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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 이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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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작성일2023-09-05 | 조회조회수 : 5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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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전화기 좀 줘 봐.” 여름 방학을 맞아 집에 와 있던 딸이 제 전화기를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말만 부탁이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 전화기는 어느새 딸아이의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딸아이는 제 전화기를 한참 동안 이리저리 만지더니 제 전화기에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 수백 장을 담아 놓았습니다.


    첫째인 오빠에 비해 자기는 어릴 적 사진이 없다고 투덜댔는데,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담긴 CD를 어디선가 찾았나 봅니다. 컴퓨터를 가지고 밤새워 씨름하더니 어린 시절 사진을 찾아 자기 컴퓨터와 전화기에는 물론, 제 전화기에까지 넣고는 보라고 했습니다. 


    사진 속에는 세 살짜리 예쁜 딸아이가 주인공이었습니다. 딸아이는 부활주일이라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교회 마당에 서 있었습니다. 유치원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친구 생일파티에 가서 신나게 놀고 있었습니다. 


    “너 이때 생각나니?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하도 울어서 첫날은 그냥 돌아왔잖아.” “아니 생각 안 나는데.” 저에게는 또렷한 기억인데, 딸아이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딱 잡아 떼었습니다. 딸아이는 명백한 증거가 사진 속에 남아 있음에도 가족이 함께 여행 갔던 곳도, 피아노 배우던 것도, 심지어는 어릴 때 살았던 집도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딸아이는 사진에 담긴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사진을 보면서 저는 딸과 함께 오랜만에 추억이라는 바다를 가르며 과거를 지나 현재로 멋진 항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 딸도 사진을 보면서 자신도 몰랐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라워했습니다. 제게만 있던 기억이 사진을 통해 딸아이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8월 12일 토요일 오전에도 기억을 잇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20여 명의 교우들과 함께 한인타운 인근에 있는 로즈데일 공원묘지를 찾았습니다. 조선 선교의 문을 연 로버트 맥클레이 선교사님과 우리 교회를 설립한 플로렌스 셔먼 선교사의 묘를 찾아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공원묘지에서 만난 두 분 선교사님의 낡은 묘비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서 있었고, 한여름의 뙤약볕을 견디느라 누렇게 타버린 잔디는 찾는 이 없어 외로움에 사무친 마음처럼 보였습니다. 


    “이 길을 수도 없이 지났는데, 여기는 처음 들어와 봐요” 


    그날 로즈데일 공원묘지를 찾은 교우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었습니다. 


    “한인타운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이분들이 계신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두 분 선교사님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제가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자, 교우들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그동안 몰랐던 우리 교회와 한국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알려주어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준비한 꽃바구니 하나씩을 놓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몇 년에 한 번 찾아와서 잠시 들렀다 가는 마음이 편치도 않았습니다. 조선에 선교사로 나갔다가 병에 걸린 남편과 함께 돌아와서 남편이 먼저 떠나보내고, 조선 사람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어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로스앤젤레스에 온 유학생들과 노동자들을 돌보며 교회를 시작한 플로렌스 셔먼 선교사의 헌신을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중국을 거쳐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던 중 조선에 들어가 고종 황제로부터 학교와 병원을 시작해도 좋다는 선교 윤허를 받아내어 한국 선교의 문을 연 로버트 맥클레이 선교사의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분들을 잊고 살았습니다. 한인 타운에서 채 5분도 안 되는 곳에 계신 그분들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찾았지만, 그분들은 우리를 너그러이 맞아 주셨습니다. 두 분의 선교사님은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쓸쓸한 공원묘지에 묻혀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100여 년 전 조선과 LA에 온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 받았다는 영광에 묻혀 계셨습니다. 


    두 분 선교사님의 묘소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데 제 마음이 감사와 은혜로 가득했습니다. 제 마음을 채운 감사와 은혜는 두 분 선교사님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 오신 교우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공원묘지에는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신 분들도 오셨지만, 최근에 교회에 오신 여러 명의 교우도 참석하셨습니다. 이분들을 통해서 우리의 소중한 기억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감사했습니다. 아름다운 기억이 이어질 때, 그 기억은 전통이 되고 역사가 됩니다. 신앙이라는 소중한 기억을 이어가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창민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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