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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 [종교개혁 507주년 특집] 역사에 길이 남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조력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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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천 위클리| 작성일2024-10-22 | 조회조회수 : 2,0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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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마르틴 루터로 부터 시작된 종교개혁 507주년이다 

 

10월 31일은 종교개혁기념일이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채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인 날로서 이날을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킨다. 루터가 종교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주변에 많은 조력자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도운 위대한 조력자들은 누구였을까? 여기 소개하는 몇 사람이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순서를 붙인 것도 단순한 구분을 위한 것이지 조력의 경중에 따른 것도 아님을 밝혀둔다. [정리=조명환 기자]



1. 루터의 강력한 후원자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1463-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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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초상화(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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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의 7인 선제후 회의 삽화(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쾰른 대주교,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궁중백, 작센 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그리고 보헤미아 국왕) [사진=위키피디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1463년~1525년)는 작센의 선제후(재위 1486년~1525년)였다. 현명하기로 이름이 나서 ''현공(Wise)''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교양이 풍부하고 음악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루터가 재직했던 비텐베르크 대학을 세웠고 비텐베르크를 예술 활동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그는 열렬한 구교도였지만 마르틴 루터를 보호하고 그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겨 주고 종교 개혁을 도왔다. 그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진전된 셈이다.


그를 말할 때 항상 선제후란 말이 붙는다. 무슨 뜻인가?


선제후(라틴어: Princeps Elector 프린켑스 엘렉토르)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정하는 역할을 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선거인단’이다. 다시 말해 신성로마제국의 작위제도에서 으뜸가는 지위였다. 전통적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황제선거를 개최하여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황제를 선출할 선거권을 가진 신성로마제국 내의 영주들을 가리킨다. 위계상 신성로마제국의 봉건 제후들 가운데 왕 또는 황제 다음으로 높은 지위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가 반포한 금인칙서에 따라 7선제후 제도와 다수결제가 법적으로 확정되었다. 그 7인 선제후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작센의 프리드리히 3세였고 그는 보름스 제국회의 후에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루터를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겨주었다. 그리고 루터는 거기서 라틴어 신양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벌였다.



2. ‘개신교 사모 1호’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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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카타리나 폰 보라의 초상화[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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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에 있는 루터하우스(루터의 생가,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됨)앞에 세워진 폰 보라의 동상 옆에서의 필자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는 작센 선제후 령의 작은 도시 리펜도르프의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1499년 1월 29일 출생했다.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귀족 집안의 자녀들이 수도원에 의탁되는 관행에 의해 카타리나는 여섯 살 때 가족을 떠나 브레나의 베네딕토 수녀원학교에 보내져 그곳에서 기초적인 읽기, 쓰기와 산수를 배웠다. 열 살이 되던 1509년 수련수녀 생활을 시작하면서 라틴어와 음악을 공부하였고 수도원의 자급자족 경제를 위한 농업과 목축업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였다. 


1515년 종신서약 후 본격적인 수녀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그로부터 2년 후 루터의 종교개혁 소식을 접하게 된다. 1523년 부활절 전날 8명의 동료 수녀들과 수녀원을 탈출해 토르가우를 경유해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였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었던 수녀들은 비텐베르크 유지들의 가정에 분산해서 생활하였는데 카타리나는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집에 기거하였다. 1525년 6월 13일 그녀는 마르틴 루터와 결혼했다.


그녀는 마르틴 루터의 아내로 여섯 자녀의 부양은 물론 10여 명의 하숙생과 남편의 비텐베르크 동료들, 그리고 각지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들로 인해 많을 때는 40여 명 식객의 가계(家計)를 운영하며 루터를 내조했다.


그는 안주인의 역할만이 아니라 자녀들의 양육과 교육,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편 루터의 신앙의 동지였고 개혁운동의 동반자였다. 그런 아내를 루터는 ‘나의 주인 캐테’(mein Herr Käthe)’라고 부르며 사랑과 존경으로 대했다. 역사가들은 카타리나의 아내와 주부의 역할을 넘어선 종교개혁 동역자의 역할을 기려 그녀에게 ‘여성루터’(Lutherin)라는 존칭을 부여해왔다.


루터가 죽은 후 경제적으로 힘겹게 생활하던 53세의 그녀가 페스트를 피해 자녀들과 토르가우로 이주했다가 마차 사고로 1552년 12월 20일 생을 마감했다.



