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롱코 헨리는 개다...'파워 오브 도그' -개의 권력을 가져 본들 > 영화 | KCMUSA

브롱코 헨리는 개다...'파워 오브 도그' -개의 권력을 가져 본들 > 영화

본문 바로가기

  • 영화

    홈 > 문화 > 영화

    브롱코 헨리는 개다...'파워 오브 도그' -개의 권력을 가져 본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NEWS M| 작성일2022-01-03 | 조회조회수 : 1,541회

    본문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법이라는 유명 영화 평론가의 칼럼도 있지만 영화는 보고 싶은 대로 보면 된다. 어떤 이는 이야기의 전개에 관심을 갖고 어떤 이는 배우의 연기에 몰입한다. 반전과 액션, 배경과 가구의 배치를 통해 설명하는 미장센과 스토리 전개와는 상관없는 장면이나 도구를 배치해 ‘영화 좀 볼 줄 아는’ 관객들을 속이는 맥거핀 효과 등 영화의 흥미를 자아내는 요소는 많은데 평론가라고 해서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방법을 정형화 시켜줄 수는 없다.


    나는 영화에서 철학적 종교적 함의를 읽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함의라고 했다. 대놓고 철학과 특정 종교를 가르쳐 주는 영화가 아니라 숨겨진 의미를 찾는 일은 어릴 적 소풍에서의 보물찾기만큼 재밌다. 다른 이에게 영화보는 법을 모른다고 탓할 수 없듯이 영화를 왜 그렇게 어렵게 보냐고 비난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오랜만에 묵직한 철학 영화를 만났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 감독 제인 캠피온)'다. 이 여성 감독은 남성 중심으로 구성된 정신분석학의 구조를 무너 뜨린다.


    1925년 몬타나 주에서 거대한 목장을 25년째 운영하는 필과 조지 형제는 극 초반부터 브롱코 헨리라는 이름을 언급한다. 이 형제들에게 목장을 물려준 사람 이름 같기도 하고, 어릴 때 각종 사냥법을 전수해 준 동네의 롤 모델 같기도 하다. 이들 형제의 라스트 네임이 버뱅크이니 아버지는 분명 아니다. 이후 브롱코 헨리의 이름은 여러 차례 반복된다.


    형제는 나이가 차도록 독신 상태로 있으며 저택에 살면서도 같은 방을 쓴다. 소를 팔러 마을에 나간 형제는 로즈의 식당에서 ‘여성적 감수성’(1925년 기준으로 그렇다는 말이다)을 지닌 로즈의 아들 피터를 만나는데 거친 성격의 필은 엄마의 식당일을 돕는 10대 후반의 피터를 여자 아이 같다고 놀린다.


    화가 난 아들이 홀라후프로 분노를 달래는 모습을 본 엄마 로즈는 눈물을 흘린다. 아들이 놀림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 시절 동네 아저씨들에게서는 흔한 장난이었을 텐데 난데없이 로즈가 우는 장면이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다. 연출을 탓하기 전에 눈물의 사연을 추리해 보는 것도 영화를 우호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습관이다.


    로즈는 남편을 자살로 잃었다. 그 장면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어린 아들이었다. 비석에  닥터라는 호칭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의사였다. 아들은 아버지의 묘소를 찾을 때 마다 손수 만든 종이 꽃을 비석 앞에 둔다. 아마도 로즈의 남편은 동성애적 성향을 갖고 있거나 여성 취향의 남성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보아 그게 자살의 이유였을 수도 있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 불안해 하는 엄마의 눈물이었다.


    형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던 조지와 로즈는 가까와 지고 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결혼해서 형제의 목장으로 들어온다. 들어오는 날부터 형은 로즈에게 돈을 노리고 들어온 꽃뱀이라고 비난하며 피터도 계속 모욕한다.


    필에게 있어서 조지는 거울 속 자아였다. 라캉의 거울 단계 즉 상상계에서 보이는 거울 속 자기 이미지다. 유아기의 주체는 이 이미지를 대상화 하면서 자신과 주체의 분리를 겪는다. 상상계를 거치면 상징계로 진입하는데 상징계는 아버지 또는 신이 지배하는,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세계다.


