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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서 남궁억선생의 불굴의 신앙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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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당당뉴스| 작성일2020-07-17 | 조회조회수 : 3,73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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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낙심 말고 목적지 가라”
    -한서 남궁억선생의 불굴의 신앙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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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서 남궁억 선생(翰西 南宮檍, 1863-1939)

    짝 잃은 기러기, 네 길 인도하시는 한 분

    “너 낙심 말고 목적지 가라”는 한서 남궁억 선생(翰西 南宮檍, 1863-1939)의 “기러기 노래” 중 세 번째 단의 일부분으로, 1910년 나라를 잃고 해외망영 등으로 흩어지는 우국지사들을 보며 그 심정을 담은 시이다.

    선생은 1918년 강원도 홍천 산골 문중 고향으로 낙향하며, 하늘에 나는 기러기를 보고, 그 심정을 나타내는 시이다. 포스터의 “스와니 강“(Suwannee River) 곡에 맞추어 불렀다.

    기러기 노래

    원산(遠山) 석양 넘어가고 찬이슬 올 때/ 구름사이 호젓한 짝을 잃고 멀 리가/
    벽공(碧空)에 높이 한 소리 처량/ 저 포수의 뭇 총대는 너를 둘러 겨냥해

    산남산북(山南山北) 네 집 어디 그 정처 없나/ 명사십리 강변이간 청초 옥은 호수인가/
    그 종일 훨훨 애써서 찾되/ 네 눈앞에 태산준령 희미한 길 만 리라

    곳간 없이 나는 새도 기를 자 뉜가/ 하늘 위에 한 분 계셔 네 길 인도하신다/
    너 낙심 말고 목적지 가라/ 엄동 후는 양춘(陽春)이요 고생 후는 낙이라

    만리장천(長天) 먼 지방에 뭇 고난 지나/난일화풍(亂日和風) 편한 곳에 기쁜 생활이 끝없다/
    여기서 먹고 저기서 자며/여러 동무 같이 앉아 갈대 속에 집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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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천의 한서 남궁억 기념관 앞 무궁화꽃(사진-2020.7.7.)

    1단은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고 일제의 학정에 시달린 우국지사와 민중들이 나라를 잃고 고향산천을 떠나 이리저리 흩어지는 모습을 짝 잃은 기러기를 보며, 그 심정을 그리며 노래한 시이다.

    2단은 일경의 감시와 탄압, 수탈과 겨루는 총 속에서 고향산천을 떠나는 가련한 모습을 기러기를 보며 애절한 심정을 읊고 있다.

    선생의 삶과 신앙의 결단은 3단으로 이어진다. 어떠한 난국에도 낙심치 않고 불굴의 삶으로 현재 오늘의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살 수 있었던 근거를 볼 수 있다.

    “너 낙심 말고 목적지 가라” 즉, “하늘 위에 한 분 계셔 네 길 인도하신다”는 신앙이요 결단이다. 선생의 신앙은 오늘, 현재를 올곧게 사는 삶인 것이다. 선생에서 신앙은 삶과 떼어 놓을 수 없으며, 선생의 생애는 삶이 신앙이요, 신앙으로 산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굴의 신앙은 불굴의 삶으로 생애 속에 실행 된 것이다.

    “기러기 노래“ 마지막 4단은 풍요롭고 평화로운 부국의 벅찬 밝은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불굴의 삶은 불굴의 신앙에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선생의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굽힘 없는 신앙과 삶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시와 서예, 저술들에는 낙심치 않는 불굴의 삶과 신앙이 말씀에 근거한 것임을 볼 수 있다. “기러기 노래”도 “공중 나는 새를 보라“(마6:26)는 말씀에 근거하여, 짝 잃은 기러기가 하늘을 헤매는 것 같지만, 하늘 위에 한 분, 하나님께서 갈 길 인도하시니, “낙심 말고 목적지 가라”는 희망의 멧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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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노래"를 청아하게 부르는, 현재호 목사(한서교회)-기념관에서

    믿음을 굳게 하여 변치 말며, 싸워 이겨 저 언덕에 노래 부를 때

    한서 남궁억 선생은 1918년12월, 고향 홍천 보리울(모곡)에 낙향하여 정착해서 우선 주택에서 아내와 장녀와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고, 보리울 산골의 한 가정의 김영준(金永俊) 성도와 함께 가정교회를 시작하였으며, 산골 어린이, 청년들을 모아 학교를 개설하였다. 보리울(모곡) 교회는 예배당이요, 학교였던 것이다.

