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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피 감독의 ‘마리 퀴리’ - 위인전을 다루는 영화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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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한국기독신문| 작성일2020-12-20 | 조회조회수 : 1,73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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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 퀴리 포스터


    어느 사회에서나 위인전은 두 가지의 특성을 갖는다. 하나는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교육적 성격을 고려하여 사회의 모범이 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무흠한 인물을 위인전에 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전기작가는 편집과정에서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업적 위주로 기술한 결과 문제는 없고 위대함만을 부각하여 인물을 재창조하는 셈이다.


    위인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위인전을 펴낸 사회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반공이 사회의 중요한 구호로 등장할 때는 6.25의 영웅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펴낸 세계의 위인전집에 올랐는가 하면, 수출증대에 나라의 모든 것을 걸었을 때는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아동을 위한 위인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영화도 위인을 다루는 방식이 책과 다르지 않다. 21세기에 퀴리 부인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 과학의 가치와 여성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교육적이며 시대적인 상황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업영화로서 관객을 모아야 하고 책과 경쟁해야 하는 구도가 명확해지면 영화는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장르(genre)의 특성을 갖는 일이다. 장르란 일종의 영화의 분류법으로 비슷한 내용이나 형식에 따라 영화들을 묶어 영화의 특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역사적 위인들의 생을 조명하는 영화들은 드라마라는 장르 안에서 이해되며 주인공이 경험하는 사건을 다루는 가운데 인물의 성격을 조명하는 방식을 취하곤 한다. 


    이 과정에서 장르영화는 ‘반복과 변형’이라는 특유의 전개방식을 보여준다. 즉 관객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위인에 대한 내용을 영화는 ‘반복’한다. 이것은 관객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순신 장군의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임진왜란의 용맹스럽고 왜군을 물리치는 호쾌한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온다는 사실을 상업영화는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관객이 알고 있는 것만을 묘사하는 영화는 새로울 게 없다는 판정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장르 영화는 ‘변형’이라는 전개방식을 따른다. ‘변형’은 관객이 미처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다룸으로써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방식이다. 관객은 뻔할 것 같은 영화로부터 새롭게 기대감을 갖게 되며 앞으로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호기심을 머금은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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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는 알지 못했던 마리 퀴리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또 다른 위인 ‘마리 퀴리(Marie Skłodowska-Curie)’는 어떨까? 흔히 ‘퀴리 부인’으로 우리의 귀에 익숙하고 라듐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여성 과학자가 우리가 기억하는 위인전의 내용이지만, 그녀가 남성 중심의 학계에서 여성으로 치열하게 싸우는 한편으로 남자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없었다.


    이란 출신의 여성 감독 마르잔 사트라피 감독의 <마리 퀴리>(Radioactive, 2019)는 위인전이 미처 언급하지 못한 퀴리 부인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고 있는 영화를 연출함으로써 ‘반복과 변형’의 장르적 특성을 영화에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위인전에서는 알지 못했던 퀴리 부인의 이미지는 세 가지의 ‘변형’을 이루며 관객의 예측을 넘나든다.


    첫째는 자신의 일에 관한한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임을 영화는 제시했다. 마리 퀴리(로자먼드 파이크)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혈기를 부리는 모습은 다소 당황스럽다. 남성 중심의 위원들 앞에서 다소곳하게 앉아 있어야만 우리가 상상한 퀴리 부인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라면 남성들과 거침없이 맞붙는 투지는 위인전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모든 분야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시절임을 감안 한다면 혈기를 부리는 여성 과학자의 탄생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도 얼마간의 책임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리 퀴리는 연구실과 연구결과물을 독점하던 남성들에 대해 늘 경계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1903년 자신의 연구 동료이자 남편인 피에르 퀴리(샘 라일리)와 공동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직접 스웨덴에 가서 상을 받지 못하고 수상소감 또한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녀는 몹시 분노한다.


