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을 '올인'한 목사와 한국 카지노의 역사
재산을 '올인'한 목사와 한국 카지노의 역사
  • 김기대
  • 승인 2022.12.07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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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자녀 열전) Disney +, ‘카지노’로 한국 OTT시장 본격 공략

디즈니 플러스는 ‘범죄도시’의 강윤성 감독의 연출으로 최민식, 손석구가 출연하는 드라마 ‘카지노’를 12월 말부터 방영한다고 밝혔다. 한국 OTT 시장에서 점유율이 가장 높은 넷플리스에 기가 눌려 있던 디즈니 플러스의 그간 한국 컨텐츠에 비하면 ‘카지노’는 상당한 규모의 작품으로 넷플릭스와 본격적으로 경쟁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런데 ‘카지노’는 소재에서 다소 신선도가 떨어진다. 수많은 도박 영화에 인이 박힌 한국 관객들이 얼마나 몰입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그동안 도박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는 ‘타짜 1,2,3’, 바둑 도박 영화인 ‘신의 한수’, 볼링 도박 영화인 ‘스플릿’, 2003년 SBS드라마 ‘올인’ 등이 있었다. 외국 도박 영화에 비해 한국 도박 영화에서는 폭력 장면이 두드러졌다. 스토리보다는 액션에 비중을 둠으로써 도박 특유의 치밀한 두뇌싸움이 간과되곤 한다.

 

 

이번에 선보일 ‘카지노’ 트레일러 영상에도 역시 폭력 장면이 많이 보인다. 주인공 최민식의 극중 이름은 차무식, ‘올인’에서 이병헌이 맡았던 역할의 실제 인물인 차민수씨를 고려한 작명으로 보인다.

카지노하면 따라 다니는 이러한 불법 폭력 이미지는 사실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도박으로 뉴스를 장식하는 연예인들은 리스크가 높은 불법도박장을 이용했다거나 해외 도박을 위해 지니고 간 돈이 출국 때 신고되지 않은 경우이다.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와 마찬가지로 한국에도 합법 카지노가 여러 군데 운영되지만 내국인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정선으로 한정된다. ‘도박’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연예인들이 신분이 노출되기 쉬운 합법적 장소보다는 은밀한 곳을 찾다가 발각되는 것이 아이러니다.

한국 카지노의 역사를 말할 때 고인이 된 전락원(1927~2004)씨를 빼 놓을 수 없다. 본래 전락원의 부친 전주부 목사는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바랐다.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었던 전목사는 아들의 이름도 낙원으로 지었다. 전목사의 성이 온전할 전(全)이 아니라 밭 전(田)이니 전낙원이라는 이름은 에덴의 밭, 즉 에덴 동산이다.

전주부 목사는 어떤 인물인가? 전락원의 누이로서 한국 펜클럽 회장을 역임한 수필가 전숙희의 이야기다. (참조: 조은, ‘벽강 전숙희’, 한겨레 출판사)

 

나는 본래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어요. 부친은 일찍이 목사가 되어 인간의 영혼을 구하는데 생애를 바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계셨기 때문에 해운업으로 크게 성공한 할아버지의 후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서울 협성신학교와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목사가 된 부친의 임지를 따라 나는 원산을 중심으로 함경도와 강원도를 오가며 성장했어요. 할아버지가 분가 자금을 내주셔서 서울에 정착 후에는 혜화동에 큰집 을 사기도 했으나 집의 위치가 너무 가파른 언덕길이어서 학교통근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교통이 편리한 계동으로 이사했고 기독교 소속의 종로초등학교와 이화 고녀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노방 전도만 다니던 부친은 집안의 대청마루를 개척교회 로 개방했고 일요일과 수요일 예배를 그곳에서 인도하셨어요.

이렇게 열성적이던 아버지는 어느날 부흥회에 다녀오면서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마저 교회에 헌납해버렸다. 도박 용어로 말하면 가진 것을 다 거는 ‘올인’을 한 셈이다.

전숙희의 회고에 따르면 집을 헌납한 행위에 아내 계성옥(桂成玉)이 눈물을 보이자 전주부 목사는 ‘저 하늘에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먹이고 거두신다’는 말로 응수했다고 한다. 이 ‘올인’으로 풍요로웠던 가정이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고 이로 인해 여고생 전숙희는 수술비가 없어 인턴 실습용 무료 수술을 받은 적도 있다.

전주부 목사는 14개의 교회를 개척했다고 하는데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덕장교회(예장 통합) 홈페이지뿐이다.