    필은 이른바 ‘남성성’이라는 상징계 질서에 한 발을 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거기에 진입하기를 두려워하는 거울단계의 유아다. 그걸 숨기기 위해 끊임없이 남성성을 강조하면서 로즈와 피터를 괴롭히지만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규정하는 ‘진짜 남자’는 되지 못했다. 그는 브롱코 헨리라는 인물을 생각하면서 자위하고 벌거 벗은채로 자신의 가죽만 느낄 뿐이다. 필은 스스로 엘크 잡는 법을 깨우치고, 이 거대한 목장을 혼자서 일궜는지도 모른다. 거기서 동생은 묵묵히 형을 도왔다. 필은 동생을 보면서 거울속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동시에 자신 안에 든 여성성(남성이 되기 두려워하는)이 투사된 조지를 보았다. 브롱코 헨리를 만났다면 조지도 같은 경험을 했을텐데 조지는 브롱코 헨리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듣기만 한다. 형이 앓고 있는 신경증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일까?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브롱코 헨리’를 형제에게 막대한 부를 물려 준 ‘어떤 부자’ 정도로만 설명하는데 이는 브롱코 헨리의 의미를 놓친 것이다. 그는 필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아버지, 또는 남성성의 상징이다. 아들들이 그렇게 부를 이루었으면(그것이 제 3자에게 유산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1920년대 미국에서 ‘진짜’ 부모를 모시고 살 법도 한데 영화 후반부 필의 장례식에 나타난 필의 부모는 심하게 슬퍼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육신의 아버지는 상징적 아버지로서의 능력을 거세당했고 거세되지 않은 아버지가 필요했던 필은 브롱코 헨리라는 가상의 인물을 상정한다. 남근은 아버지의 권력의 근원이고 아들은 그 남근으로부터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쉽게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에 빠져든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기본 구조다.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지켜야 할 만큼 진짜 아버지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 정확하게 말해 ‘남근’이 그리운 필은 지켜야 할 어머니가 없는 가상의 인물 브롱코 헨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필이 여성 또는 여성성을 멀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로즈와 짝을 이룬 조지가 자신의 거울 속에서 사라지니 필은 피터를 대신 그의 거울 속 인물로 상정한다. 이를 눈치 챈 로즈는 아들이 필과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필은 피터에게 소 가죽으로 밧줄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가까워 진다.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낚시나 사냥을 가르쳐주는 훈훈한 장면같지만 감독은 그렇게 영화를 전개하지 않는다. 동물의 벗겨진 가죽은 남성이라는 껍질만 남은 필의 분신이다. 그는 원주민들이 와서 가죽을 팔라고 해도 팔지 않는다. 그의 분신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밧줄을 만들고 그게 다른 이를 구원하지 못하게끔 남은 가죽은 태워 버린다. 그 밧줄을 마주 잡은 이를 통해 두려움을 떨치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고 싶은데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는 밧줄 만드는데 흥미를 보이는 피터가 있어서 고마울 뿐이다.


    e92da55b1227728d3e7cdce80aa8a04e_1641228475_0316.png
    필과 피터가 개 입 모양의 산을 바라보고 있다. 필은 자기만 볼 수 있었던 그 형상을 피터도 봤다고 하자 놀라서 산 대신 피터를 바라본다. 그러나 실제로 피터는 그 형상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목장 앞에 있는 산의 계곡에는 어떤 동물이 살고 있어서 밤마다 울음 소리를 낸다. 겨우 100여 년 전 사람들이 그 소리가 계곡과 바람이 맞물려 내는 소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터, 그러나 필은 “본 사람이 없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서도 계속 산 속 동물에 집착한다.


    라캉의 이론을 차용하면 울부 짖는 산 동물은 ‘텅 빈’ 실재계를 막고 있는 장벽이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는 진리 그 자체의 실재계를 필은 향유하고 싶지만 상징계에도 진입 못한 필에게 그것은 부정하고 싶은 세계이기도 하다.


    실재계란 모든 이데올로기나 종교도 작동하지 않는 순수한 세계다.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슬라보예 지젝은 ‘매트릭스’의 유명한 대사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제목의 책에서 종교를 비롯한 모든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고, 월가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가 붕괴되는 실재 세계가 가능할까를 묻고 있다. 다른 종교를 악마화 하고 내 종교를 천사화 하는 것이 종교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데 그게 사라지면 죽음의 공포가 다가 올 것이다. 정말 우리는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있을까? 그 끝자락이라도 잡고 있어야 살 것같으니 그것의 부정은 죽음의 충동 같은 것이다. 실재계와 죽음 충동은 이렇게 연결된다.


