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 알기 ⒆] 이스라엘 열왕의 공백기 > 성경공부 | KCMUSA

[이스라엘 역사 알기 ⒆] 이스라엘 열왕의 공백기 > 성경공부

본문 바로가기

  • 성경공부

    홈 > 목회 > 성경공부

    [이스라엘 역사 알기 ⒆] 이스라엘 열왕의 공백기

    페이지 정보

    본문

    「열왕기하 15장」 연대 추정의 어려움


    지난 두 주 동안은 ‘예루살렘 성전 모형’과 ‘북왕국의 멸망’이라는 주제를 다뤘습니다. 이제 다시 왕들의 이야기와 연대 추정 작업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지난 글 마지막에 남왕국 ‘아하스’와 ‘요담’, 북왕국 ‘베가’에 대해서 다루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북왕국의 잦은 왕위 교체와 남왕국 연대상의 문제로 인해 여러 왕을 한 번에 다룰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우선 남왕국 ‘아하스’는 「열왕기하 16장 2절」에 따라 16년간 왕위에 있었습니다. 저는 ‘히스기야’ 즉위 연도를 주전 725년으로 보았기 때문에, ‘아하스’의 재위 기간은 주전 740-725년이 됩니다. 만약 해가 겹치지 않는다면, 주전 741-726년이 됩니다.


    「열왕기하 15-16장」의 내용으로 생각한다면, 남왕국 ‘아하스’가 통치하던 시기에 그와 겹쳐지는 북왕국의 왕은 ‘베가’와 ‘호세아’입니다. 하지만 현재 발견된 아시리아 비문들이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이는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저희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는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Ⅲ세’가 주전 732년 북왕국 ‘베가’를 죽이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웠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 알기(16) ‘북왕국의 역사, 남왕국 역사가에 의해 서술되다’」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c98f66f388f7c1181c704fc535ba7d9_1611279414_4979.jpg
    ▲ ‘디글랏빌레셀 Ⅲ세’의 비문 ⓒLouis D. Levine, Two Neo-Assyrian Stelae from Iran, 1972.


    ‘디글랏빌레셀 Ⅲ세’의 비문 중 다른 북왕국 왕의 이름이 등장하는 비문이 있습니다. 이란에서 발견된 비문인데, 위의 사진 속의 비문입니다. 비문 전체의 사진과 내용, 해석은 루이스 레빈(Louis D. Levine)의 Two Neo-Assyrian Stelae from Iran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Internet Archive(archive.org)에서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비문에는 주전 737년경 ‘디글랏빌레셀 Ⅲ세’에게 조공을 바친 왕의 명단이 나타납니다. 이 목록에는 다메섹의 ‘르신’, 사마리아의 ‘므나헴’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주전 737년에 ‘므나헴’이 북왕국의 왕이었다는 점을 알려주는데, 이는 우리에게 혼란을 가져다줍니다.


    「열왕기하 15장 23절」 이하에 나타나는 ‘므나헴’ 이후 왕들의 연대를 보면, ‘브가히야’가 2년, ‘베가’가 20년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므나헴’의 재위 기간 10년까지 합하면 32년입니다. 하지만 아시리아가 기록하고 있는 연대에서 ‘므나헴’이 조공을 바친 것이 주전 737년이고, ‘베가’가 죽은 것은 주전 732년입니다. 6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만약 아시리아의 비문이 역사적으로 더 정확하다고 본다면, 남왕국 ‘아하스’의 즉위 연도가 주전 740년이기 때문에, 남왕국 ‘아하스’가 즉위하던 시점에 북왕국의 왕은 ‘므나헴’이 됩니다.


    「열왕기하 15장」은 구조적으로 남왕국 ‘아사랴’와 ‘요담’의 이야기가 시작과 마지막에 나타나고, 그 안에는 북왕국 왕 다섯 명,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의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저는 이미 「이스라엘 역사 알기 (12) ‘유다 왕 아몬의 죽음과 암-하아레츠의 혁명성’」에서 이 본문이 「열왕기하 21장 19-26절」과 연결되며, 남왕국에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났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복선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와 동시에 「열왕기하 15장」은 북왕국 첫 번째 왕인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지속적으로 언급합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북왕국 멸망을 이끈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넘어서서, 왕 자신이 피살되는 운명까지 이끌었다는 이미지를 심어줍니다. 열왕기 역사가가 ‘죄’라고 생각하는 행위를 했을 때, 국가의 심판을 넘어 개인의 심판으로 이어지게 됨을 말합니다.


