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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이념의 트라우마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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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0-10-18 | 조회조회수 : 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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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위기속 믿음 공동체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제언 5.


인근에 위치한 애플 본사를 지날 때면 마음에 떠올리는 이가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사람들의 일상을 바꾼 스티브 잡스, 생전의 그는 단추나 작은 구멍에 대한 공포증을 지녔다. 환공포증 Trypophobia, 동그란 물건 혹은 구멍을 보면 극심한 두려움이 몰려오는 증상으로 아마도 잡스는 떨어진 영업실적보다 씨가 잔뜩 박혀있는 해바라기를 더 무서워 했을것이다. 


태어나자 마자 친부모에게서 버려지며 생겨난 두려움과 분노는 이후 모성애를 상징하는 둥근 모양에 대한 공포감으로 이어졌다는데, 그 트라우마의 끝자락에 버튼을 없애고 터치식으로 바뀐 스마트폰이 자리한 것이다. 이전의 휴대전화가 블랙베리처럼 수많은 버튼을 지녔다면, 잡스는 아이폰 출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버튼을 없애고 기존의 휴대전화를 단순화 했는지 설명한다. 그때마다 그는 버튼 없는 티셔츠를 입고 나왔고, 애플의 가장 결정적 순간 입었던 옷차림에서 우린 그가 무엇을 극복하려 했는지 읽어낼 수 있다.


통상 말하길, 트라우마는 단지 개인의 경험만이 아니라 한다. 어느 사회나 국가 역시 역사적 고난이나 역경으로 공동체적 아픔을 지닌다. 심리학자나 상담가는 아니지만, 신학과 목회라는 측면에서 볼때 한국교회는 깊은 상흔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해방전후에 비롯되어 한국전쟁을 거친 후 남북 분단상황으로 인해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는 이념갈등의 트라우마다.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첨예한 상황이 벌어질 때면 의례히 교회안의 이야기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빨갱이 등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며, 36년 이어진 일본의 식민통치보다 더 무서운 상처와 트라우마로 남은 좌우 이념갈등의 현장이 한국이든 이민교회든 그 실질적 맥락을 이룬다는데 동의하게 된다. 개인의 삶이 그렇듯, 역사적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울 공동체, 민족, 나라는 없다. 그야말로 Mission Impossible 아니겠는가... 하지만, 잡스의 경우처럼 그 상흔의 기억이 없어지진 않더라도 이전것은 지나고 새것으로 탈바꿈하는 시도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만약 그렇게 못한다면, 믿음을 간직했다 여기는 공동체의 신앙적 진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작금의 한국교회가 넘어서야 할 과제를 잠시 살피려 한다.


우선, 복음의 왜곡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 원리를 따라가는 삶,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어느나라, 어느이념, 어느문화가 아닌 정의, 평화, 자유, 사랑등 하나님 나라의 보편가치를 살아내는 삶, 그리고 이를 공동체로 구현하는 교회. 안타깝게도, 극도의 이념분쟁과 그로인한 한국전쟁의 경험은 당장 삶과 죽음의 기로, 살아남은 자가 직면한 굶주림의 현실을 관통하며 예수 믿음의 복음을 다음의 두가지로 단순화 시켰다. 예수천당 불신지옥과 가난 탈피… 전쟁의 참상속에 살아남고자 했던 이들의 간절함이 녹아든 것이라 필자역시 인정한다. 하지만, 그 단순화된 복음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교회가 지닌 역사적 책무에 대한 게으름이자 죄악일수 있다.


1910년대 선교초기, 건강했던 한국교회의 복음이해와 달리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복음은 예수천당 불신지옥, 당장 죽으면 천국갈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천착, 복음을 단순히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해결책으로 뒤틀어 왔다. 정작 1세기 그리스도인들도 관심갖지 않던 질문을 2천년이 지나 뜨거움을 자랑하는 한국의 믿는이들이 붙잡고 있다는데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다음세상을 예비하라 그토록 배운 교인들의 일상은 당장 하늘의 복이 땅의 기름진 복으로 이어져 넉넉한 번영을 누리는 것으로 작용해 왔다는 것이다. 목회 세습, 교회재산매매와 분쟁등 믿음의 공동체라 말하기엔 차마 낯뜨거운 현실을 우린 얼마나 많이 보고 있는가? 나아가, 잘살고 못살고를 결정짓는 복음이해는 믿는이들이 딛고 살아갈 한국사회를 이념과 진영논리에 따라 나누고 판단하게 해버렸다. 부요케 하는 자본주의는 선이고, 사회주의는 악이란 단순 논리, 미국은 선민의 나라이고 북한은 사탄의 나라가 되어지는 현실을 교회안에 마주하며, 작금의 한국교회가 지닌 복음이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보자면 얼마나 뒤틀리고 깨어져 있는지, 그 파편들을 어떻게 다시 모아 새롭게 할지 마음이 무거워진다.


