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훈의 書架멍] 내가 즐기는 멍 때리기 1-1
페이지 정보
본문

내가 요즘 즐기는 건 멍 때리기다. 그리고 멍을 때릴 때면 나는 언제나 아주 행복하다. 사전에 따르면 “멍”이란 “얼 또는 넋이 빠진”, 예를 들어 “멍 하니” 같은 상태를 말한다. 사실 “멍”이란 단어는 매우 자주 그리고 여러 뜻으로도 쓰이는데, 위에서 언급한 “멍” 말고, 맞거나 부딪혀서 피부 속에 퍼렇게 맺힌 피를 말한다. 또 딴 뜻은 개가 짖는 소리 “멍”, 그리고 將棋에서 상대편의 궁을 잡는 수, 장군을 부르면 그걸 막아내는 수 또는 말을 “멍군”이라 부른다.
더 재미있는 건 “멍”으로 끝을 맺는 단어가 굉장히 많다는 것 - 개구멍, 개미 구멍, 귓구멍, 목구멍, 문구멍, 땀구멍, 똥구멍, 바늘구멍, 빠져나갈 구멍, 솟아날 구멍, 숨구멍, 쥐구멍, 콧구멍, 창구멍, 혼 구멍…
보통 멍을 때릴 때에는 아무 생각을 하지않지만 실제로는 온갖 상상을 펼치기 마련이어서 상상이 깊어졌을 때 발생하는 일종의 최면 상태로 빨려 들기도 한다. 해서 혹자는 멍 때리기가 뇌의 창의력과 수행능력에 꽤 큰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다른 사람은 항상 뭔가를 해야만 하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뇌를 비집중상태로 전환시켜 주는 행위, on-line life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잠시나마 off-line 상태를 만들어 탈출구 역할을 해준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멍 때리기는 종류도 많아서 흘러가는 물이나 바다를 쳐다보는 물멍,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는 불멍,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를 쳐다보는 비멍, 달 쳐다보는 달멍, 우거진 산을 바라보는 산멍…종류도 많다.
내가 즐기는 멍 때리기는 책과 음반으로 가득 찬 내 書架를 그냥, 멍하니 쳐다보는 書架멍이다. 내가 서가멍을 때리는 것은 흔히 골프를 치고 난 다음 사우나에 이어 배를 한껏 채우고 나서 내 서재에 아주 편하게 앉은 다음 진행되는데, 그럴 때면 나는 의례 드라마의 음악감독처럼 멍 때리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세심하게 골라 그걸 틀면서 시작한다.
내가 흔히 선택하는 곡들은 Franz Liszt가 피아노 곡으로 편곡한 Schubert의 여러 가곡(Lieder)들이나, 역시 Franz Liszt가 피아노 곡으로 편곡한 Beethoven’s 의 여러 symphonies(교향곡들)로 조용하면서도 음악적으로는 매우 자극적인 곡들이다.
서가에 가지런히 진열된 책과 음반 여기 저기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노라면 스쳐가는 생각들이 참 많다. 내 눈에 띈 책, 그 책을 샀을 때의 나, 그 때 내가 살던 곳, 그때 내 마음가짐, 가족, 주변, 직장과 사회 분위기, 내 부모, 형제자매, 친구들…. 이리 저리 얽힌 이야기들이 거침없이 펼쳐지는데 그럴 때면 나는 말할 수 없이 짠한 감성에 빠진다.
한창 때 내 집 여기저기는 주체하기 힘들만큼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지만 내 전공이던 경영학 분야 신간 서적 750권을 한 경영대학원에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대대적 정리를 해서 이제는 모든 책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게다가 은퇴하면서, 나와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에 새로 사대는 책이 많이 줄어들어서 이제 책 관리는 수월하다.
서가를 쳐다보면 내가 살아온 흔적과 관심의 폭이 고대로 반영되고 있는데, 내 서재가 시작된 건 1970년로, 내 서가 책들을 분야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불란서 혁명에 대한 책, 歷史에 대한 책, 傳記類…
-神에 관한 책, 聖經이라는 책의 형성, 발전, 변화 과정을 포함한 성경에 관한 책들…
-책에 관한 책들; 책, 저자, 출판사, 책방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룬 책들…
-여행에 대한 책들; 내가 가본 곳, 내가 가보고 싶은 곳, 여행기의 고전, 전설적 여행가들의 글…
-역대 베스트셀러들의 걸작, 명작들…
父傳子傳이랄까, 내 선친께서도 책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나 역시 책을 사고, 읽고, 쳐다보는 걸 고대로 빼 닮았다. 놀라운 것은 책이 그렇게 많아도 책 하나하나에 얽혀 있는 이야기들이 책만큼 많다는 것, 그걸 몽땅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는데, 書架멍을 때리면서 그 실타래를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보고 싶은 마음, 심정에서 이 글을 쓴다. Bonus – 여기까지 쓰다 보니, 글 쓰는 게 그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가 없다. 한 없이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계속>
- 이전글예수 설교하기가 왜 어려울까? 23.09.05
- 다음글[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기독교적 인문학과 교양의 황혼에서 23.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