    선생은 춘천 주재 남감리교 선교부에 전도인(傳道人) 파송을 요청하고, 사재 3,900환을 들여 대지를 매입하여 열 칸의 기와집 “보리울(모곡) 예배당”과 학교를 건축하였다.(1919.9.) 학교는 춘천과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1923년 3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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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궁억 선생은 보리울(모곡) 주택에서 예배시작(1918.12.), 이듬해 모곡교회와 학교를 설립(1919.9.),학생수가 늘어 학교 교사와 기숙사를 신축하고 무궁화 동산을 이루었다(1923.9.)

    선생은 “주일학교(모곡)학교 교가”를 작사하였는데 모곡학교의 교가이기도하였다. “주일학교 교가”에서도 선생의 나라사랑과 굳게 선 복음적 신앙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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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모습 그대로 복원 한 보리울(모곡) 예배당(홍천군-200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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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원 된 모곡예배당 남궁억 선생의 강도상 곁에서

    주일학교 교가(모곡학교 교가)

    동막산과 강 구비 앞뒤 둘렀고, 모곡구역 모곡리는 우리 집이라,
    세상영화 누릴 자는 우리들이며, 그 가운데 뜻 부칠 손 주일(모곡)학교라

    금동네야 모여 서라 세 동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어 입적한 우리,
    구주님의 은혜를 더욱 감사해, 천국낙도 바라보는 십자 동무야

    굳거라 너희 믿음 변하지 마라, 마음과 뜻을 거룩하게 실행하여서
    죽고 살고 화와 복을 상제께 바쳐, 천당 배를 타고 가자 우리 동무야

    주 예수 흘린 피로 죄 씻음 받고, 영생 소망 그네 줄로 기쁨을 삼아
    싸워 이겨 저 언덕에 노래 부를 때, 퍼지리라 온 세상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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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일학교가"와 "운동가"-복원 된 모곡교회 내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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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원 된 보리울(모곡) 예배당, 주일예배 모습 재현

    한서 남궁억 선생은, 교회를 “천국배”라 하였고, 우리가 사는 곳은 "하나님의 뜻"이 있으며, ”구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천국낙도“를 바라보는 ”십자 동무“라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 믿음을 굳게 하여 변치 말며, 그 뜻을 거룩하게 실행하여, 생사화복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의 나라와 의를 향해 나가자고 노래하였다.

    특히 “주 예수 흘린 피로 죄 씻을 받고, 영생 소망”의 복음적 신앙을 견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싸워 이겨 저 언덕에 노래 부를 때”, “퍼지리라 온 세상 하나님 나라“임을 노래하여 벅찬 감격의 복음적 신앙을 독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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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 홍천 보리울(모곡) 전경(1923년)

    어디로 가느냐~ 무궁화의 화려한 금수강산으로

    혹자는 남궁억 선생이 “현세를 도피할 요량으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하고, 자신만을 위해 건강을 핑계로 낙향하여 은닉하였다고 하나, 이는 잘못 된 견해이다.(윤치호의 일기 1918.12.15.) 당시 사돈 윤치호는 일제와 협력하는 변절의 길에 들어섰으나, 선생은 해외망명이나 부일협력 등 변절을 길이 아닌 심산으로 낙향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었다. 당시 우국지사들은 일제에 협력치 않고, 만주로 상해로 구미 해외로, 귀향으로 흩어지던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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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 한서교회( 모곡교회) 뒷편으로 보이는, 산골 모곡마을 전경-유리산과 유리봉이 보인다.(2020.7.7.)

