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피해자, 동물의 목소리가 법정에서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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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문화로서의 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
▲ 동물의 권리를 함께 외치기 위해 방청연대를 온 시민들 ⓒ디엑스이 코리아
2020년 11월 12일 그리 크지 않은 법정 안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50여명이 하나의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들어왔다. 동물권 운동에 대한 재판이었다. 동물권이란 ‘쾌고감수성’(1)을 지닌 존재들 또한 인권에 비견되는 생명권을 지니며, 고통을 피하고 학대당하지 않을 권리 등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이다.
점증하는 동물권에 대한 논의
피고인들은 작년 10월 4일, 세계동물의 날에 도살장에 들어가는 차량을 막아섰다. 이에 업무방해의 죄목으로 재판을 받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변론문에서 법적으로 제대로 다뤄지고 있지 않은 동물의 권리를 말했다. 불의가 합법이 될 때 정의는 불법이 된다는 그들은, 증거영상을 통해 외면당하는 동물들의 현실을 드러냈다. 동물학대의 문제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드디어 법정 안에서도 들려지도록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선고공판은 12월 17일 1시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다.
한국에서도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인구와 채식을 하는 이들도 급증하고 있으며, 페미니즘과 함께 타자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동물권 문제들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물론 앞의 사건에 있어서 행위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관심을 두는 것은 그러한 논란이 시작될 수 있는 문화 자체다. 동물과 관련된 문화들이 바뀌고 있다. 코로나 19의 원인에 야생동물의 무분별한 사냥과 판매가 있어서, 중국의 법 자체가 바뀌었다. 기후위기 시대에 육식은 지구온난화의 제1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점점 더 외면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의 변화 역시 점점 더 외면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의 권리를 위한 신학적 해석의 한 시도
폴 틸리히는 문화는 질문하며 신학은 대답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동물권에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자연과의 관계에서부터 정리해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인간이 이 땅의 임시거주자일 뿐이라는 청지기적 인식은 기독교적인 이해에서 자연스러운 이해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의 대표적인 캐치프레이즈가 “땅을 정복하라”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많은 학자들이 지금의 지구 위기의 문제에 있어서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기독교를 그 원인에 두기도 한다. 린 화이트는 “자연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오만”이라고 표현했다. 기독교가 지구 파괴의 문제에 있어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쉽게 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청지기라는 인식은 오히려 더욱 역설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게 되는 지금의 무관심이 오히려 기독교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통을 단순하게 하나로 압축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다. 세계 동물의 날 역시도 동물들의 수호성인이라 부르는 아사시의 프란체스코의 축일이다. 대표적으로 이 날에는 각자의 신앙 전통에 따라 동물들에 대한 세례가 이뤄지기도 한다.
▲ 재판정에 방청연대를 가서 재판 과정을 스케치한 그림 ⓒ디엑스이 코리아
성경 본문에 나타나는 동물과 야훼의 관계는 독특하다. 흙으로 빚은 몸에 숨(루아흐)이 결합하면 살아 있는 영적 존재인 “네페쉬 하야”가 된다. 성경에서 네페쉬 하야로 표현되는 존재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이기도 하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지상의 명령은 하나님이 동물에게도 직접 내린 것이다. 노아 홍수의 마지막에는 더 이상 물로 멸하지 않고 충만함을 약속하는 무지개 언약을 맺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계약을 인간과만 맺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도 직접 계약을 하신다. 이렇듯 성경이 자연을 착취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과 충돌하는 본문의 발견은, 그러한 충돌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만든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문화의 답변을 너무 쉽게 기독교의 답변으로 오해하거나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캐스린 테너는 문화에 대한 혼종성 모델을 제시한다. 모든 문화는 수많은 텍스트들의 모자이크이며, 기독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우리의 성경읽기 방식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우리는 예배드릴 때 여성의 머리에 두건을 쓰는 것을 기독교 자체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텍스트는 그에 대한 해석자 그리고 문화적 배경과 함께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가 반영하는 문화와 그것을 해석하는 문화를 읽어내는 것은, 해석의 원천이신 성령과 함께 성경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예언적 힘이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성경 텍스트를 읽는 절대적인 자리는 인간에게 있지 않다. 어떤 한정된 인간 문화에서만의 해석을 성경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기도와 예배가 끊임없이 이뤄지는 것처럼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하다.
생태신학은 말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몸이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지만 예수와 동일하지 않듯 이는 범신론적 인식과는 다르며, 오히려 성례전적 인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세계와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또한 밖에서 사랑과 생명의 원리이자 힘이 된다. 이때의 신은 위계적이고 이분법적인 명사적 신이 아니다. 관계 속에 있는 동사적인 신이다. 그 안에서 인간과 동물 역시도 서로 간의 관계적인 개념으로 다시 이해될 수 있다.
기린은 얼룩말이 있었기에 존재했다. 만약 얼룩말이 없었으면 기린의 조상은 목이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덩치가 커질 뿐이었을 것이다. 곧 기린의 존재는 얼룩말의 존재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는 어떠한가? 지금의 인간 역시 그러한 공존 속에서 계획된 인간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언가 벗어나고 있다면 그런 인간다움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에 의해 주어진 그 본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위계적이고 이분법적인 문화 배경의 목소리인지 성경의 목소리인지 지혜롭게 구분해 볼 필요가 오히려 대화 속에서 기독교는 사라지지 않고 생명의 힘을 발휘한다. 이때의 기독교는 마치 죽음을 불러오는 병에 걸린 몸 안에서 생명의 항체가 되어 저항하는 것과 같은 역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기독교는 인간의 욕심이 야기한 죽음의 문화 속에서 생명의 문화로 대화해 가는 동사적 과정이 된다. 생명의 문화 앞에 기독교가 뒤쳐질 어떠한 근거도 없다.
동물권 주장과 같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변화가 요구되는 시대다. 우리는 그러한 자리에서 다시 대화를 해나간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정복의 원형은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죽음을 정복한 예수님이다. 땅의 정복에 대한 정복은 죽음의 세상에서 그런 참인간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존과 행복이 자연 그리고 다른 동물들의 생존과 행복과 분리되지 않는 참인간 말이다.
편집자 주
(1) ‘쾌고 감수 능력’이란 쾌락과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능력, 기쁘고 즐거우면 좋다고, 아프면 고통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니까 이 능력이 동물들에게도 함양되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인간이 불필요하게 수행하는 동물실험을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박광문(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예수사회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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