑기’를 한 데서 유래한 것이지요.

구약성서의 에스더기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부림절 축제’의 기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에스더라는 여성이 어떻게 신앙의 어머니, 민족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에스더는 위기의 순간에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독일의 여성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금식은 살아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금식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에스더는 기도했기 때문에 신앙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마친 에스더는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몸을 던졌고, 그리하여 마침내 유대 민족을 구원한 민족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결단은 오직 금식기도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에스더는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에스더가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과 주저, 망설임과 불안이 그녀를 지배했습니다. 두려워 주저했기 때문에 모르드개는 마지막 통보를 했고, 혼자 견뎌내기 힘 들었기 때문에 에스더는 동족이 같이 금식기도를 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믿음이 민족을 구원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 3 >

신앙, 곧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아프리카 북부 나미비아에 사는 오밤보 족의 언어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오밤보 족의 젊은 남성이 만일 어느 여성을 사랑하여 그녀에게 결혼할 것인지를 물으면, 그 여인은 놀랍게도 ‘나는 믿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믿음은 사랑의 선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긍정입니다. 믿음은 어떤 특별하고 파격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믿음은 어떤 종교의 교리적 체계나 세계관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믿음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3,2).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회의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회의 없는 믿음은 자기 최면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상처받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그러기 때문에 서로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우리는 사랑과 신뢰로 응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내가 내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시다는, 하나님은 내가 나를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나를 잘 알고 계신다는, 하나님은 인간을 있는 모습 그래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확실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까닭은 하나님 자신이 이 사랑을 유지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우리 자신의 성품이나 능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으신 하나님 자신 안에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믿음을 ‘밑소리’라고 풀이했습니다. 믿음이란 바닥소리,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이지요. 내 귀, 내 입, 내 눈을 막아야 들리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내가 듣고 싶은 말만을 듣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매수하는 행위입니다. 참된 ‘밑소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들리는 소리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에스더처럼 우리는 믿음의 어머니, 민족을 살리는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의 어머니, 민족의 어머니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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