    이는 장지연(張志淵) 보낸 서한에서도 나타난다. “좋은 사람 소식이 뚝 끊어지니 살아있었소? 매우 답답하고 걱정 됩니다. 귀향을 형이 먼저하더니, 일 * 형이 인천으로 돌아가고, 최후에 제가 금 20일에 가족을 이끌고 서식지인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떠납니다..., .하나님이 우리 형 평안하고 건강하게 지나시게 돌봐주시길 천만번 빌며 갖추지 못하고 올립니다.

    2월 14일 남궁억” 선생의 “시절 잃은 나비”란 시에는 당시 일제에 의해 땅과 집을 빼앗기고 그 횡포를 이기지 못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민중들과 우국지사들의 애달픈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시절 잃은 나비

    일락은 서산에 황혼이 되고/ 바다와 온 우주는 캄캄한데/
    옥토를 떠나서 어데를 향해/ 정처 없이 어데를 향해 가느냐/
    애닯다 이천만 고려 만족아

    젓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을/ 누구를 주고 자꾸만 떠나가느냐/
    정든 신천 고국을 등에다 지고/ 애달픈 눈물 방울만 연(連)해에 뿌리며/
    두만강 푸른 물결 건너서 가는/ 백의 단군민족 내 말 들어라

    무궁화의 화려한 금수강산은/ 우리들의 소유인 줄 알건만
    의식주의 핍박을 바이 못 잊어/ 주린 배 움켜 쥐고서 떠나가느냐
    너희의 정경이야 차마 가긍하다/ 그러나 낙심 말아라 고려 민족아

    선생은 “젓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을/ 누구를 주고 자꾸만 떠나가느냐”고 애달픈 심정을 나타내며, “젓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을/ 누구를 주고 자꾸만 떠나가느냐”고 조국과 민족을 지킨다는 자신의 귀향 결의를 보이고 있다.

    서울 정동 출생과 가난한 생활, 귀동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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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최초 외무부의 영어 통역관 양성학교인 관립 동문학 수업 모습(1883년)-남궁억은 1회졸업생(1884년)

    남궁억 선생은 무관 외아들로 배재학당 운동장 자리인 서울 정동 왜송골(倭松洞)에서 출생(1863.12.27)하였고, 15세 때 양혜원(1878년)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3녀를 두었다. 정동 왜송골(漢城西部倭松洞)은 옛 배재학당의 운동자 자리로, 임진왜란 때, 왜장(倭將)이 말을 매었다는 나무가 있는 곳을 “왜송골”이라 불렀다. 선생이 출생한 곳은 각국 외교관들과 대사관들이 들어선 곳이며,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 사이로 선교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태어났고, 정동 선교부와 교회가 설립되기 전, 재동의 영어 통역관 양성학교로 떠났다.(1883년)

    부친 남궁영(南宮泳)은 조선 말 철종 때, 종5품 무과 중추도사였으나 어렸을 때 별세하였으며, 집안 살림이 가난하여 어린시절 서당에도 못 다니고, 귀동냥으로 사서삼경을 습득하며 서러움도 이겨 내었다.

    선생은 20세 때 기숙학교인 한국 첫 관립 통변학교(通辯學校)로 1년 과정의 재동(齎洞) “동문학”(同門學, Royal College of Science and Languages)을 졸업(1883-1884년)한 수재였다. 선생은 졸업 즉시 총해관(總海關, 1884.6) 사무로 근무하며 외교관들과 통역하며 교류하였고, 궁궐 내부주사로 고종의 영어 어전 통역관(御前通譯官, 1886년)으로 등용되었다.

    어전 통역관, 고위 행정관직과 정치인, 언론인, 시민운동, 기독교 신앙으로

    선생은 고종의 총애로 별군직(別軍職, 1889.1. 경호직)에 있었다. 고종황제로부터 총애를 받아 관복(官服)과 경복궁 인근 팔판동(八判洞)의 대지(垈地) 200평에 43간 되는 기와집을 하사 받기도 하였으며, 고위관직에 명받아 청렴근면(淸廉勤勉)의 충실한 관리로 총애 받는 행정관리였다. 즉, 칠곡부사(1893.4)-궁내부 토목국장(1895.)등 관직을 수행하며 서민 봉사에도 힘썼다. 토목관으로 도시락을 싸들고, 종로와 정동 길을 확장하였고, “탑골공원”(塔洞公園)도 조성하였으며, 야간에는 “흥화학교“에서 영어교사로 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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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궁억 선생이 토목국장 때 조성한 종로 탑골공원(1897년)-3.1운동 선포한 곳