전주부 목사가 6.25 전쟁 중인 1951년 8월에 본인의 자택(포일동 126번지)에서 전도처로 모여 1957년까지 예배드리다가 1958년 서울에 교회 개척차(대길교회, 신길교회) 떠남으로 전도처가 없어졌습니다.(덕장교회 홈페이지)

 

전도처 폐쇄로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가 1962년에 전주부 목사가 의왕으로 다시 돌아와서 포일리 교회(현 덕장교회)를 개척하고 1966년까지 시무한다. 전락원은 카지노업으로 성공한 후 의왕에 1979년 계원예술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 가족에게 의왕은 의미있는 지역이었다. 학교 이름은 어머니의 성 계(桂)와 그의 이름 원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전락원이 일군 파라다이스 그룹은 1997년에 한국 첫 현대문학 자료관인 '한국현대문학관'을 개관했다. 형식적인 설립자는 전숙희지만 현재는 파라다이스 그룹의 문화 사업 중 하나로 운영되고 있다.

사업을 이어 받은 아들 전필립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김종진 전태관과 함께 밴드 생활을 잠깐 했으며, 1970년대 인기 드라마 ‘여로’의 영구 역을 맡았던 배우 장욱제도 이 집안과 연을 맺었다. 그는 인기 절정일 때 연예계를 은퇴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제주 파라다이스 카지노일을 도왔다.

일부 인터넷에는 그가 수필가 전숙희의 사위로 나와 있으나 다른 누이 전숙자의 사위다. 전숙자의 남편은 김흥동은 보성전문 법과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조선 축구대표 선수로 일본과 시합을 갖기도 했다. 자유당 치하에서 잠시 좌익에 몸담았던 일로 고초를 겪은 그는 보성전문 출신, 조선대표 축구선구, 포항 부호의 아들이라는 껍데기를 벗고 한국 루어낚시 보급에 앞장 서서 한국 낚시계의 유명인사가 됐다. 이처럼 전주부 목사의 가족 구성원이 매우 다채롭다. 배우 김상중은 이 집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전락원은 카지노 소재의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걸어 왔다.  그는 누이를 통해 많은 문화 예술인들과 교류했으며 여야를 넘어 정치인들과도 폭넓은 사귐을 가졌다. 강원용 목사와도 깊은 우정을 나눈 사이다.

노태우 정권 당시 황태자 노릇을 했던 박철언이 슬롯머신 사업가 정덕진 형제와의 커넥션 때문에 하루 아침에 차기 유력 대권 주자에서 밀려난 것과 달리 전락원은 정치인과의 관계에서도 잡음이 없었다.

그도 잠시 영어(囹圄)의 몸이 된 적이 있지만 오래 복역하지는 않았다. 권력과의 유착으로 그가 법망을 피해갔다고 보는 시선도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무소 불위의 박철언이 무너진 것을 보면 전락원에게는 유착으로만 볼 수 없는 지점이 많다.

생활력 없는 아버지를 보고 전락원은 목사의 길보다는 사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 군무원으로 군수물자사업에 관여했다. 전숙희가 미군 통역을 했으므로 이를 인연으로 해서 전락원이 미군부대에 진출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전락원이 전숙희와 연관된 많은 문화사업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도 이러한 짐작에 서 벗어나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때 해 모은 돈으로 인천에서 운수사업을 벌여 성공, 1961년 서울청년회의소 부회장이 됐다. 혁명 후 박정희에게는 이런 청년 사업가들이 필요했을 터, 서울 청년 회의소를 통해 교류의 폭을 넓혀가다가 마침내 1967년 8월 인천 올림포스호텔에 국내 제1호 카지노를 개장했다. 1968년 3월에는 워커힐호텔 카지노를 운영하다가 1972년에 운영권을 인수했다. 이때부터 사업이 급성장 마침내 파라다이스 그룹을 이루어 내었다.

1974년 아프리카 케냐에 사리파크 호텔을 개장, 케냐에서는 국빈 대접을 받았다. 국내 유력 인사들이 이 호텔에 초대받아 머물기도 했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개최 결정 회의가 열릴 때 전락원이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발휘, 지지표를 끌어 모은 사실도 유명하다.

목사의 아들이라는 점이 그의 사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아버지처럼 경제적으로 무능하지 않겠다는 반면교사로서의 영향 아니면 재산을 모두 바친 ‘올인’의 모험? 궁금하다.

1899년생의 전주부 목사가 의왕으로 다시 돌아온 건 60이 넘은 1962년, 이때는 전락원의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었다. 덕장교회 홈페이지는 이때 교회가 급성장했다거나 화려한 건축물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 전주부 목사가 아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은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꼿꼿한 삶을 살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의 손자 전필립은 그 유명한(?) 평강제일교회(대성교회) 장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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