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21세기 초 미국에 왕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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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관통하는 반복적인 가르침은 “여호와 하나님은 왕”이라는 고백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면서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1)라며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다니엘서에는 또한 느브갓네살 왕이 권력을 상실했다 복귀한 기이한 체험 이후, 하나님은 찬양하고 경배할 “하늘의 왕”(단 4:37)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인정은 왕뿐 아니라 선지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뵈었다”(사 6:5)고 기술합니다. 스바냐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습 3:15)라는 고백을 남깁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왕들을 세우며 폐하는, 즉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이”(단 4:17, 25, 32, 34)라고 적습니다.
신약에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왕으로 여기는 고백은 계속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권자로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딤전 6:15)라 고백합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요 1:49)으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계 17:14, 19:16)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단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고, 세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지고성’(至高性, supremacy)을 드러내는 중대한 고백입니다.
서구의 역사를 지탱해오던 세계관 속에서 하나님은 오랫동안 왕이셨습니다. 문화의 중심에는 왕이신 하나님이 좌정하셨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올수록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이 방향성이 점차 침식되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의 후반부에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는 말씀이 반복되듯이, 이 시대는 공동의 예지(叡智),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이 사라진 때입니다.
그 결과 이 시대의 지배적인 세계관은 무신론이 되었습니다. 절대자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제약 없는 이성의 힘은 해방의 징표요, 부담스러운 신적 명령을 해체하는 것이 자유를 향한 지름길이라 간주합니다. 계몽주의 이후의 이성은 그러므로 의심과 불신의 패러다임을 따라 발전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세계관을 주조한 기념비적 거장은 누구보다도 생물학의 찰스 다윈(1809-1882)입니다. 그는 진화론적 가설을 주장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설계와 창조를 말하는 성경 계시에 대한 해석을 거부한 것입니다. 창조의 신적 지혜를 담은 계시와 상징의 해석학은 ‘우연과 장구한 시간’으로 생명을 설명하는 진화론, 곧 ‘성경의 비신화화’로 대치됐습니다.
높으신 하나님과 그의 영원하신 말씀을 거부하는 자연주의적 가설은 인접 학문으로 퍼져 세속화를 이루고, 점차 수많은 이신론적, 불가지론적, 무신론적 지성인을 양산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이러한 대표적인 “의심의 해석학”으로 세상을 재해석한 지식인이 유물론적 경제학의 마르크스(1818-1883), 무신론적 철학자 니체(1844-1900) 그리고 심리학 분야의 프로이트(1856-1939)라고 그의 책, 『해석학과 인문사회과학』(1981)에서 소개합니다.
마약, 떼강도, 폭력, 가정파괴, 동성애와 부정선거가 펼쳐지는 미국이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지존하신 왕의 종말적 개입과 두려운 심판의 재림이 있기 전, 영원한 진리에 기반한 패러다임을 세속적 담론의 운동장에 던질 21세기의 칼 바르트가 필요합니다. 21세기의 루터와 캘빈, 그리고 윌리암 윌버포스와 아브라함 카이퍼가 필요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충만한 뒤에, 주님의 재림을 보면 좋겠습니다.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 KCMUSA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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