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정 박사의 ADHD 이해하기] 두 형제의 이야기 (어린이 ADHD cases) (1) > 칼럼

본문 바로가기

칼럼

홈 > 문화 > 칼럼

[수잔 정 박사의 ADHD 이해하기] 두 형제의 이야기 (어린이 ADHD cases) (1)

페이지 정보

작성자 | 작성일2021-04-07 | 조회조회수 : 30회

본문

내가 크리스토퍼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6살이었다. 그는 학교 수업 시간에 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말도 너무 많이 해서 다른 아이들이 공부하는 데 지장을 많이 준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급우들과 심심치 않게 싸움판을 벌이곤 했다. 부모님이 야단을 치면 5살 난 동생, 데니를 때리고, 소리를 지르며 부모님께 대들기 일쑤였다. 이 형제의 아빠는 트럭 운전사로 일하고, 엄마는 은행에서 일하는 평범한 백인가정이었다.


나는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즈에 위치한 튤레인 의대 소아정신과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는 중이었다. 그 당시 소아청소년 정신의학과 의사가 있는 곳은 루이지애나, 조지아, 미시시피, 알라바마 주를 모두 합쳐서 튤레인에 있는 의사들이 전부였다.


데니와 크리스토퍼를 우리 외래에 보낸 것은 그들의 학교 선생님이었다. 크리스토퍼를 유치원에서 지난 일 년간 가르쳤던 담임 선생님이 데니를 새로이 맡게 되었다. 그는 두 형제가 비슷한 문제를 지닌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교실 안을 계속 돌아다녔다. 잠깐이나마 앉아있을 때는 팔이나 다리를 계속 움직여댔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하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들었는데, 옳은 대답을 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문제를 다 듣지 못했으니 제대로 답을 할 리가 없었다. 이들 형제는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을 못 참아 했고, 싸움을 일삼았다. 그러나 선생님과 일대일로 만나 복습을 하거나 문제를 푸는 경우에는 열심을 냈고, 머리도 우수했다. 데니의 선생님은 그가 말이 많아서 다른 학생들까지 산만하게 하는 것을 방지하느라 그를 교실의 제일 앞줄,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앉게 했다. 또한 데니가 몸을 많이 움직이고 참기 어려워하는 기색이 보이면, 교장실에 다녀 오게 하는 심부름도 시켜서 주의를 환원시켰다.


가끔 아빠가 집에 오면 엄마와 큰 소리로 싸운 후 집을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는 점점 우울해졌다. 수련의 한 명이 엄마의 치료를 맡았다. 우리는 당시 ‘베이커 판사의 소아정신과 외래’ 모델을 본받아서, 소아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사회복지사 등과 함께 청소년들의 문제를 다루었다.


1930년대에 미국 사회는 여성과 아동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아동 학대나 미성년의 노동 착취를 방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범죄를 저지르고 재판정에 출두한 많은 청소년들 중에는 파괴된 가정에서 학대 당했거나 방치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베이커 판사는 이들을 감옥에 보내는 대신 재판정에 부속되어 있는 ‘소아정신과 클리닉’에서 치료와 상담을 받아 선도 되도록 조치했다. 


이리하여 미국 최초의 소아 정신과 치료소는 법원의 부속 기관으로 탄생했다. 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도시로 몰리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이혼 가정도 늘어났다. 이런 환경 속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돕기 위하여 여러 분야의 전문인들이 이곳에서 일했다. 아이들을 도와 주려면 우선 그들이 속한 환경을 이해해야 했다. 


당사자인 환자를 소아 정신과 의사가 감정하고, 적합한 치료를 하는 동안, 사회복지사는 그의 부모, 학교 적응 상태, 과거의 생활 양태 등을 조사하고 상담했다. 심리학자는 필요한 심리검사를 통해서 지능, 감정 상태 등을 면밀하게 알아보았다. 즉 세 분야의 전문가들이 힘을 모아서 환자를 돌보는 ‘종합적 치료 제도’였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재판정의 부속 기관이었던 소아 정신과 클리닉은 의과대학교의 정신과로 옮겨져 연구와 치료를 계속하게 되었다.


총 여섯 명의 수련의 중 네 명이 각각 환자를 맡게 되었는데, 나는 둘째 아들인 데니를 맡아서 치료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지도 교수인 릴리안 로빈슨 교수와 함께 치료 경과와 앞으로의 방향을 의논했다. 


대부분 ADHD 환자와 마찬가지로 데니도 일대일의 상황에서는 집중력도 높아지고, 상담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그가 좋아한 것은 그림 그리기였다. 특히 각기 다른 종류의 자동차들의 개성을 살려서 그리고 난 후, 각각의 이름을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한 번은 ‘엘티디’라는 이름을 말하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사실은 자신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데 대한 우월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데니 덕분에 차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게 된 것에 대해 고맙다고 말하는 한편, 내가 예전에 살았던 한국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즉 내가 타본 것은 기차와 배, 비행기뿐이며 나는 미국에 와서야 승용차들를 많이 봤고 운전도 시작했다는 것을... 


데니는 아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아마도 그래서 자동차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않았을까. 데니는 아빠와 엄마가 자주 싸우는 것이 걱정된다고 했다. 아빠가 아주 집에 안 들어 올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형하고도 싸우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웬일인지 아빠가 있으면 형은 더 싸움을 걸었고, 그때마다 아빠에게 벌을 받았다.


온 가족이 치료를 받는 동안, 가장 먼저 변화를 보인 것은 소년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분노를 말해주었다. 사실 자신도 두 아들과 비슷한 행동을 해서 학교 선생님과 엄마에게 많은 꾸중을 들었다고 고백했다. 검사를 통해서 그 역시 두 아들처럼 과잉 행동 장애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소년들을 벌 주는 대신 운동장에 나가 야구나 축구를 가르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 애썼다. 집에 있는 시간을 늘이고, 아내가 그동안 두 아들을 홀로 돌보느라 고생한 것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차 떠나 버렸던 자신의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고, 아들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 나갔다. 이 당시 과잉 행동 장애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아주 국한되어 있었다. 우리는 뇌신경 전파 물질인 도파민이나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불균형 상태에 기인한 두뇌의 질환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오로지 ‘가족 치료’를 통하여 환자들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2년간의 소아정신과 수련을 마친 1978년, 나는 데니 가족과 이별을 했다. 그들과 만나는 동안 실로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도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감사한 마음을 잊지 못한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당시에는 ‘과잉 행동 장애’라는 진단명만 있었고, 두뇌에서 생성되는 뇌전파물질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필요한 ‘도파민’을 치료약으로 처방해 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그랬었다면 치료의 효과가 훨씬 빠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1970년대와는 달리 지금은 진단명도 ADHD로 바뀌었고, 다방면의 종합 치료가 가능해졌다. 이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많은 연구자들과 선배 정신과 의사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계속>


- 수잔정 박사의 신간 "나와 나의 가족이 경험한 ADHD" 중에서 – 


수잔 정 박사/ 소아정신과 전문의, 전 카이저병원 의사


KCMUSA, P.O. Box 2306, Fullerton CA 92837 | Tel. 213.365.9188 E-mail: kcmusa@kcmusa.org
Copyright ⓒ 2003-2020 KCMUSA.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