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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⑾] 살인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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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 곧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행위는 모든 사회, 모든 문화권에서 엄하게 금지하고, 중죄로 처벌을 받습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못한다는 십계명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특별히 다른 해석이 필요한 계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살인’의 이유와 형태를 자세히 살핀다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자살도 살인죄인가? 낙태는 살인인가 아닌가? 안락사도 살인인가? 사형제도는 공권력에 의한 살인인가?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것도 살인으로 처벌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살인하지 못한다는 십계명을 일반화하여 보편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 1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십계명의 살인금지 명령이 본래 어떤 의미에서 말해진 것인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서학의 일반적인 학설에 따르면, 십계명의 살인금지명령은 모든 살해행위를 포함하지는 않고, 단지 ‘승인받지 못한 즉흥적 살인’ 또는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정당방위나 전쟁에서의 살인이나 사형은 이 금지명령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히브리어는 합법적인 재판을 통해 선고된 사형의 집행과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행위를 의미할 때, 각각 다른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도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합법적인 사형의 경우에는 ‘죽이다’(출 19,12)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반해, 전쟁에서의 살해는 ‘쳐죽이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그것이지요.


    고대 이스라엘에는 다양한 형태의 ‘승인받은 살인’이 있었습니다. ‘홧김에 일부러 이웃을 죽인 자’(출 21,14), ‘사람을 받는 버릇이 있는 소가 사람을 죽였을 때에는 그 임자도 함께 죽여야 했고’(출 21,29), ‘안식일을 더럽히는 사람’(출 31,14), ‘자식을 몰렉 신에게 제물로 바친 사람’(레 20,2), ‘짐승과 교접한 남자’(레 20,15), ‘창녀짓을 한 제사장의 딸’(레 21,9),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레 24,16), ‘쇠붙이나 돌로 사람을 쳐서 죽인 살인자’(민 35,16), ‘같은 겨레를 유괴하여 노예로 부리거나 판 사람’(신 24,7) 등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죄에 따라 네 가지의 사형집행방식이 있었는데, 돌로 쳐 죽이는 것, 불태워 죽이는 것, 목 베어 죽이는 것, 목매어 죽이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의로 살인하지 않은 사람’, 우발적 사고로 사람을 죽게 한 살인자를 위해서는 피할 수 있는 여섯 개의 도피성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죽은 자들의 가족으로부터 보복당하기 전에 피신할 수 있게 해놓은 것이지요. 물론 조사결과 살인이 계획된 것이거나 고의적인 것으로 밝혀지면 살인자는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전거로 살펴볼 때, 우리는 십계명이 말하는 살인금지명령은 ‘승인받지 않은 폭력적 죽임’에 해당하는 것이지, ‘승인받은 폭력적 죽임’에는 해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전통은 그 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정당한 전쟁론’으로(악을 시정하기 위한 전쟁은 정당하다는 주장) 발전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전쟁이 평화를 조성하는 좋은 길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으며, 칼뱅은 불의한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처형이고 심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마틴 루터도 ‘군인들의 직무가 어떻게 선을 보호하고 부인들과 아이들, 집과 농장, 재산, 명예, 평화를 지키고 보존하는지를 생각할 때, 나는 이러한 행위가 정말 값지고 신성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 2 >


    오늘 날에도 개인적 차원의 살인은 금하지만, 공권력에 의한 살인은 – 사형제도, 전쟁 상황 등 특별한 상황에서 –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살인이든 – 공권력에 의한 형벌이건, 합법적인 전쟁이건 – 용납될 수 없다고, 특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살인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조차 자비를 베푸시어 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창 4,15),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 근거로 주장합니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 5,21-22).


    예수님은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형제자매에게 성내는 행동, 형제자매에게 얼간이, 바보라고 말하는 행위도 지옥 불 속에 던져질 심판받을 살인이라고 확대해석하신 것이지요. 상처를 주는 모독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죽일 수 있어 더 심각한 살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방대한 십계명 연구서를 출간한 김용규 박사는 이것을 ‘존재론적 살인’이라고 합니다.


    오늘 살인이 문제되는 영역은 ‘낙태’, ‘공권력에 의한 사형’, 테러와 전쟁만이 아닙니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도 충격적이지만, ‘존속 및 비속 살인율’과 자살율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일까요? 폭력적인 영상매체의 영향 때문일까요? 경제적 양극화 때문일까요? 아니면 정치적 진영논리와 이념갈등으로 양극화된 집단적 히스테리 때문일까요? 배제와 차별, 이기심과 무관심, 적대감과 증오, 분노조절장애 때문일까요? 우리 사회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화와 분노로 가득 찬 풍선처럼 보입니다.


    이런 세상, ‘살인하지 못한다.’는 계명만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일까요?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그것이 짐승이면, 어떤 짐승이든지, 그것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겠다.’(창 9,5)는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살인을 막을 수 있을까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과 사형제도가 살인을 막을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런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살인을 막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형제도가 살인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통계가 보여주듯이, 살인은 보복이 아니라, 오직 사랑만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1972년 살인자에 의해 시어머니를 잃은 마리 딘(Marie Deans)는 ‘복수는 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더 많은 죽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줄이는 것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임은 죽임으로 막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 막아질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9-10)라고 증언한 것이지요.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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