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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한 장의 빌레몬서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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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용서와 회개(빌레몬서 1:8-1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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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네시모의 회개(The conversion of Onesimus)」 (18세기경) ⓒWikiCommons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바울 서신 중에 단 한 장으로 이루어진 편지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이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인데,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용서하라는 내용이 거의 전부입니다.

    어찌보면 사도 바울과 빌레몬 사이에 전달된 개인적인 편지가 왜 초대 교회 공동체 사이에서 회람되었으며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게 되었을까요?

    오늘 저희는 빌레몬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모습과 오네시모의 태도를 통해서 참된 용서가 무엇이고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또한 지금 개신교는 어떤 용서와 회개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

    본문을 살펴보면 빌레몬은 어느 정도의 부를 가지고 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16절에서 오네시모를 이후로 ‘종’으로 대하지 말라는 당부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음이 분명합니다.

    2절에 나타난 ‘네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을 보면 빌레몬의 집은 성도들이 모임을 가질 때 사용했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의 원어인 ‘에클레시아’가 본래 ‘모임’을 뜻하기 때문에 ‘네 집에 있는 모임’ 또는 ‘네 집에 있는 공동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지만, 그들의 모임이 초대 교회 자체이기 때문에 ‘교회’라는 번역도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

    다만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점이, 빌레몬의 집에 어떤 형태를 가진 ‘교회’가 존재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임 자체가 교회이지, 건물이 교회인 것은 아닙니다.

    빌레몬의 집에서 교회 모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그 집은 일반 서민의 집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최소한 빌레몬, 압비아, 아킵보 세 사람과 그들의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고, 때로는 모인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할 수 있는 능력도 되어야 합니다.

    2절과 16절만 가지고도 우리는 빌레몬이 어느 정도 재산을 가졌으며, 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그런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빌레몬을 떠난 상태입니다. 15절에 보면,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이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종이 주인의 허락 없이 떠나있다면 도망친 상태를 뜻합니다. 또 18절에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이라는 표현을 보면, 오네시모가 뭔가 문제를 일으키고 도망을 쳤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의 돈을 맡아서 어딘가 심부름을 갔다가 돈을 잃어버렸거나 도난당했을 수 있다는 가정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불의를 하였다’고 표현한 점을 보았을 때, 오네시모는 분명 자신의 의사로 뭔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주인인 빌레몬의 돈을 맡아서 심부름을 가는 길에 돈을 들고 그대로 도망쳤는지도 모릅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재정을 담당하는 종이었다는 해석도 있지만, 11절에 나타난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라는 표현은 재정 담당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오히려 오네시모는 종종 사고를 일으키다 돈 들고 도망친 종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과 오네시모

    사도 바울은 모종의 이유로 인해 갇혀 있는 상태에서 오네시모를 만나게 됩니다. 과거의 갇힘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감옥 같은 곳에 구금되는 형태가 아닙니다. 지금으로 보자면 ‘가택연금’에 가깝습니다.

    지금의 가택연금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허락된 몇 사람만 접촉할 수 있지만, 과거의 가택연금은 그보다도 더 느슨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연금된 상태에서 편지도 쓰고 사람도 만납니다. 10절에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라는 표현은 그가 연금된 상태에서 오네시모를 만났고 그에게 복음을 전했음을 알게 합니다.

    오네시모가 어떻게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오네시모가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사도 바울을 만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연히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연금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현재 빌레몬에게 돈을 갚을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18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앞서 가정한 빌레몬의 돈을 훔쳐 오네시모가 달아난 상태였다고 본다면, 오네시모는 이미 그 돈을 다 썼습니다. 그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사도 바울을 찾습니다.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빌레몬으로부터 사면 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살길은 사도 바울 밖에 없다는 생각에 그를 찾아갔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순수하게 사도 바울을 모시고자 찾아간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사도 바울을 만나고 변합니다. 예전에는 무익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빌레몬과 사도 바울 모두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를 변하게 만든 것입니다.

    빌레몬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누가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빌레몬에게 가는가를 봐야 합니다. 바로 오네시모가 그 전달자입니다. 자신이 잘못을 범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네시모라면 사도 바울의 저 편지 한 장을 철저하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빌레몬이 그 편지를 받고도 자신을 처벌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오네시모는 편지를 들고 그대로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 사도 바울이 빌레몬의 집으로 가는 여비를 챙겨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편지가 제대로 보관되어 지금 우리 손에 놓여 있다는 점은, 오네시모가 편지를 들고 빌레몬에게 향했음을 알게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회개와 용서

    사도 바울과 오네시모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이 회개이고 무엇이 용서인지를 모여줍니다. 참된 용서는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에 직면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게 만드는 일이 용서입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이 잘못을 범한 그 사람 앞에 나아가 잘못을 구할 수 있어야 참된 회개입니다.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을 향한 용서, 잘못을 범한 사람 앞에 설 용기조차 없는 회개는 거짓된 용서이며 거짓된 회개입니다. 이는 아무 의미가 없는 용서와 회개입니다.

    지금까지 개신교는 많은 이들의 잘못을 때로는 처벌하기도 때로는 용서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참된 회개였는지, 참된 용서였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성도를 향해 성범죄를 저질러 사회 법정에서 실형을 산 목사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들은 자신의 범죄에 의해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사과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속한 노회 목사님, 장로님에게 사과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저는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노회의 목사님과 장로님들은 그를 용서합니다. 목사직을 유지하게 합니다.

    교단법을 어기면서 자신의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준 대형교회 목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교단 목사들 앞에서 세습이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고백하며 미안해 하는 마음을 내보입니다. 비록 세습은 했지만 앞으로 노회와 총회에 더욱 충성하리라 말합니다. 그러면 노회나 총회의 구성원들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떠올리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합니다.

    하나님을 죽였다 살렸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기꾼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이단인지 조금 더 판단해보자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의 개신교가 항상 이런 식의 용서만 해왔던 것은 아닙니다. 냉정하고 철저하게 단죄한 일도 많이 있습니다. 성소수자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며 그들을 축복한 부목사를 냉정하게 면직시켜버리기도 했고, 대형교회 목회 세습을 반대하던 교단 목사를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파면시키기도 했습니다.

    지금 개신교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자장면이 좋은지 짬뽕이 좋은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자장면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은 사탄이고 악이라고 말합니다. 중식당에서 짬뽕을 시키는 사람이 있으면 중식당 밖으로 내쫓아버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나와 친한 또는 내게 이익을 주는 어떤 이들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내가 먹고 있는 밥상을 뒤집어 엎어버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고 용서합니다. 서로 다를 수 있는 생각에 대해서는 선과 악의 문제로 규정하며 단죄하고, 철저한 회개를 요구해야 할 때는 느슨한 용서를 해왔습니다.

    이것이 지금 개신교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이유 아니겠습니까? 빌레몬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회개이고 무엇이 용서인지를 알려줍니다. “회개합니다.”라고 외치는 사람에게 “용서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용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에 직면하게 이끄는 일이 용서입니다.

    마찬가지로 회개는 입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잘못을 범한 이들 앞에 서서 진심으로 사죄할 수 있을 때, 자신이 어떤 처벌이라도 받을 각오를 하고 그 앞에 섰을 때에야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교회의 몰락은 코로나 때문이 아닙니다. 제대로 회개하지 못한, 제대로 용서하지 못한 우리 스스로가 교회를 몰락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 앞에 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참되게 서서 회개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시다.

    참된 회개를 하실 수 있는 여러분들께서 참된 용서를 통해 이 땅의 개신교를 다시 일으키시리라 믿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땅의 개신교가 다시금 하나님 앞에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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