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심 목회자’ 내적 설교에 성도들 마음 움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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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국민일보|
작성일2020-0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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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미주 한인교회를 가다] <14> 뉴욕센트럴교회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가 19년 만에 8만4983㎡ 부지에 예배당을 완공하게 된 목회 스토리를 소개하고 있다.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는 ‘뚝심 있는 목회자’로 미주 한인 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뉴욕 부촌인 올드 웨스트베리에 8만4983㎡(2만5707평)의 땅을 구입한지 19년 만인 2017년 12월 현대식 예배당을 신축해 입당했다. 숱한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축이 늦어진 것은 주민 반발 때문이었다. 한인 대형교회가 백인 부촌에 들어오면 주택 가격이 하락할 것이라고 우려한 지역주민은 건축법을 바꿔 건폐율까지 조정하는 등 심하게 견제했다. 자신들의 주거 수준에 맞는 조경을 해야 한다며 수종과 간격까지 지정할 정도였다. 설상가상 교회 건축에 반대하는 교인의 신고로 검찰청 실사를 4년 동안 받았다. 그러나 김 목사의 목회적인 강단을 꺾을 순 없었다.
김 목사는 “예배당 건축위원장이 6번 바뀌고 교회 건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방해하는 등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과정이 길고 답답했다. 때론 절망적이었다”면서 “설교나 인격이 모자란다면 떠날 수도 있었겠지만, 존재하지도 않은 재정 비리가 있다고 하니 그만둘 수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 목사는 “성전 건축이 이런저런 이유로 연기될 때마다 ‘주님, 올해도 침묵하시고 넘어가실 겁니까’라고 울면서 매달렸다”면서 “그때마다 주님은 열방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는 아브라함의 약속을 보여주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사인을 주셨다”고 했다.
뉴욕센트럴교회는 1980년 김의원(전 총신대 총장) 목사가 개척한 교회다. 2대 목사인 이철(전 남서울교회 담임목사) 목사에 이어 97년 김재열 목사가 3대 목사로 부임했다.
김 목사는 “부임 후 매년 200~300명씩 등록을 했다. 4년 만에 주일 출석 인원이 1100명으로 늘어나면서 2번 드리던 예배를 5번 늘릴 수밖에 없었다”면서 “컨테이너 교실 4개를 설치하고도 주일학교를 시차제로 운영하자 학부형이 먼저 교회건축을 하자고 헌금을 모았다”고 했다.
김 목사는 “그때부터 시작된 건축 과정은 참 길고 험난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미국 내 교회만 1800개를 지은 ‘로 매스너’라는 선교적 건축회사를 만나게 해주셨다”면서 “건축비가 모자랄 때는 교회 터에서 나온 모래가 최상급인 것으로 확인돼 모래를 팔아 충당하는 등 기적의 역사가 계속됐다”고 했다. 이어 “성도들은 연단을 통해 기드온의 삼백용사처럼 신앙이 더욱 단단해졌다”면서 “공사신청을 하고 14년 만에 건축허가를 받은 뒤 2700만 달러의 대공사를 진행하면서도 매년 40만~50만 달러의 선교후원금은 한 번도 줄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64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폐결핵으로 생사를 오가다가 마산요양소에서 예수를 만났다. 성결교 소속 미국인 의료 선교사 부부의 후원으로 2년간 신학교 학비와 생활비를 후원받으며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으나 잠시였다.
김재열 목사(왼쪽)가 197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엑스플로 74대회’ 때 고등학생을 위해 기도해주는 장면. 김 목사는 2017년 우연히 이 사진 속 인물이 자신이었음을 발견했다.
김 목사는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경직된 교회의 모습을 보고 염증을 느껴 사업을 시작했는데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만족이 없었다”면서 “사업을 접기 위해 큰돈이 들어오는 대로 헌금했지만, 오히려 사업이 더 잘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80년 김명혁 목사와 함께 서울 강변교회를 개척한 초기 멤버다. 김 목사는 “당시 예배당을 마련하기 위해 강남의 아파트를 두 번 바쳤다”면서 “그때부터 믿음을 키우시는 하나님의 훈련이 시작된 것 같다”고 했다.
