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배운 모든 것은 중국식당에서 배웠다”... 중국계 3세 작가가 들려주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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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미국 덕분에 성공... 그러나 미국도 이민자 덕분에 성공해"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스스로 부여해야... 미국 민주주의 여전히 희망적
기고 커티스 친 작가
미국에서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은 때로 한 사람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이민자의 자녀에게, 소수계 미국인에게, 그리고 ‘미국인’이라는 이름을 늘 증명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더 오래, 더 깊게 남는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나는 그 질문에 대해 가족사를 통해 답해 왔다. 그리고 항상 이렇게 말한다.
“그냥 중국식당이 아니라, 디트로이트의 중국식당입니다.”
65년 동안 가족이 운영한 우리 식당에서 판 에그롤 숫자만 1000만개에 달한다. 할머니와 이모들, 어머니가 직접 만든 에그롤이다. 식당이 있던 디트로이트는 결코 평온한 도시가 아니었다. 자동차 산업은 위기를 겪고 있었고, 일본 자동차 회사들에 대한 반감은 아시아계 전체를 향한 적대감으로 번지고 있었다. 마약과 에이즈가 도시를 덮쳤다. 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는 사람만 다섯 명이 살해됐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절을 훌륭한 유년기로 기억한다. 부모님은 그 식당에서 여섯 남매를 키웠고,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내 책은 부모님께 보내는 감사 인사이자, 제 고향 디트로이트에 대한 헌사다. 많은 이들이 디트로이트를 오해하지만, 그 도시가 여전히 나처럼 “좋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의 가족은 1800년대부터 미국 중서부에 뿌리를 내렸다. 고조부는 중국 광저우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처음에는 오하이오주 캔턴으로 갔다가, 그곳에 중국인이 실제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디트로이트로 이동했다. 당시 자동차 산업이 막 시작되고 있었지만, 초기 중국계 이민자들은 차별 때문에 공장 일자리를 얻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손빨래 세탁소에서 일했고, 돈을 모아 자신의 세탁소를 열었다.
미국이 중국인 배척법을 시행했을 때 중국인의 미국 입국은 사실상 금지됐지만 예외가 있었다. 학생이거나 자기 사업을 가진 사람은 가족을 초청할 수 있었다. 사업체를 소유했던 고조부 덕분에 우리 가족은 세대를 이어 미국에 올 수 있었다. 이후 가족은 1920년대 식료품점을 열었고, 1930년대에는 식당을 차렸으며, 1940년 디트로이트에 ‘청스 칸토니스 퀴진(Chung’s Cantonese Cuisine)’을 열었다. 이 식당이 바로 내 책에 등장하는, 내가 자란 공간이다.
내 책은 유머와 기쁨이 담긴 성장기이지만, 동시에 미국의 중요한 전환기를 통과한 기록이다. 디트로이트와 미국이 겪은 인종 갈등, 공동체 간의 긴장, 이민 논쟁, 정당 정치의 변화가 그 안에 담겨 있다. 책이 발간된 후 지금까지 10개국에서 350회가 넘는 대면 북토크를 진행했다. 한국의 캠프 험프리스 미군기지부터 영국 옥스퍼드대까지, 다양한 공간에서 독자를 만났다.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과 책을 놓고 대화할 수 있었던 건 큰 축복이었다.
나는 또 30회가 넘는 행사를 중국식당에서 열었다. 그곳에서는 책뿐 아니라 중국식당의 현실을 이야기했다. 식당 주인들의 이민 여정, 가장 좋아하는 음식, 그리고 이민자 소유 사업체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인 ‘승계 문제’가 주요 화제였다. 많은 2세는 부모 세대가 일군 가업을 이어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쩌면 한인 커뮤니티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증조부가 세운 중국식당을 이어받지 않은 데 대해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꼈다. 식당은 이후 팔렸고,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문을 닫았다. 증조부의 유산을 어떻게든 살리고 싶지만 아직 그 방법은 모른다.
우리 가족은 미국 덕분에 성공했다. 그러나 미국 역시 우리 가족 덕분에 성공했다. 이민자는 미국에서 무언가를 얻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미국의 부와 성공에 기여했고, 미국은 이민자 없이는 지금의 미국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1800년대부터 미국에 살았지만 고조부가 처음 겪은 차별과 내가 오늘날 마주하는 고정관념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시아계는 여전히 외국인으로 간주되고, 동화될 수 없으며, 때로는 더럽거나 낯선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시아계 미국인 공동체 자체다. 공동체가 만든 기반과 조직, 정치적·문화적 역량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디트로이트에서 발생한 빈센트 친 살인사건은 아시아계의 정치력을 키우는 동력이 됐다. 당시 디트로이트 언론은 사건 발생 12일이 지나서야 보도했다. 아시아계 기자가 뉴스룸에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르다. 아시아계 기자들이 있고, 애틀랜타 총격 사건이나 최근 샌디에이고 총격 사건처럼 아시아계와 소수계가 피해를 입는 사건에 대해 즉각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아시아계 정치인, 비영리단체, 피해자 지원 조직, 재단을 후원하는 사업가, 자신의 플랫폼을 활용하는 연예인도 있다. 차별과 고정관념은 계속되지만, 공동체가 이에 맞서는 능력은 훨씬 강해졌다.
모두가 지금이 어두운 시기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미국의 미래와 민주주의 자체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 민주주의와 다문화 사회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건국 자체도 싸움이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을 환영하는 사회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 나라가 세계 곳곳에 흔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미국은 늘 완벽하지 않았고, 때로는 잘못한 일이 더 많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미국은 그 이상을 향해 시도해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 세대는 1960년대 민권운동의 결실을 누리며 자랐다. 그 희생 덕분에 일정한 권리를 누렸지만, 어쩌면 그래서 미국의 역사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젊은 세대에게 미국이 늘 이런 문제와 싸워왔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몇 주 전 일리노이 행사에서 한 이민자가 “나는 이 나라에 30년을 살았다. 언제 미국인이 되는가”라고 물었다.
“당신이 미국인이 되고 싶을 때, 당신은 미국인입니다.”
나는 미국에서 태어났기에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다. 다른 사람이 ‘미국인’의 의미를 정의하도록 그 권리를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 미국의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이 그 단어의 의미를 함께 정의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미국인이라는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며, 모두가 같은 답을 내놓을 필요는 없다. 다만 서로의 정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내가 얼마나 미국인이고 얼마나 아시아인인가를 두고 크게 갈등하지 않았다. 가족 모두 오랫동안 미국에 살았고,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문제는 미국인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미국의 흑백 중심 인종 구도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 것인가였다.
어떤 경우에는 권력과 특권을 갖고, 또 어떤 경우에는 차별과 불이익을 겪는 위치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은 미국을 하나로 묶는 접착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이 나의 질문이었다.
지금 미국은 너무 분열돼 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작은 공간에 갇혀 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식당은 여전히 서로 다른 인종, 종교,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앉는 몇 안 되는 장소다. 옆 테이블 사람에게 “무엇을 드시나요?”라고 묻는 작은 대화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을 강하게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에게도 공유된 역사가 있고, 아시아계 공동체에도 깊은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부드럽게 상기시켜주면 된다. 미국은 한 사람, 한 인종, 한 세대가 만든 나라가 아니다. 수많은 이민자와 그 자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고, 먹이고, 돌보고, 버티며 함께 만들어온 나라다.
나는 중국식당에서 그것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 미국이 다시 배워야 할 것도 바로 그것이라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