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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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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32]





    < 1 >


    최초의 성경 해석법은 ‘알레고리칼’(비유적) 해석이었습니다. 비유적 해석은 초대교회 교부들이 즐겨 사용한 해석방법인데, 예를 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D 354- AD430)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강도 만난 어떤 사람은 아담이고,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 강도는 사탄,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자신, 여관은 교회, 여관 주인은 사도 바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비유적 해석이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능을 하지만, 성경 자체의 뜻을 밝히기보다는 해석자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굴절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 한계입니다.(박스)


    두 번째 해석법은 ‘축자영감설’(逐字: 글자를 쫓아가다) 해석입니다. 성경은 직접적으로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이므로, 글자 하나하나가 똑같이 유익하고 값어치를 지닌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후기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의 절대권위를 믿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성경의 내용 모두가 글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는 입장입니다.


    문제는 성경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을 경우, 엄청난 윤리적 난점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지요. 저도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목사님의 가르침 때문에 심각한 내적 갈등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말씀을 힘입어’ 사는 것임을 깨닫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우리는 ‘성경무오설’이라고 합니다. 물론 성경의 권위를 뒷받침하기 위한 주장이지만, 이 주장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곧바로 성경 자체 안에서 서로 모순되고 충돌되는 기록들을 만나 당황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2장에는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 다윗이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은 이야기를 예수님이 인용하는데요(막 2,23-28), 예수님이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말씀, 사무엘기상 21,1-6을 보면 다윗이 이 일을 행한 때의 대제사장은 아비아달이 아니라 사실은 아비아달의 아버지인 아히멜렉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마가는 예수님이 유월절 식사를 한 후에 십자가에 달렸다고 말하는데(마가 14,12: 15,25), 요한은 유월절 식사 전에 예수님이 숨을 거두었다고 말합니다(요한 19,14).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기사가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갔다가 겨우 한 달 뒤에 나사렛으로 돌아와 정결예식을 행했다고 말한 반면(누가 2,39), 마태는 누가와 달리 그들이 이집트로 피신했다고 말합니다(마태 2,19-22).


    바울은 자기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회심을 체험한 후에 자기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고 말한 반면(갈라디아서 1,16-17),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바울은 다마스커스를 떠난 후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 갔다고 합니다(행 9,26).


    < 2 >


    이렇게 성경 자체가 서로 다른 내용을 보도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오늘처럼 매우 복잡한 현실이 제기하는 여러 가지 삶의 문제에 대하여 언제나 타당하고 무오한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낙태문제, 뇌사문제, 장기이식, 안락사, 여성인권문제 등 현대 사회의 제반 문제들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내용적으로 자체 안에서 서로 충돌하거나,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한 모든 답을 주는 것이 아닌 이유는 성경이 오랜 세월동안 여러 지역에서 구두로 전승된 이야기들을 특정한 사람들이 수집, 편집하고, 또 집필한 문헌이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이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번역과정을 겪었다는 것도 성경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줍니다.


    구약성경은 기원전 3,000년 경 갈대아 지방의 우르(현재의 텔 무가이어, 이라크 지역)에서 가나안(현재의 팔레스타인 및 이스라엘) 지역으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이주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일컫는 ‘헤브루인’들의 역사, 설화와 시문학, 지혜와 예언 등 다양한 문학적 장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구약성경이 메소포타미아 주변 나라들,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등 주변의 수많은 도시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은 물론, 종교적 영향도 크게 받으면서 거의 700여년의 세월을 걸치면서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도 1백년 정도 걸려 확정되었지만,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으로 공인된 것은 주후 367년이었습니다. 이른바 정경화 과정을 겪으면서, 성경은 다시 구성된 것이지요.


    이렇게 긴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었고, 지금도 해석하는 사람의 입장과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많이 읽는 것만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도 많이 있지만, 성경 때문에 파멸에 이른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2천년 동안 교회와 신학이 축적해온 성경에 대한 여러 형태의 연구결과를 존중하고 배워야 합니다. 이 점에서 목회자와 신학자의 올바른 신학적 지식과 안내가 도움이 되겠지요.


    한국교회의 문제는 성경은 많이 읽기는 하는데, 올바르게 읽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경시하는 태도도 문제입니다. 일종의 반지성주의이지요. 그러나 올바른 신학 위에서 성경은 바르게 이해되고, 신앙도 건강하게 성숙합니다.


    < 3 >


    또 다른 성경 읽기는 낭송입니다. 경전을 가지고 있는 세계종교들, 불교, 유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 예외없이 경전을 낭송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글자 이전 시대부터 있었던 암송과 구두전승 전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낭송이 암기에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온 몸을 움직여 배우는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서당에서 글을 낭송할 때, 몸을 흔들면서 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성경은 오래 동안 눈으로 보는 책이 되었습니다. 의미를 파악하고, 감동적인 구절에 밑줄 긋는 방식의 성경읽기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에도 낭송하기를 권합니다. 하나님은 말해진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고, 예수님도 말씀으로 병자를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으며, 성령의 첫번째 은사도 외국어(방언)를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낭송하는 것이 한 방법입니다.


    저는 제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에, 하염없이 걸으면서 좋아하는 시편을 암송하고, 또 찬송하면서, 역경을 이겨낸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힘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온 몸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의 하나, 그것은 말씀의 낭송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에큐메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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