    이 시기의 연대를 추정하기에 앞서 주전 740-730년경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 어떤 혼란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디글랏빌레셀 Ⅲ세’(주전 744-727년)의 무력통치


    제국을 이루어가던 아시리아에게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은 탐나는 지역이었습니다. 지중해를 통한 교역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시리아 지역까지도 장악해야만 했습니다.


    1c98f66f388f7c1181c704fc535ba7d9_1611279392_0258.jpg
    ▲ ‘아수르니라리 Ⅴ세’의 비문 ⓒ대영박물관(The British Buseum)
     


    위의 사진은 대영박물관에 소장 중인 ‘아수르니라리 Ⅴ세’의 비문입니다. 이에 대한 번역은 ANET 532-3페이지에 있습니다. ‘디글랏빌레셀 Ⅲ세’의 선왕인 ‘아수르니라리 Ⅴ세(주전 753-745년)’는 국가 간의 조약을 통해 협력관계 또는 종속관계를 맺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주전 744년 왕위에 오른 ‘디글랏빌레셀 Ⅲ세’는 선왕과는 다른 정책을 펼칩니다. 바로 무력을 통해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디글랏빌레셀 Ⅲ세’의 비문에 나타난 조공 목록을 연구한 학자들은 아시리아에 바치는 세금이 속국들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디글랏빌레셀 Ⅲ세’는 상당히 과도한 세금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15장 19절」에도 북왕국의 ‘므나헴’이 아시리아에 은 천 달란트를 바쳤다고 말합니다. 이때 나타난 아시리아 왕 ‘불’은 아마도 ‘디글랏빌레셀 Ⅲ세’가 확실할 것입니다.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왜인지, ‘불(lWP)’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역대상 5장 26절」은 ‘앗수르 왕 불’ 뒤에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라고 붙여 놓으면서 ‘불’이 ‘디글랏빌레셀’이라고 설명합니다.


    ‘디글랏빌레셀 Ⅲ세’의 무력통치와 과도한 세금 정책은 속국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중 이스라엘 역사와 가장 관련이 큰 반란은 아람 왕 ‘르신’과 북왕국 ‘베가’가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이었습니다. 이 결과에 관해서는 이미 북왕국 ‘호세아’를 다룰 때 말씀드렸습니다. ‘르신’과 ‘베가’의 연합군은 ‘디글랏빌레셀 Ⅲ세’가 주전 732년 다메섹과 사마리아를 점령하면서 끝납니다.


    아람 왕 ‘르신’과 북왕국 ‘베가’의 연합군이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디글랏빌레셀 Ⅲ세’가 시리아-팔레스타인을 한 차례 정복한 이후 ‘르신’은 아시리아에 대항하며 상당히 거대한 연합을 이루었고, 아람의 영역도 확장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하 16장」은 남왕국 ‘아하스’에 관한 이야기인데, 5-9절은 ‘르신’과 ‘베가’ 연합군의 침공에 관한 이야기이고, 10-17절은 아시리아에서 배워 온 제단을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남왕국의 ‘아하스’가 아시리아에 사절을 보낸 이유도 연합군의 침공을 막아달라는 요청을 보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열왕기하 16장」의 ‘아하스’ 이야기는 연합군의 침공과 그 후속 조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주목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6장 6절」에 아람 왕 ‘르신’이 엘랏을 회복하여 아람에 돌리고 유다 사람을 쫓아내었다는 기록입니다.


    1c98f66f388f7c1181c704fc535ba7d9_1611279370_115.jpg
    ▲ 기원전 8세기 중반 시리아-팔레스타인 ⓒ위키피디아
     


    위의 지도는 위키피디아에 있는 지도를 한글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별 모양으로 표시된 지역은 각 나라의 수도입니다. 이 지도에는 엘랏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본래 엘랏은 에돔 최남단에 위치한 지역입니다(신2:8 참고). 그래서 지도에도 표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에돔의 수도인 페트라보다 더 남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열왕기하 14장 22절」에 따르면 남왕국 왕 ‘아사랴(또는 웃시야)’가 엘랏을 건축했다고 말합니다. 이 엘랏이 에돔 지역의 엘랏과 완전히 다른 땅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역대하 26장」은 남왕국 ‘아사랴’가 강국을 이루어냈으며, 블레셋과 아라비아 지역을 지나 이집트 변방까지 차지하였다고 말합니다. 