    궁궐은 친중파, 친일파, 친러파 등 서구세력들의 이권에 농락 당하고 있었으며, 이에 편승한 고관 정치인들로 나라와 민족은 흔들렸고, 국권이 상실하던 때, 정치사회 시민운동으로, 왕실과 구국의 독립협회(1896)-만민공동회(1898)-황성신문(1898.3) 사장-성주목사(1905.3), 양양군수(1906.1. 현산학교 설립)-대한협회 회장(1907.11) 등 쉴 사이 없이 일한 분이시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기독교 신앙은 궁궐 영어 통역관으로 있으면서, 외교관,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인식케 되었고, 독립협회 수석 총무, 독립신문 영어편집 담당하며 서재필, 이원긍, 이상재, 유길준, 김정식, 이승인, 이승만, 안국선, 김린, 윤치오, 최병헌 등 기독교인들과 동리로 접하였고, 갖은 모함과 심문고초와 투옥으로 다져진 신앙을 갖게 되었다.

    선생은 구국 만민공동회로 왕실을 폐하고 대통령제를 주장한다고 모함 받아 역적으로 사형수 중형을 받고 이승만 등과 함께 옥살이를 하였다. 이승만도 감옥에서 기독교 신앙 체험하고 입교하였다. 한말 지배층 관료진신들이 기독교와 접하고, 지도자들이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 시기는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발간, 만민공동회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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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성신문(사장:남궁억)-1898년9월5일 창간 된 국한문 혼용 최초 근대신문, 선생은 3년간 활동, 폐간(19109.14.)

    현실에 굽힘 없는 삶-세례 입교와 저술활동 및 구국 교육에 헌신

    그러나 결국 한일합방(1910)으로 나라를 잃었을 때, 종교교회에 출석하여 세례입교 하였으며, 낙망치 않고 교육계에 뛰어들어 헌신하였다. 배화학당 교사(1910-1918)로 영어, 언문, 역사와 한글체 붓글씨 교본, 가정교육, 서예와 창가 등을 가르치며, 나라사랑을 굽힘없이 가르치고 투쟁하였다. 야간에는 상동청년학원장으로 영어, 역사 등을 가르치는 봉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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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화학당 교사시절, 학생들이 한반도 무궁화 지도를 자수하여 조선과 민족의 얼을 이어갔다.

    저술활동 등 부지런히 일하며 쉼이 없는 신앙의 삶이었다. 동국역사, 가정요결, 가정교육, 교육월보, 조선어문법, 조선최근사, 언문체법, 한글서체교본, 100여 편의 시, 시조, 서예 등 굽힘없이 저술보급 활동 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통제로 인쇄나 프린트하지도 못하고, 필사 복사하여 은밀히 돌려보며 자주 애국 구국 독립정신을 전국으로 확산 시켰다.

    특히 "최근조선사"에서는, 날조 된 한일합방과 그 과정, 7적, 민중의 통곡과 분노 저항을 상세히 기록하였고, 삼일운동의 발단과 독립선언 과정, 전 민족의 투쟁과 혹독한 탄압 실태, 제암리와 서촌(수촌) 학살 등 생생한 현장을 기록하여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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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화학당 교사시절 선생이 저술한 교과서, "언문체법", "가정교육" 등(1914년)
     

    우리의 할 일은 약자를 살려 같이 강하게 되는 것

    한서 남궁억 선생은 나라를 잃고, 황실의 관리로 충군의 사명을 못 다했음을 통회하였으며, 일제에 빌붙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 수 없었다. 결국 망명이나 부일협력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문중 고향인 홍천 산골로 낙향하였다. 이곳에서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고, 동사략, 조선이야기 등을 저술하고,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무궁화 보급운동”을 하였다. 교회와 학교는 무궁화 모판을 만들고 전국 교회와 학교에 무궁화를 보급운동을 펼친 것이다.