    둘째는 우리가 아는 마리 퀴리가 있기까지 남편 피에르 퀴리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시킨 것도 영화가 제시한 새로운 점이었다. 연구실에서 쫓겨난 마리를 위해 새로운 연구실을 마련해주며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운 피에르가 없었다면 과연 퀴리 부인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사랑의 동반자로서 결혼하고 늘 마리 옆에서 함께했던 남편 피에르의 존재는 마리의 내면세계에 안정감과 사랑에 대한 충족을 가져옴으로써 위대한 여성 과학자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남편 피에르가 마차에 치여 죽은 후 마리 퀴리가 남편의 동료이자 연구원이었던 남성과 자신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는 일은 아마도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만든 일이었다. 퀴리 부인의 어린 두 아이가 아빠 대신 낯선 남자와 침대에 함께 있는 엄마를 열린 문 사이로 지켜보는 장면은 정숙한 퀴리 부인의 이미지만을 갖고 있었던 관객의 예상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말기 때문이다. 유부남 연구원과 밀회를 즐겼지만 이내 그 아내로부터 욕을 들어야만 이 위대한 여성 과학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결국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개방적인 성의식을 가진 관객이라면 이 또한 마리 퀴리의 거침없는 성격과 성에 대한 주체적인 행동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남편이 죽은 후 사랑이 필요했다는 마담 퀴리의 고백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 솔직하고 담대한 현대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마리 퀴리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인이라기 보다는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서 묘사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일찍이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 성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밧세바와 같은 유부녀와 정을 통했던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의 결과일 뿐이다. 다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51:1)라며 회개의 기도를 한 반면 마리 퀴리는 기독교인이 아니란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차이는 영원이라는 간격을 벌릴 수 있지만 말이다.


    신앙없는 과학의 미래


    영화는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되지 못한 과학자의 삶과 연구결과물이 가져올 허무함과 비극을 제시한다.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가 죽은 후 정신적 혼란을 경험하며 그렇게도 강하게 자신을 떠받치고 있던 과학으로부터 이탈하는 경향도 보였다. 마리 퀴리는 죽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영매를 찾아 나선다. 남편의 손에 이끌리어 갔던 심령술 모임에서 영매는 베토벤의 혼령을 자신의 몸속으로 불러내어 피아노 연주를 했었다. 죽은 남편의 영혼을 불러내어 대화하려는 마리 퀴리의 행동은 결국 남편에 대한 진한 사랑과 더불어 아무리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라도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얼마든지 사이비 심령술에도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병원 복도에서 이동 침대 위에서 지나간 자신의 삶을 떠올리는 동일한 장면으로 시작과 끝을 맺는다. 다만 끝맺음 부분에서 마리 퀴리는 자신의 방사능 연구가 가져올 미래의 방사능 유출과 관련된 비극적 사건의 예시를 함께 떠올린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투하와 1961년 네바다 사막에서의 공개된 핵실험, 그리고 가장 최근에 있었던 1986년 체르노빌 원전폭발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마리 퀴리 사후에 벌어진 핵과 방사능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녀의 위대한 연구와 발견이 가져다 준 비극의 열매였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은 8만 명을 즉사시켰고, 방사선 피폭과 관련된 질병과 부상으로 14만 명이 이후에 죽었다. 인구 35만 명의 히로시마 시민 가운데 22만 명이 사라진 것이다. 네바다 사막의 핵실험장은 구경꾼을 불러 모으는 관광상품이 되었고,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로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망한 사람이 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미국의 일간지 USA 투데이는 보도했다.


    마리 퀴리는 자신의 연구업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부릅니다. 방사능”. 이 영화의 원제목은 ‘방사능(Radioactive)’이다. 열정있는 과학자가 발견한 이 수고의 결과는 인류를 구원했는가? 아니면 파멸로 이끌고 있는가? 마리 퀴리는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과학을 볼 때마다 물가에 뛰어노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과 같은 심정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과학자들에게는 다윗의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강진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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