    필은 이 세계의 탈출과 그 세계로의 진입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다.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 죽음만큼 두려운 필은 무서운 울음 소리, 거대한 개의 입모양을 상상해서 스스로 진입을 주저하게 만든다. 산은 계곡이 만들어 낸 개의 입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이미지를 알아 챈 사람은 많지 않다. 유명 관광지에 어떤 동물 형상을 한 바위에 동물이름을 붙여 놓았더라도 그 동물의 형상을 찾아내기 어려운 경우처럼 말이다. 이처럼 개의 형상은 필만 알고 있었다. 어느날 피터도 그게 보인다고 하자 필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걸 계기로 피터에 대한 신뢰는 깊어졌다.


    피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산 속에서 탄저병으로 죽은 동물의 가죽을 벗겨와 그 가죽으로 밧줄을 함께 만들자고 필에게 이야기한다. 로즈가 필의 허락없이 가죽을 다 팔아버려 자신의 껍질이자 동시에 자신을 구원해줄 밧줄의 부재로 불안해 하는 필에게는 아직 완전 건조되지 않은 가죽이라도 반가왔다. 피터는 장갑을 끼고 있었고 맨손으로 가죽을 만지던 필은 탄저균에 감염되어 죽는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시종 쫓고 쫓기는 싸움을 벌이다가 막판에 허무하게 죽어 버린 주인공 ‘루엘린 모스’와 비슷하다.


    장례식에 불참한 피터는 시편 22:20을 읽는다.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개역)


    Deliver my soul from the sword; my darling from the power of the dog. (KJV)


    피터에게 필은 고착된 남성성을 자신에게 전수하려는 폭력적 인물이었다. 그 껍질만 남은 남성성이 감히 어머니와 자신을 떼어 놓으려고 했다. 겉보기에는 필과 피터 사이가 개선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피터에게 그것은 옥죄어 오는 죽음의 공포였다. 피터는 자신과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개’를 죽여야 했다. 피터는 실제로 계곡의 개형상을 보지 못했고 개형상을 보고 있는 필을 보았다. 필이 자신의 '증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게 패착이었다.


    피터에게도 필과 조지 형제에게도 아버지가 권력이 아니었다. 그게 두려운 필은 가짜 아버지 브롱코 헨리를 만들어 내었고 피터는 어머니에게서 권력 대신 사랑을 발견했다. 피터에게 처음부터 남성성은 이데올로기 축에도 못 끼었다. 


    피터는 필이 탄저병으로 죽게끔 설계함으로써 그를 ‘거세’했다. 브롱코 헨리는 필의 '환상적 남성성' 즉 계곡에서 울부짖는 개였다. 세월이 지난 뒤에 조지 마저 죽고 피터가 목장을 계승하면 피터는 새로운 브롱크 헨리를 창조해서 주변에다 말할 것이다. “브롱크 헨리가 이 목장을 위협해서 내가 물리쳤다”고. 아니면 여성 이름의 누군가를 창조해서 그를 목장의 전설로 삼을 수도 있다.


    차별과 혐오의 시대, 우리는 ‘개’같은 브롱코 헨리를 창조해 내서 그것으로 우리의 차별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권력(Power)’이라고 믿는다. 기껏 그것은 ‘개의 권력’일 뿐인데 말이다.


    껍질만 남은 필이 껍질로 만든 밧줄에서 구원을 찾듯이 현대인은 ‘남성’, ‘백인 ‘, ‘연장자’, ‘이성애자’가 뭐 그리 대단한 생명줄이라고 끊임없이 죽음에 이르는 밧줄을 만들고 있다.  


    김기대 기자 


    * 글쓴이는 로스앤젤레스 소재 평화의 교회 목사로 있으며 인문학 모임인 평화서당을 운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감독도 모르는 영화 속 종교 이야기(모시는 사람들)',  '교회는 언제쯤 너그러워질까 (삼인)', '예배당 옆 영화관(동연)'이 있다. 


    KCMUSA,680 Wilshire Pl. #419, Los Angeles,CA 90005
    Tel. 213.365.9188 E-mail: kcmusa@kcmusa.org
    Copyright ⓒ 2003-2020 KCMUSA.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