    무궁화는 나라와 민족을 상징하는 꽃으로, 민족의 얼이 담겨 있다. 일제는 사꾸라(벚꼿)을 권장하였으나, 선생은 한민족의 무궁화를 보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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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서 남궁억 기념관에 전시 된, "동사략", "조선이야기" 등

    선생은 직접 영어와 한글, 특히 한국사를 강의하였다. 나라와 민족의 꽃, 무궁화를 심었고, 무궁화 묘판을 만들고 전국의 교회와 학교에 무궁화를 보급하는 운동을 하였다.

    한서 남궁억 선생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불렀으며, 교회와 학교 뒷 편 유리산을 걸어 오르시고, 유리봉에서 애통하는 눈물의 기도하셨다. 산에서 내려오시며, 전도하셨고, 주택의 사랑방은 전도와 교육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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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의 신앙생활, 성경말씀 읽고 기도와 찬송, 전도-복원 된 모곡교회 내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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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리봉에서 새벽기도하시는 남궁억 선생-모곡교회(현, 한서교회) 뒷편 유리산으로 걸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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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 한서교회(모곡교회)에서 뒷편으로 유리산과 유리봉이 보인다.-유리봉 앞에는 한서초등학교(2020.7.7.)

    남궁억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졸업식(1932.2.)에 초청 받아, 홍천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참석하여, 졸업생들에게 권고하는 말인 “고사”(告辭)하였다. 일제의 버스나, 전차도 타지 않고 걸은 것이다. 무명바지 저고리에 무명 두루마리를 입고 백발을 날리며 권고하여 졸업생은 물론 축하인사들도 눈길을 끌었다.

    "교문을 나서는 여러분들의 발길의 방향은 어디입니까? 교육과 문화의 혜택도 없이, 목자도 없이 방황하고 있는 어린 양들을 구하려고 내 고장의 농촌으로 달려가지 않으렵니까?" 강자를 도와 부질없는 권세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약자를 살려 같이 강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내가 산 속의 눈길을 걸을 때 생 눈을 뚫고 원래 길을 찿아 걸은 것처럼, 여러분이 바로 걸어야 뒤에 따르는 사람도 바른 길을 걸을 것이니 본래의 갈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1932.2. 연희전문학교 졸업식에서)

    일제가 내 놓은 길에서 벗어나 민족과 동포를 위해 바른 길을 찾으라는 피를 토하는 권면이었다. 홍천경찰서는 보리울(모곡)에 주재소까지 설치하고 선생을 항상 감시하고 있었고, 체포의 빌미를 잡으려고 늑대의 눈이 되어 있었다.

    무궁화는 한민족의 얼, 영원번창 우리 꽃, 삼천리에 무궁화다-저항이며,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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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결사 "십자가당", "무궁화 보급운동사건 자료집-기념관 전시실에서

    1933년 춘천에서 열린 연회 때, 춘천 여자관(春川 女子館) 비밀실에서 유자훈(劉子勳) 목사가 사회하며, 남천후(南天佑), 김복동(金福童) 목사 등 목회자들이 중심으로 결성한 비밀결사 십자가당을 조직하고 이상적 농촌운동을 전개하다 체포 되어 치안법으로 기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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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천 모곡학교 13주년 창립기념 및 남궁억씨 칠순기념식 촬영(1932.11.1.)-이후 체포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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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곡학교 졸업증서와 수업증서, 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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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순 때 심문받는 남궁억 선생, 일경의 취조에 조선인 순사가 통역하고 있다.(1933.11. 기념관 모형)

    십자가당은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 보급운동에 참여하였고, 이를 포착한 일경이 절호의 기회로 여겨, 십자가당을 체포하며, 칠순인 남궁억 선생도 체포하여(1933.11.4.), 갖은 고문과 심문 벋었다. 1934년 3월 72세 나이에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으로 선고 받고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하였다.(東亞日報 1933.12.7, 193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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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회 모곡학교 마지막 졸업기념(1938.3월)-세번째 줄 왼쪽에서 2번째, 현재호 목사 부친

    선생이 체포 되며 모곡학교는 폐교 되어 보통학교와 합병 되었고, 무궁화는 뽑혀 불태웠으며, 전국에 무궁화를 뽑고 일본 국화인 사쿠라(벗꽃)을 심도록 하였다. “무궁화”란 말도 못하게 하고, 이름도 “근화“(槿花)라 부르게 하였다. 무궁화는 피고 또 “피어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선생의 “무궁화 예찬시”를 보면 벚꽃과 비교하여, 무궁화의 자랑스런 나라와 민족의 번성과 영화를 찬양하고 있다.