    「역대기」의 기록이 맞다면 남왕국 ‘아사랴’는 에돔 최남단까지 차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을 ‘아하스’ 시절에 아람왕 ‘르신’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아사랴’에 관해서는 이후에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사랴’에 관한 내용도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에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남왕국 ‘아사랴’가 실제 에돔 남단까지 차지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위의 지도를 보시면, 「열왕기하 16장 6절」에서 ‘르신’이 엘랏을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리아 지역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전부를 아람이 차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디글랏빌레셀 Ⅲ세’의 비문이나 성경의 기록은 모두 이 연합의 중심에 아람 왕 ‘르신’과 북왕국 ‘베가’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학자들은 이 연합을 ‘시리아-에브라임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시리아-에브라임 연합의 침략은 「이사야 7-8장」에도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으로 인해 우리가 잘 알게 된 ‘임마누엘’의 선포는 시리아-에브라임 연합의 침략과 연결되어 나타난 선포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7장 6절」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시리아-에브라임 연합이 유다를 침공하면서 ‘아하스’를 폐위시키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위에 세우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브엘’이 누구이고 ‘다브엘의 아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 연합이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군소 국가들을 점령, 연합하면서 각 나라에 자신들의 뜻에 맞는 왕을 세웠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북왕국 ‘베가’에 의한 반역은 아람왕 ‘르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르신’이 시리아 지역을 점령해가면서 북왕국의 장관인 ‘베가’를 포섭하였고, 이에 따라 ‘베가’가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이 되어 시리아-에브라임 연합이 구성되었다고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북왕국 ‘베가’의 즉위 연도는 아람왕 ‘르신’의 영향력이 가장 컸던 주전 736년이나 735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장군이 거대 제국인 아시리아와 결탁한 것이 아니라 아시리아의 속국인 아람과 결탁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세력 확장시기인 주전 736년보다 세력이 조금 더 강해진 주전 735년이 맞다고 봅니다.


    따라서 북왕국 ‘베가’는 「열왕기하 15장 27절」과 같이 20년간 왕위에 있던 것이 아니라 주전 735년부터 732년까지 4년간 왕위에 있던 것입니다. ‘브가히야’는 「열왕기하 15장 23절」에 나타난 2년 통치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브가히야’의 재위 기간은 주전 736-735년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주전 737년에 북왕국 ‘므나헴’이 ‘디글랏빌레셀 Ⅲ세’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점과도 연결될 수 있게 됩니다. 「열왕기하 15장 17절」 북왕국 ‘므나헴’의 연대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므나헴’은 주전 745-736년에 북왕국을 다스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북왕국 ‘스가랴’와 ‘살룸’은 각각 여섯 달과 한 달만 북왕국의 왕으로 있었기 때문에 주전 745년에 왕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열왕기하 15장」은 남왕국 ‘아사랴’ 시절에 북왕국에 다섯 차례 왕위 교체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북왕국의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는 남왕국 ‘아하스’ 시대에 왕위에 오른 이들입니다. 북왕국 ‘스가랴’, ‘살룸’, ‘므나헴’의 통치 기간은 약 10년인데, 이들은 남왕국 ‘요담’ 때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 역사 자료의 신뢰도 문제


    열왕기는 분명 바벨론 포로기 초기에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가해진 수정 사항을 빼고 전체적인 틀은 그때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바벨론 1차 포로기는 주전 598년이었습니다. 만약 열왕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요시야’ 때에 기록되기 시작했다고 봐도, 주전 638년 이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지금 저희가 다루고 있는 주전 740년은 그보다 1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열왕기 역사가는 분명 어떤 자료를 토대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참고하고 있는 역사 자료가 엄청나게 부실하다는 점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역사 알기 (5) ‘우리를 힘들게 하는 열왕기의 왕들 역사 연대’」에서 ‘아사랴’ 연대의 문제를 언급한 적 있습니다. 「열왕기하 15장 5절」에 따르면 ‘아사랴’는 나병에 걸려 별궁에 거주하게 되었고, 왕자 ‘요담’이 왕의 업무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일종의 공동 통치 기간입니다.


