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끈 교회…오늘날 다시 붙들 자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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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청년회, 만세운동 확산 역할
오늘날 공공성 회복 과제 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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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한 어린이가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사진출처=연합뉴스)
[데일리굿뉴스] 이새은 기자 =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하는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문 초안)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을 향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파고다공원과 태화관을 비롯한 곳곳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됐고, 무단통치에 짓눌렸던 민중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태극기를 흔들던 그날의 장면은 단순한 시위를 넘어, 자주독립국임을 세계에 천명한 역사적 선언이었다.
이 거대한 물결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이어진 무단통치는 한반도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다.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는 박탈됐고 일상은 감시 속에 놓였다. 고종의 인산과 해외에서 전해진 2·8 독립선언은 억눌린 민심에 불씨를 지폈고, 이는 전국적 항거로 확산됐다.
3·1운동은 곧 국가 건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 결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다.
안교성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장은 이를 두고 "3·1운동의 최고 유산은 민주공화국을 지향한 임시정부의 탄생"이라고 평가했다. 왕정 복고가 아닌 '민국(民國)'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는 새로운 국가 질서를 향한 분명한 방향 제시였다는 설명이다.
만세운동의 조직적 기반에는 교회가 있었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전국적으로 연결된 교회와 기독교학교, 청년회는 독립선언서 배포와 시위 확산의 통로가 됐다. 신앙 공동체는 동시에 근대적 사상과 민족의식을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당시 기독교는 인구 비율로 보면 소수였지만 결속력은 강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이승훈, 길선주, 신석구 등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안 관장은 "복음이 국가적 위기 속에서 전해졌기에 한국교회는 신앙적 해답과 함께 정치·사회적 책임도 요구받았다"며 '일제 말기 다수가 친일화되는 상황에서도 교회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은 집단이었다"고 말했다.

▲3·1운동의 핵심 조직 기반이었던 황성기독교청년회 인사들.(사진=서울YMCA 제공)
선배 신앙인들의 선택은 과거의 장면에 머물지 않는다. 신앙이 시대 속에서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안 관장은 "종교는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과 함께 변혁의 기능을 지닌다"며 "한국교회는 민족의 활로를 열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개혁 세력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3·1운동은 연대 속에서 전개됐다"며 "공동체의 대의를 위해 손을 맞잡았던 개방성과 공공성은 오늘날 교회가 되살려야 할 자산"이라고 했다.
그는 또 "교회는 종교 간 협력을 넘어 사회적 연대의 모범을 보였다"며 "이 같은 섬김의 지도력을 다시 세워야 한다. 민족주의가 국수주의로 왜곡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고, 공동체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예언자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19년의 만세 함성은 역사의 기록이 됐다. 그러나 그 정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107년 전 기독교인들이 거리로 나섰다면, 오늘의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시대의 질문 앞에 설 것인가. 만세의 외침은 잦아들었지만, 그 책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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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굿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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