    무궁화 예찬시

    금수강산 삼천리에, 각색 초목 번성하다/ 춘하추동 우로상설, 성장성숙 차례로다
    초목 중애 각기 자랑, 여러말로 지꺼린다/ 복사오얏 번화해도, 片時春이네 아닌가

    더군다나 버찌꽃은, 산과들에 번화해도/ 열흘 안에 다 지고서, 열매조차 희소하다
    울밑 황국 자랑스리, 서리 속에 꽃핀다고/ 그러하나 열매 있나, 뿌리로만 싹이난다.

    특별하다 무궁화는, 자랑할 말 하도 많다/여름 가을 지나도록, 무궁무진 꽃이 핀다
    그 씨 번식하는 것이, 씨 심어서 될 뿐더러, 접붙어도 살 수 있고, 꺽꽂이도 성하도다 오늘 조선 삼천리에, 이 꽃 희소 탄식 마세, 영원번창 우리 꽃은, 삼천리에 무궁화다..

    그러므로 “영원번창 우리 꽃은, 삼천리에 무궁화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무궁화는 한민족의 얼이며, 무궁화 노래는 일제에 저항이며, 항일투쟁이다.

    남궁억 선생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병보석으로 석방 되었으나, 투옥 후유증으로 첫째 딸 개성 집에서, 1939년 4월 5일, 해방을 보지 못하시고 별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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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곡학교는 폐교 되고, 무궁화꽃 나무도 뽑히어 불태웠으며, 보통학교로 합병하였다.(사진:1947년)-현, 한서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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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곡학교는 학생수가 늘어 확장하였으나, 폐교 되어, 모곡중학교로 분리 폐교 되었다.(사진:1954년)

    나가며-불굴의 신앙은 불굴의 삶으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한서 남궁억 선생은 고위양반 관직의 행정가, 언론인, 교육자, 시민운동가, 역사학자, 시인, 서예가 등 화려한 삶을 사셨지만, 선생은 기독교 신앙으로 불굴의 정신과 삶을 사셨고, 불굴의 신앙은 오늘, 현재의 삶으로 체화 된 삶이 선생의 생애임을 깨달았다.

    고위관리 행정가로 청렴결백한 삶을 사셨으며, 정치사회 운동과 투쟁으로 극심한 고문과 투옥에도 굴하지 않으셨고, 언론인으로 독립신문, 황성신문으로 문명개화, 나라와 민족의 현실을 알리고 참여시키는 언론인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학자와 교육자로 영어, 언문, 한글, 시와 한글서예, 노래와 조서역사이야기 등으로 어린이들과 어울렸고, 하모니카, 가야금 등으로 교육효과를 증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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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궁억 선생의 한글 붓글씨로 성경말씀 병풍

    선생은 직위와 자리, 자기유익에 연연치 않으셨다. 본처 전도사라 하나, 그 과정을 이수한 일 없으며, 장로라 하나 그 시대 감리교회는 장로제도가 없었다. “장로”라 칭함이 명예도 아니고 오히려 구차하게 여겨진다. 선생은 신자, 성도로써 신앙인의 삶을 굽힘없이 실천하셨을 뿐이다. 눈물로 기도하며 찬송을 불렀고, 성경말씀을 읽고 삶으로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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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일하러 가세", "조선의 노래"-한서 남궁억 기념관 전시실