목회 소명을 다시 찾은 김 목사는 총신대에 편입했으나 교단 분열로 80년 합동신학대학원대로 옮겼다. 졸업 후 84년 서울 산성교회를 개척해 300명 교회로 성장시켰다. 88년 캐나다 토론토 열린문교회에 부임해 3년 만에 성도가 450명으로 불어났으며, 예배당 건축까지 했다.
김 목사는 목회 비결이 삶의 현장에서 끌어올린 내적 고백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목회자가 되기 전 사업을 하면서 평신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겪는 치열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다”면서 “거기서 나오는 내적 고백의 설교가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교회 본당은 800석으로 소예배실 7개와 교실 40개, 친교실, 체육관이 있다. 건물 뒷마당에는 테니스코트와 간이 음악당, 어린이 놀이터, 1.8㎞의 산책로가 있다. 다음세대 교육에 좋은 조건을 갖춘 교회는 한인 2세를 위한 서머캠프, 토요한국학교, 프리스쿨, 아기학교, 방과후 학교 등을 운영한다. 오는 9월부터 크리스천 초등학교도 운영을 시작한다.
김 목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넓은 땅을 주신 건 자녀교육을 잘한다는 소문에 걸맞게 다음세대를 책임지라는 명령인 것 같다”며 “구약 사사기 시대의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다음세대에 반드시 복음으로 인한 고난과 시련의 가치를 전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경제적 풍요의 시대에 축복만 쫓다 보면 기복신앙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면서 “풍요로울수록 눈물의 기도, 배고픔의 행복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미국 캐나다 멕시코 남미 필리핀 등의 640여개 교회가 소속된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총회장을 2018년 역임했다. 현재 137개국에 260여 가정을 파송한 국제씨드선교회 명예 이사장을 맡고 있다.
국민일보 뉴욕=글·사진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가 19년 만에 8만4983㎡ 부지에 예배당을 완공하게 된 목회 스토리를 소개하고 있다.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는 ‘뚝심 있는 목회자’로 미주 한인 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뉴욕 부촌인 올드 웨스트베리에 8만4983㎡(2만5707평)의 땅을 구입한지 19년 만인 2017년 12월 현대식 예배당을 신축해 입당했다. 숱한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축이 늦어진 것은 주민 반발 때문이었다. 한인 대형교회가 백인 부촌에 들어오면 주택 가격이 하락할 것이라고 우려한 지역주민은 건축법을 바꿔 건폐율까지 조정하는 등 심하게 견제했다. 자신들의 주거 수준에 맞는 조경을 해야 한다며 수종과 간격까지 지정할 정도였다. 설상가상 교회 건축에 반대하는 교인의 신고로 검찰청 실사를 4년 동안 받았다. 그러나 김 목사의 목회적인 강단을 꺾을 순 없었다.
김 목사는 “예배당 건축위원장이 6번 바뀌고 교회 건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방해하는 등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과정이 길고 답답했다. 때론 절망적이었다”면서 “설교나 인격이 모자란다면 떠날 수도 있었겠지만, 존재하지도 않은 재정 비리가 있다고 하니 그만둘 수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 목사는 “성전 건축이 이런저런 이유로 연기될 때마다 ‘주님, 올해도 침묵하시고 넘어가실 겁니까’라고 울면서 매달렸다”면서 “그때마다 주님은 열방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는 아브라함의 약속을 보여주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사인을 주셨다”고 했다.
뉴욕센트럴교회는 1980년 김의원(전 총신대 총장) 목사가 개척한 교회다. 2대 목사인 이철(전 남서울교회 담임목사) 목사에 이어 97년 김재열 목사가 3대 목사로 부임했다.
