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5주년을 맞이하며] 독일 보름스(Worms)의 종교개혁 선구자들 > 라이프 | KCMUSA

[종교개혁 505주년을 맞이하며] 독일 보름스(Worms)의 종교개혁 선구자들 > 라이프

본문 바로가기

  • 라이프

    홈 > 문화 > 라이프

    세계여행 [종교개혁 505주년을 맞이하며] 독일 보름스(Worms)의 종교개혁 선구자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크리스천 위클리| 작성일2022-10-25 | 조회조회수 : 2,020회

    본문

    9f4378ee4382da38e80902fa535c66e8_1666716794_2301.jpg
    보름스 루터광장에 있는 동상들

     

    개신교가 시작된 지 505주년이 되는 해이다. 매해 지키는 종교개혁일 10월 31일은 1517년 독일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당시 교권의 부패와 타락속에서 본질에서 멀어져가고 있던 중세교회를 향하여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즉 교회의 5대 본질로 돌아가자는 교회개혁운동을 일으킨 날이다.


    필자가 2012년 2월 초 종교개혁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독일 베를린에서 비텐베르그,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유로레일을 타고 도착한 곳이 하이델베르크에서 한 시간 떨어진 작은 소도시 보름스(Worms)였다. 이곳의 루터광장에는 종교개혁가를 상징하는 기념조형물이 있었는데 중앙에는 루터가 있고 루터를 둘러싼 네 사람의 종교개혁가들이 앉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로 이들은 루터 이전에 종교개혁가로 활동한 이탈리아의 프랑스 출신 피터 왈도(Peter Waldo, 1140-1218),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체코 보헤미아의 얀 후스(Jan Hus, 1370-1415), 이탈리아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이다.


    루터의 동상 바로 아래에는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Gott helfr mir, Amen”(제가 여기 섰나이다. 저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나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존 위클리프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교회법과 국법에 관심을 갖고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했다. 위클리프는 4세기 당시 교회의 표준성경인 라틴어 불가타(Vulgata)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로 결심하고 1382년에는 신약성서를, 2년 후인 1384년에는 구약성서를 영어로 번역했다.


    당시에는 거룩한 언어로 불리운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성경을 일반 언어로 번역하면 신성 모독죄로 여겨 사형에 처해졌다. 존 위클리프가 번역한 영어성경은 영국 전역에 퍼져나갔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롤라드파(Lollards)라고 불리웠다. 이 일로 위클리프는 3번이나 법정에 소환되고 당시 교권주의자들로부터 이단이라 선고받기에 이르게 된다. 후대 사람들은 위클리프를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고 불렀고 그의 영향력은 체코의 얀 후스에게 이르게 되었다.


    9f4378ee4382da38e80902fa535c66e8_1666717568_9218.jpg
    루터광장에 있는 루터의 동상. 보름스에서 생명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의 양심선언이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되었다


    얀 후스는 1390년 프라하대학에 입학해 대학시절 위클리프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였다. 1400년에 사제가 된 그는 1402년 설교자로 활동했던 프라하의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라틴어 대신 자신의 모국어인 체코어로 예배를 인도하기도 하기도 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많은 프라하 시민들이 베들레헴 예배당으로 몰려들었고 얀 후스는 보헤미야를 대표하는 가장 대중적인 설교자가 되었다.


    점점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얀 후스를 따르자 프라하의 대주교 츠비넥차직은 대학안의 위클리프 책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이에 분개한 후스는 “불로 진리를 태울 수는 없다. 생명이 없는 사물에 대해 분을 내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을 체코어인 거위(Husa)에 비유하며 자신은 불에 타 구워질 것이나 100년 뒤에 올 개혁자는 불에 타 죽지 않을 백조와 같은 이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후대 많은 사람들은 그 백조가 얀 후스의 종교개혁과업을 완성한 마틴 루터라고 생각했다.