    선생의 무궁화 보급운동은 나라의 독립 투쟁이었으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으로 민족구국의 정신과 신앙을 깨우쳤다. 일제는 전국의 무궁화를 뽑고 불태워 버리고, 전국에 사쿠라(벚꽃)을 심었지만, 선생의“일하러 가세” 찬송을 일제는 금지시키고 찬송가에서 삭제했지만, 세계 한인교회와전국교회, 교인마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은밀히 꾸준히 이어 불러졌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 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봄 돌아와 밭 갈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 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곡식 익어 거둘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 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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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서 남궁억 기념관 뜰에 있는 "일하러 가세" 노래판

    마지막으로 한서 남궁억 선생님의 심문조서 몇을 제시하여, 불굴의 신앙인으로 불굴의 삶을 산 남궁억 선생을 밝힌다. 심문조서를 통해, 언제 예수 믿었는지, 왜 낙향했는지, 왜 교회와 학교를 설립했는지, 왜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개 투쟁하였는지, 왜 한일합병을 반대하는지, 왜 불온금지 된 노래와 저술을 발행하고 배포했는지 등등 굽히지 않고 분명히 심문에 답하는 당당한 모습을 지적하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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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궁억 선생 취조심문을 주먹쥐고 지켜 보는 필자(기념관 모형)

    남궁억 선생의 심문조서 중에서(1933.11-1934.5)

    문-모곡학교를 설립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나는 원래 예수교 독신자(篤信者, 잘 믿는 사람)이므로 학교를 설립하여, 예수교의 취지를 보급하도록 하여 교도를 획득한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문-그렇다면 그대는 예수교도를 획득하려는 정신 아래서 학교를 설립했는가?
    답-그렇다.(1933.11.7. 신문조서 중)

    문-그대는 조회 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조선되었다고 하지만은 일본에 합병형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죽어도 잊을 수가 없으니, 너희들도 조선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사실인가?
    답-물론 내가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죽더라도 그 일만은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말하면 나는 대한제국시대에 상당한 관직에 있던 사람으로 조선이 망해 버렸으니 소위 망국대부(亡國大夫)라고 한다. 그라니 그런 경우 당연히 자살이라도 하지 않으려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살아있으니, 민족적 사상이라든지 조선독립을 생각하는 것은 순간일도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으므로 당연히 그런 정도의 말은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죽더라도 민족운동이라든지 그 사상을 버릴 수도 없으므로..., 내가 말한 것이 법에 저촉된다면 어떤 처분이라도 달게 받겠다.(1933.11.7. 심문조서 중)

    문-불온한 역사책은 등사판으로 찍었는가?
    답-등사판으로 찍으면 현행 법규에 위반된다고 하므로, 복사지를 사용하여 골필(骨筆)로 필사했다.

    문-불온한 역사라는 것을 알면서 썼는가?
    답-나로서는 불온도 아무 것도 아니다.

    문-그 밖에 이익이 될 것은 없는가?
    답-나는 다만 조선민족의 고유한 정신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또는 조선민족을 위하여 내가 한 일l 다소라도 효과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므로 이해 관계가 되는 그런 것은 없다.(1933.11.7. 심문조서 중)

    문-그대가 경성에서 산간벽지에 와 있는 이면은 무엇인가?
    답-망국대부는 자살하는 것이 정당하다. 나는 조선이 멸망함에도 불구하고 경성에 남아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회지에 있으면 매일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이 거의 나의 주의, 사상에 위배되므로, 그것보다는 차라리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산간벽지에 와서 득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어떠한 주의, 사상에 위배되는가?
    답-나는 조선민족이므로, 나는 어디까지나 애국주의이다.(1933.11.15. 심문조서 중)

    문-그대가 서면의 모곡학교를 설립한 동기는 무엇인가?
    답-나는 일찍이 경성에 있을 때부터 미국인 선교사들과 밀접한 교제를 했는데..., 궁중에 있을 때부터 예수교를 믿었다.(1933.12.10. 신문조서 중)

    문-조선역사를 발행한 일과 무궁화를 재배하여 배포하는 일은 어떤가?
    답-조선민족은 지금 모두가 깊은 잠이 들어 꿈속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인데, 무궁화 등도 많이 배포하면 조선민족의 정신과 사상을 화기시킨다는 의미에서 조선역사를 발행하여 일반 유지에게 읽게하고, 무궁화를 재배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무궁화는 조선민족을 표징하는 국화이므로, 자국의 국화를 장려하여 민족사상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1933.12.10. 심문조서 중)

