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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여행 [CA] 미션 샌루이스 오비스포... 곰의 계곡에 지어진 미션과 기역자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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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KCMUSA| 작성일2022-10-19 | 조회조회수 : 1,15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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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션 샌루이스 오비스포 드 톨로사(Mission San Luis Obispo de Tolosa)는 주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 신부가 1772년 9월 1일에 세운 미션으로, 그가 캘리포니아 해안가에 세운 21개 미션 중 다섯 번째 교회이다. 


    프랑스 툴루즈의 주교인 세인트루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루이는 1274년 나폴리 왕 샤를(Charles)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패한 그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루이와 그의 형은 인질로 스페인으로 보내졌다. 형제는 스페인에서 7년을 지내면서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영향을 받았다. 스페인에서 석방된 후 루이는 나폴리 왕위 상속권을 포기하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합류했다. 도시의 빈곤과 질병으로 23세 젊은 나이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그는 후에 툴루즈의 주교로 봉헌되었다. 


    “포톨라 원정대”를 이끈 스페인 군인 가스파 드 포툴라(Gaspar de Portola)는 1769년 9월 7~8일 몬테레이 만을 발견하기 위해 산 루이스 오비스포 지역을 여행했다. 원정대의 일기장을 보면 군인들은 곰이 많았기 때문에 이 지역을 “야노 드 로스 오소스(llano de los Osos)”, 곧 “그리즐리 곰의 평원(Bear Plain)”이라고 불렀다. 그 이후로는 “곰의 계곡(La Canada de Los Osos)”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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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루이스 오비스포가 "곰의 계곡"이라는 세웠는지 교회 앞 분수에 곰들의 동상이 있다


    1770년 세라 신부는 몬테레이에 캘리포니아의 두 번째 미션인 샌 칼로스 보로메오(San Carlos Borromeo)를 세웠는데, 이듬해 미션을 카멜(Carmel)로 이전했다. 이후 스페인으로부터의 보급품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은 기아에 직면했다. 1772년 여름, 이 지역 이름이 곰의 계곡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사냥 원정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선교사, 군인 및 새 신자들(세례받은 원주민)을 구제하기 위해 25마리가 넘는 노새에 말린 곰 고기와 씨앗들이 도착했다. 고기의 일부는 식용 종자와 교환되기도 했다. 


    그 후 세라 신부는 “곰의 계곡”이 다섯 번째 미션을 세울 이상적인 장소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 지역은 식량과 물이 풍부했고 기후는 매우 온화했으며 현지 추마시(Chumash) 인디언들은 매우 친절했다. 군인, 노새, 미션 용품을 실은 동물들과 함께 세라 신부는 곰의 계곡으로 여행을 떠났다. 1772년 9월 1일 세라 신부는 샌루이스 크릭(San Luis Creek) 근처에 십자가를 세우고 첫 미사를 집전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세라 신부는 멕시코에서 얄타 캘리포니아로 올라오면서 1769년 샌디에이고 만에 세운 그의 첫 교회인 미션 바실리카 샌디에이고 드 알칼라(Mission San Diego de Alcalá)를 위해서 남쪽으로 떠났다. 


    세라 신부 대신에 미션 건축이라는 어려운 임무를 맡은 호세 카발러(Jose Cavaller) 신부는 5명의 군인과 2명의 초보자, 그리고 추마시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미션을 완성했다. 교회와 사제의 거주지인 수도원 건물은 1794년에 지어졌다. 초기에는 창고, 독신 여성을 위한 거주지, 군인 막사 및 공장과 같은 많은 다른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미션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위한 땅도 가지고 있었다. 사제, 원주민 및 군인의 전체 공동체는 자신의 생계를 위한 물품을 생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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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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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션 뮤지엄에 복원해 놓은 수도사 책상


    1810년 멕시코 독립 전쟁이 발발했을 때 모든 캘리포니아 미션은 사실상 자급자족해야 했다. 스페인에서 자금을 거의 지원받지 못한 채 미션의 번영으로 몇 년 동안 건축을 진행할 수 있었다. 1810~1820년 사이에 원주민 오두막, 맷돌 바퀴, 곡물 창고가 건설되었다.


    1818년 이후 미션의 번영은 쇠퇴하기 시작, 1840년대에는 건물들이 무너지고 있었고 재건할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다. 1830년에 작성된 정부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질(Gil)라는 이름의 사제는 “병원과 새 신자들이 살고 있는 마을 일부가 폐허가 되었고, 마을의 다른 집들도 폐허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무너질 것 같아서 교회의 현관 쪽도 철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1832년의 보고서에서 그는 "미션 구조물은 보수할 인력이 부족하여 점점 더 쇠락하고 있다. 종탑은 비로 인해 무너졌으므로 우리는 또 다른 석조물을 지었다"면서 암울한 보고를 했다.


    멕시코가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직후 멕시코 정부는 미션을 사유화했다. 이는 사제들이 더 이상 미션을 관리할 수 없으며, 미션이 가진 땅들이 종종 매각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피오 피코(Pio Pico) 주지사는 1845년 샌루이스 오비스포 미션을 존 윌슨(John Wilson) 대령에게 510달러에 매각했다. 이 기간 미션은 당국에서 필요할 때 사용되는 공공건물이 되었다. 미션의 부속 건물들은 학교와 감옥, 첫 번째 카운티 법원이 되었다.


    1850년에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일부가 된 후, 캘리포니아의 초대 주교인 조셉 알레마니(Joseph Alemany)는 미션 토지의 일부를 교회에 돌려줄 것을 정부에 탄원했다. 1930년대에 존 해넷(John Harnett) 신부에 의해 건물들은 초기 미션 스타일로 복원되었다. 


    이 미션의 특이점은 예배당이 미션 중 유일하게 기역자로 지어졌다는 점이다. 마치 한국의 남녀칠세부동석 시절의 교회들처럼 기역자로 나뉘어서 한쪽에서 다른 쪽 회중을 바라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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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역자 예배당이라서 제단 모습이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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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역자 제단의 한쪽 회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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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바로 앞에 있는 미션 플라자의 Creek Walk(위와 아래), 트레일이 길어서 충분한 걷기 운동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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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건너편 길가 골목에 있는 풍선껌 길(Bubblegum Alley)


    주소: 751 Palm Street 

    San Luis Obispo, CA 93401

    연락처: (805) 781-8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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