    1517년 10월 말 루터는 자신이 속한 지역의 마인츠의 대주교요 브란덴부르크의 주교인 알브레히트에게 라틴어로 쓴 95개 논제(원제: 면죄부에 있다고 선언된 효력에 대한 반박)를 보내 면죄부에 대한 가르침을 수정해야 하며 면죄부를 판매하는 일은 해악된 일이므로 중단하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그는 면죄부 문제가 학문적 토론의 쟁점이 되기를 원했던 루터의 청원을 면죄부 판매를 허락한 교황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9f4378ee4382da38e80902fa535c66e8_1666717590_5672.jpg
    카를 5세 황제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루터


    1520년 12월 10일 비텐베르크 시의 엘스터 문(Elstertor)앞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루터는 교황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95개조 반박편지에는 교회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는 교서를 보내고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자신을 출교시키겠다는 교황의 파문장과 당시의 교회법령, 정적들의 저서들을 학생과 시민이 보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우게 된다. 결국 1521년 1월 4일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의 출교를 공표했다.


    1521년 초 황제 카를 5세는 보름스(Worms)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황제가 의회를 소집했을 당시 뉘른베르크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의회를 황제의 별장이 있는 보름스로 옮긴 것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루터를 출교시킨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황제에게 루터를 제국의 범법자로 선언하라고 압력을 가하게 된다. 종교법으로 출교시키고 세속법으로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범죄자로 낙인찍어 루터가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킬 수 없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황제는 루터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기 위해 루터를 의회로 불러 루터의 책을 취소하면 살려주겠다는 요청을 하게 된다. 루터는 하루의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를 받지만 그는 결국 다음날 황제와 의회 앞에서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된다.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의 양심에 거슬려 가는 것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기에 저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도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Here I stand, help me, God!; Ich stehe hier, helfe mir, Gott!)”


    보름스에서 굽히지 않은 루터의 양심선언은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결국 마틴 루터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되었고 황제도 루터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선포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루터를 추방하게 되었고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그의 선제후이며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von Sachsen)는 그들의 심복들을 시켜 마틴 루터를 비밀리에 납치하여 아이제나흐 근처의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으로 보내게 된다. 9개월 동안 루터는 작센 선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희랍어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 선구자들과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과 속의 이원론적인 구분이나 성직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길이라는 잘못된 가치를 바로 잡아주었다. 아울러 교리의 전통과 신조의 권위만을 주장하는 교권주의에서 벗어나 목숨을 건 성서번역과 반포를 통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문을 열어가야 한다는 선교적인 사명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후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독일 북부 비텐베르그를 시작으로 스위스의 쮜리히시를 중심으로 쯔빙글리(Ulrich Zwingli), 제네바시를 중심으로 칼빈(John Calvin),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John Knox), 영국의 요한 웨슬레(John Wesley)에게로 종교개혁의 불씨가 번져가게 된다. 이 가운데 제네바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고 ‘개신교의 로마’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오늘의 교회는 성직의 타락이란 비판가운데 서 있다. 중세말기 성직자의 타락가운데 나온 경구중의 하나가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Vita Clerici est evangeliuum laice)”이라는 말이다. 종교개혁 505주년을 맞이하며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한다”는 종교개혁가들의 격언을 다시 기억하며 자신의 기득권과 명예를 유지, 보존키 위해 이전투구에 참여하는 지배적 소수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예배와 교육, 친교와 봉사, 구제와 선교를 위해 올라인(All line, Online+Offline)의 현장에서 땀 흘리는 창조적인 소수(Creative minority) 즉, 이 땅에서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서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이 길은 외롭고 버거워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길이시기 때문이다.



    9f4378ee4382da38e80902fa535c66e8_1666717609_8797.jpg
    장재웅 목사

    (워싱턴 하늘비전교회)


    [워싱턴하늘교회 홈페이지=www.mdkumc.org]

    • 이 기사를 공유하세요

    KCMUSA,680 Wilshire Pl. #419, Los Angeles,CA 90005
    Tel. 213.365.9188 E-mail: kcmusa@kcmusa.org
    Copyright ⓒ 2003-2020 KCMUSA.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