3. 루터의 ‘영원한 오른팔’ 필립 멜랑히톤(1497-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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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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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마르크트 광장엔 루터와 멜랑히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오른쪽 2개의 종탑이 있는 교회가 세인트 매리 시교회로서 루터가 설교하고 결혼했던 예배당이다 [사진=조명환 기자]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은 어릴 때부터 천재란 소리를 들었다. 그는 1509년 12세 때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해 2년 뒤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바로 2년 뒤 튀빙겐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518년 21세의 나이에 루터가 있는 비텐베르크대학 그리스어 교수로 초빙되어 루터를 만나게 되었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멜랑히톤은 루터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고 친구였다. 루터가 ‘여윈 새우’라고 부를 정도로 병약한 학자의 전형이었던 그는 신학적으로 루터에게 의존적이었다. 그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 혹은 루터의 사후에도 마음 든든한 선배를 늘 그리워하였다.


‘비텐베르크의 에라스무스’라는 별명도 갖고 있는 그는 냉철한 조직력의 소유자로서 훨씬 더 즉흥적인 루터와 구별이 되었다. 루터는 멜랑히톤의 방법론적인 신학적 재능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저술들은 장황한 말 때문에 쓸모없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였다.


이처럼 멜랑히톤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치밀하게 이론화하고 교리화 했다. 루터가 종교개혁가로서 전면에 나서서 주장하면, 멜랑히톤은 책과 글로 이를 뒷받침했다. 루터는 멜랑히톤을 가리켜 “나는 거칠고 자만하고 격렬하고 호전적이다. 나는 수많은 괴물과 악마들과 싸우라고 태어난 사람이다. 그렇기에 거친 숲을 헤치고 그루터기와 바위를 치우고 넝쿨과 가시를 잘라버려 숲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면 멜랑히톤은 부드럽고 친절하게 다가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기쁨으로 키우며 섬기는 은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루터가 ‘전쟁의 사람’이었다면 멜랑히톤은 ‘평화의 사람’이었다. 그는 탁월한 고전어 능력을 발휘하여 루터가 번역한 9월 성경을 펴내는 일에 조력했다. 1522년 9월 21일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신약성경은 초판이 3~5천여 부가 인쇄되었는데 9월에 출간되었다 하여 ‘9월 성경’이라고도 불린다.


지금도 비텐베르크의 마르크트 광장엔 루터와 멜랑히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종교개혁을 이끈 두 사람의 우정을 말해주고 있다



4. 루터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집례한 요하네스 부겐하겐(1485-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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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부겐하겐[사진=위키피디아]


요하네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은 비텐베르크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마르틴 루터의 목사였다. 1509년에 신부와 성서교사로서 서품을 받았고 1521년에 출판된 루터의 저작 ‘교회의 바벨론 유수’라는 책을 비판했다. 그러나 후에 루터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의 개인적인 고해신부로서 영적 조언자 역할을 하였고, 1525년에 루터가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할 때에는 주례 목사였다. 그리고 루터의 장례식을 집례하기도 했다.


그는 포메라니아 지역과 덴마크 지역에 종교 개혁을 소개하였다. 그의 주된 공헌은 북부 독일 지역과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루터란 교회를 조직하면서 ‘북부의 두 번째 사도’로 불리기도 했다.



5. 루터를 종교개혁 아이콘으로 만든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1472년~15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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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루카스 크라나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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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크라나흐의 유명한 ''비텐베르크 성모 시(市)교회 제단화''. 크라나흐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성례전 신학을 가시화함으로써 많은 이들을 넓고 깊은 신학의 세계로 인도했다.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는 프랑켄 지방의 크로나흐에서 태어난 루터 시대의 독일의 화가였다. 1505년 비텐베르크에 이사한 그는 커다란 아틀리에를 차리고, 여성의 나체상과 신화화(神話畵)를 많이 그렸다. 또 루터나 기타 저명인사의 초상화에도 걸작이 많고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반영하는 루터란의 가르침 즉 율법과 복음에 대한 신학적 주제를 보여주는 그림도 많이 그렸다.


1537~1544년에 걸쳐 비텐베르크 시장을 지냈던 그는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을 열렬하게 지지하였다. 만년에는 바이마르의 궁정화가로 지내다가 1553년 거기에서 운명하였다. 또 이름이 같은 그의 아들(1515~1586)도 화가로서 부친의 조수·후계자가 되어 활약하였으며 루터를 위해 많은 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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