    ‘아사랴’ 재위 기간 52년은 그가 별궁에 거주하기 이전까지의 기간인지, 그가 죽을 때까지의 기간인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또 「열왕기하 15장 33절」에 따르면 ‘아사랴’의 아들 ‘요담’은 25세와 왕이 되어 16년간 다스렸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공동 통치 기간을 포함하는지, ‘아사랴’가 죽은 이후의 상황인지도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분명해 보이는 점은 남왕국은 ‘아사랴’와 ‘요담’에 의해 공동으로 다스려지던 기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기간이 몇 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부정확성이 남왕국의 시간을 과도하게 늘려놓게 됩니다.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이 둘의 공동 통치 기간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무시해버립니다. 남왕국 ‘아사랴’와 ‘요담’이 다스린 기간을 그냥 합쳐서 68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로 인해 북왕국 왕들의 통치 기간까지 꼬여버립니다. 그로 인해 과도하게 길어진 남왕국 왕들의 통치 기간에 북왕국 왕들의 통치 기간을 맞출 필요가 생깁니다. 그렇게 짜맞춰진 왕이 북왕국 ‘베가’입니다. 4년을 다스렸지만 20년을 다스린 왕으로 기록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을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학자들은 열왕기에 기록된 숫자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전제를 둡니다.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지, 숫자가 잘못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기에 북왕국 ‘베가’의 재위 기간이 20년으로 기록된 이유를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일반적으로는 ‘베가’가 북왕국 전체의 왕이 되기 이전에 북왕국 일부를 다스리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베가’는 자신보다 5대 위의 왕인 ‘여로보암Ⅱ세’ 때부터 특정 지역의 왕이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좋은 해석은 아니라고 봅니다.


    사실 ‘아사랴’와 ‘요담’의 공동 통치는 이미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지만, 때로 왕의 연대가 맞지 않을 때, 공동 통치 기간이 생략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저는 아주 단순하게 접근하고 싶습니다.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140-100년 전 왕실 역사에 대해 아주 단편적인 정보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들의 통치 기간, 왕위에 오른 나이, 이름 정도 밖에는 정보가 없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을 무작위로 나열했을 때 발생되는 연대 문제에 대해서, 약간 수정하려는 노력은 했지만, 크게 관심은 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열왕기」가 기록하고 있는 북왕국 역사와 전승의 신뢰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남왕국 역사에 대한 신뢰마저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분명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몇몇 남왕국 왕들에 대한 세부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북왕국 왕들에 대한 정보 이상의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왕국 ‘아하스’ 시대에 시리아-에브라임 연합의 침공이 있었다는 점, ‘아하스’가 아시리아의 제단 모양을 따라 성전 제단을 다시 만들었다는 점은 열왕기 역사가가 알고 있던 세부 자료에 속할 것입니다.


    전에도 한 번 언급하긴 했지만, 이 세부 자료 역시도 너무 부실해 보입니다. 남왕국 ‘아하스’는 16년을 다스린 왕인데,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의 침공을 받았다는 점과 제단 모양을 바꿨다는 점밖에 모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만약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가지고 있는 남왕국 왕들의 자료가 누구의 아들인지, 몇 살에 왕위에 올랐는지, 몇 년간 통치했는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면, 이들의 기록에 대해 의심에 찬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심은 결국 다윗 왕조 혈통 문제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이스라엘 주변국의 역사 기록 속에서 혈통이 바뀌었어도 이전 왕의 자손으로 표현해놓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과도한 의심은 성경의 역사를 읽어나가는데 어려움을 주기 때문에 적당한 선까지만 의심하며 읽어가려고 합니다. 조금 신뢰는 안 되지만, 성경 이외에 남왕국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믿고 읽어갈 수밖에 없는 점도 있습니다.


    이번 주는 「열왕기하 15-16장」의 시대적 배경과 당시 북왕국 왕들의 연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함께 남왕국 ‘아사랴’와 ‘요담’의 이야기를 잠시 다루었는데, 다음에는 남왕국 ‘아사랴’, ‘요담’의 연대와 이들에 관한 기록을 통해 열왕기 역사가가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에큐메니안


    KCMUSA,680 Wilshire Pl. #419, Los Angeles,CA 90005
    Tel. 213.365.9188 E-mail: kcmusa@kcmusa.org
    Copyright ⓒ 2003-2020 KCMUSA.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