    문-“무궁화 시”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답-무궁화는 뿌리가 강하고 꽃은 2,3개월 동안 피어 있어서 조선민족을 대표하고 있으니, 조선민족도이 무궁화처럼 영구히 번창하라는 것을 아타내고 있다.(1934.5.29. 심문조서 중)

    문-그대는 금년 4월5일에 모곡예배당에서 조선민족에 대하여 강연을 하고 울었다고 하는데, 어떤가?
    답-나는 조선민족을 어떻게 하면 비참한 처지에서 구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 운 것은 한두 번이 아니고 늘 하는 일이다..., 예배당에서는 물론 어디에서도 이 이야기하다가는 반드시 눈물이 나게 되므로, 그때도 그렇게 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어떤 말을 했는가?
    답-조선민족만큼 불쌍한 민족은 세계에서 없으니, 이 민족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이 민족을 이대로 두고서는 죽을 수도 없으므로, 전부 자각해 달라고 했을 것이다.

    문-자각해 달라는 것은 무엇인가?
    답-언제까지나 꿈속에 있지 말고 눈을 뜨라는 의미이다.

    문-조선민족이 압박을 받는 것은 무엇인가, 자세히 말하라.
    답-내가 통절하게 느끼는 것은 첫째가 조선의 노동자가 일본 방면으로 노동하러 가는 사람이 격증하고 있는 것, 둘째가 많은 가족을 거느리고 북간도 방면으로 이주하고 있는 것, 셋째가 조선민족의 고향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하늘에서 구제의 기회를 주기보다는, 그대가 만드는 것이 아닌가?
    답-나는 이미 나이가 71살이나 된 노년이므로..., 나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가망 없는 일이다. 차라리 나는 이러한 비참한 민족을 보면서 살기보다는 지금이라도 죽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문-그러면 일한합병은 물론 현재 조선의 정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닌가?
    답-나는 이것만은 죽은 뒤에는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는 반대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시종일관 민주주의이므로 생도는 물론, 나는 친구와 좌담할 때도 항상 조선민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1933.12.10. 심문조서 중)

    문-위 창가 수업시간에 “무궁화”, “철 잃은 나비”, “무궁화동산이 그립다” 등 불온한 창가를 가르쳤다는데 어떤가?
    답-“찰 잃은 나비”는 조선인이 북간도 방면으로 이주하여 곤경을 겪고 있다고 들었으므로 동포애에서 부르고 가르쳤다.(1933.12.22. 심문조서 중)

    문-그대는 아동들에게 어떤 창가를 가르쳤는가?
    답-“무궁화 삼천리”, “철 잃은 나비” 등 조선말로 가르쳤다.

    문-“무궁화 동산”이라는 창가는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답-무궁화는 조선민족울 대표한 꽃이고, 꽃 자체가 꽃 중에서 가장 고운 것처럼 조선민족도 번창하라는 것이다.

    문-“무궁화 삼천리”는 어떤가?
    답-“무궁화 삼천리”는 조선민족과 조선의 산야(山野)를 찬미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한 노래이다.(1934.5.29. 심문조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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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궁억 선생 부부-아내 양혜원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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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책하시고 기도하시던 유리산에 있는, 한서 남궁억의 묘역이 조성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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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도 홍천강은 삶과 함께 유유히 흐르고 있다.-한서(모곡)교회와 한서학교,유리산, 유리봉을 돌아 구비 돌며 흐르고 있다.(사진-202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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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서교회 예배실에서, 현재호 목사(담임목사)와 함께-현재호 목사는 한서 남궁억 선생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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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 한서교회(담임:현재호 목사)-옆으로 나란히, 복원 된 모곡예배당과 기념관, 무궁화 동산이 있다.필자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날 충주에서 홍천 남궁억 기념관을 방문하였다.(2020.7.7.화)


    당당뉴스 이필완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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