김 목사는 “부임 후 매년 200~300명씩 등록을 했다. 4년 만에 주일 출석 인원이 1100명으로 늘어나면서 2번 드리던 예배를 5번 늘릴 수밖에 없었다”면서 “컨테이너 교실 4개를 설치하고도 주일학교를 시차제로 운영하자 학부형이 먼저 교회건축을 하자고 헌금을 모았다”고 했다.
김 목사는 “그때부터 시작된 건축 과정은 참 길고 험난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미국 내 교회만 1800개를 지은 ‘로 매스너’라는 선교적 건축회사를 만나게 해주셨다”면서 “건축비가 모자랄 때는 교회 터에서 나온 모래가 최상급인 것으로 확인돼 모래를 팔아 충당하는 등 기적의 역사가 계속됐다”고 했다. 이어 “성도들은 연단을 통해 기드온의 삼백용사처럼 신앙이 더욱 단단해졌다”면서 “공사신청을 하고 14년 만에 건축허가를 받은 뒤 2700만 달러의 대공사를 진행하면서도 매년 40만~50만 달러의 선교후원금은 한 번도 줄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64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폐결핵으로 생사를 오가다가 마산요양소에서 예수를 만났다. 성결교 소속 미국인 의료 선교사 부부의 후원으로 2년간 신학교 학비와 생활비를 후원받으며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으나 잠시였다.
김재열 목사(왼쪽)가 197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엑스플로 74대회’ 때 고등학생을 위해 기도해주는 장면. 김 목사는 2017년 우연히 이 사진 속 인물이 자신이었음을 발견했다.
김 목사는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경직된 교회의 모습을 보고 염증을 느껴 사업을 시작했는데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만족이 없었다”면서 “사업을 접기 위해 큰돈이 들어오는 대로 헌금했지만, 오히려 사업이 더 잘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80년 김명혁 목사와 함께 서울 강변교회를 개척한 초기 멤버다. 김 목사는 “당시 예배당을 마련하기 위해 강남의 아파트를 두 번 바쳤다”면서 “그때부터 믿음을 키우시는 하나님의 훈련이 시작된 것 같다”고 했다.
목회 소명을 다시 찾은 김 목사는 총신대에 편입했으나 교단 분열로 80년 합동신학대학원대로 옮겼다. 졸업 후 84년 서울 산성교회를 개척해 300명 교회로 성장시켰다. 88년 캐나다 토론토 열린문교회에 부임해 3년 만에 성도가 450명으로 불어났으며, 예배당 건축까지 했다.
김 목사는 목회 비결이 삶의 현장에서 끌어올린 내적 고백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목회자가 되기 전 사업을 하면서 평신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겪는 치열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다”면서 “거기서 나오는 내적 고백의 설교가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교회 본당은 800석으로 소예배실 7개와 교실 40개, 친교실, 체육관이 있다. 건물 뒷마당에는 테니스코트와 간이 음악당, 어린이 놀이터, 1.8㎞의 산책로가 있다. 다음세대 교육에 좋은 조건을 갖춘 교회는 한인 2세를 위한 서머캠프, 토요한국학교, 프리스쿨, 아기학교, 방과후 학교 등을 운영한다. 오는 9월부터 크리스천 초등학교도 운영을 시작한다.
김 목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넓은 땅을 주신 건 자녀교육을 잘한다는 소문에 걸맞게 다음세대를 책임지라는 명령인 것 같다”며 “구약 사사기 시대의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다음세대에 반드시 복음으로 인한 고난과 시련의 가치를 전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경제적 풍요의 시대에 축복만 쫓다 보면 기복신앙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면서 “풍요로울수록 눈물의 기도, 배고픔의 행복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미국 캐나다 멕시코 남미 필리핀 등의 640여개 교회가 소속된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총회장을 2018년 역임했다. 현재 137개국에 260여 가정을 파송한 국제씨드선교회 명예 이사장을 맡고 있다.
국민일보 뉴욕=글·사진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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