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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목과 미간과 문설주와 바깥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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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충만케 하소서(예레미야 31,31-34; 에베소서 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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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protocoloalavista.wordpress.com) 


    예레미야는 대표적인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순탄치 않은 예언자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했기 때문에 갖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그는 하나님께 그들에 대한 응징을 호소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 대한 아픈 마음을 거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말고 호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부터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7,16; 11,14).


    그는 예언자이지만 보기 드물게 하나님 앞에 원망 섞인 질문도 던지기도 했습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고 반역자가 다 평안함은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심고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신 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와 동일한 유형의 탄식을 하나님 앞에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하나님의 대답은 의외로 쌀쌀하게만 느껴집니다. "네가 사람들과 달리기 하다 지치면 어떻게 말들과 달리기 할 수 있겠냐? 네가 안전한 땅에서만 편안함을 느낀다면 요단 숲에서는 어떻게 되겠냐?" 이것은 말이 길어서 그렇지, 속뜻은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는 핀잔입니다. 앞으로 더 심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속상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는데 혼자 외톨이가 되어 고통을 겪고 있고, 그 고통도 하나님이 그의 분노를 그에게 채우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해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마치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았습니다. 물을 기대하고 시내로 갔는데, 물이 말라 없을 때 느끼는 허탈감 내지 좌절감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다.”(15,19)


    그는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예언자 직분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금 그를 부르십니다. 결정권은 물론 예레미야에게 있습니다. 다시 돌아온 후 어려움을 호소할 때도 있었지만 예레미야는 끝까지 예언자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뜻밖의 일 아닙니까? 예언자 예레미야 같은 사람이 잠시나마 하나님 앞에서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렇게 예레미야 개인사를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그의 이러한 생이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새언약/새계약 사건을 예시하는 것 같아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래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그의 백성이 되었고, 새로운 광야 세대가 모압 평지에서 계약을 갱신하고 대대로 그의 백성이 되기로 서약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그 계약을 깨뜨렸습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은 계약의 내용인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하겠지요. 계약이란 그 내용을 지킬 때에만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그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그의 종 예언자들을 일찍부터 그들에게 보내 계약관계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셨습니다(7,25; 25,3-4; 29,19). 그러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관계는 끝내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계약대로 그의 말씀을 지킬 의사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신명기 6,6은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고 했습니다(잠 7,3도 비교). 이를 위해 말씀을 손목과 미간과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했는데,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마음에 말씀을 새기기 위한 것임을 몰랐던 듯, 단지 그렇게만 했습니다. 그들 마음에는 말씀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말씀은 마음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강제적이고 부담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진단하시고 새로운 방법을 간구하십니다. 이제까지처럼 그의 말씀을 돌판에 새겨서 그들에게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에 그 말씀을 새겨 말씀이 언제나 그들 속에 있도록 하시려고 하십니다. 계약은 깨졌지만 하나님은 그 계약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다시금 복원시키려고 하십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계약관계는 변함없이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달라지지 않는 그 말씀이 우리 속에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판에 그의 말씀을 기록하려고 하십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거나 알라고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의 말씀이 각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어서 그들의 뜻은 그 말씀과 일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그 말씀과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그 말씀은 그 속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새계약입니다. 이 계약이 새로 성사되는 때가 언제일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사건이 새계약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지가에 못박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선언합니다(갈 2,20; 5,24도 참조). 이는 그리스도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그 뜻이 나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는 점에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계약의 주인공들입니다. 과거 이스라엘과는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우리에게 강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몸 가운데 있어 항상 그렇다고는 감히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씀의 뿌리가 우리 속에 단단히 박히고 우리 삶의 터가 견고해질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그 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열매를 맺어갈 것입니다. 


    사랑으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넓어지고 사랑으로 우리의 행동이 훈훈해질 것입니다. 사랑으로 주님의 위로가 넘칠 것입니다. 사랑으로 우리는 기쁨을 거둘 것입니다. 새계약으로 맺어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빚어내는 선물들입니다. 그 관계 속에서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우리이고 풍성해지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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