(거대한 후퇴 @ 구글 이미지 캡쳐)99035a35153a95c066e77c044f65506b_1603036806_5282.jpg

 

두번째, 배타적이고 극우화 되는 교회이다. 


지난 5월 미국내 언론들은 뉴욕 연방 준비 은행 보고서를 인용 보도했다. ‘팬더믹은 도시를 바꾼다’는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세기 초 유럽을 휩쓸며 5천만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이 당시 독일내 나치에 대한 지지기반을 확대했으며 결국 2차대전의 전범 나치를 탄생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덧붙이기를, COVID19 상황 속에, 100년 전 독일의 현실이 트럼프 정권하의 미국내에 재현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3년 전 출판되 많은 반향을 일으킨 책 “거대한 후퇴”는 이미 수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는 전세계의 우경화와 민주주의의 퇴보를 경고한 바 있다. 오스만제국의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인도의 극우화를 이끈 나렌드라 모디, 다시 위대한 미국을 꿈꾸는 도널드 트럼프에 이르기까지, 자국문화, 자국경제, 자국정치로 좁아져가는 리더십들의 공통점은 각 나라별 종교적 기반을 강조하며 자극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대한 후퇴”가 지적하듯, 전례없는 심각한 여성 혐오,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와 과도한 권력욕에도 트럼프를 지지하는 견고한 진영이 미국내 근본주의 기독교계 임에서 보듯 말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념갈등의 트라우마를 복음의 논리로 끌어들인 한국교회역시 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8.15 광화문 집회와 전광훈 사태, 급격한 회심과 간증팔이로 유명한 이정훈 교수, 사실대신 온갖 음모론에 기반한 보수 기독교 유튜버들과 최근 인터콥 사태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 지표와 코로나 대응에 관한 국외 선진국들의 평가와는 사뭇 달리, 한국 보수 기독교인들은 당장이라도 망할것 같은 나라 걱정에 그 얼굴과 마음에 수심이 가득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캘리포니아처럼 지진의 공포도 없고, 매해 서울의 몇배나 되는 면적이 타버리는 산불도 없다. 건물과 나무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토네이도가 있는것도 아니며, 매해 엄청난 피해를 주는 허리케인이 있지도 않다. 인종차별로 경찰의 총격을 받을 일도 없고, 유치원 아이들에게 군사용 자동소총으로 총격이 가해진다는 건 상상도 못할 것이며, 의료보험 없이 사는 이가 수천만에 달하고, 코로나 확진자가 하루에만 6만에 이르는 건 꿈도 꾸지 못할 나라… 이런 한국이 과연 그토록 위험에 놓였단 말인가? 


성경 속 바울 역시 언제나 음모론에 시달려야 했다. 예루살렘을 거점으로한 토라(율법) 충성파와 헬라지역에 거주하던 로마 황제파 사이에서 바울은 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 믿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간직한 보편적 가치를 전하고자 온갖 고난과 핍박을 감내해야 했다. 정말로 우리의 국가 공동체를 걱정하는 교회라면 지켜야 할 가치는 양분된 이념적 지평이 아니다. 얽히고 섥힌 정치사회적 맥락을 관통하며 전하고 간직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이고, 이를 다시 회복해야만 그 오랜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우며 나아가 참된 번영과 통일의 비전을 제시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영화 “배트맨 비긴스”에 따르면 브루스 웨인은 어릴적 충격적인 사건 두 개를 접한다. 첫째는 우물에 추락한 것이다. 어릴적 소꼽친구 레이첼과 놀다 그만 실수로 우물에 빠지게된 웨인, 홀로 남겨진 공포속에 그를 더욱 극한의 두려움으로 몰아세운 건 우물속 박쥐들이었다. 둘째는 부모님의 죽음이다. 오페라를 관람하던 중 극중에 박쥐가 등장하자 웨인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를 데리고 일찌기 극장을 나오게된 부모님, 하필 그때 총기를 든 부랑자를 만나 그자리에서 웨인의 부모는 살해됐고, 그들의 죽음은 고스란히 웨인에게 자책감으로 남겨진다. 우물의 공포, 살해된 부모님을 향한 자책감의 기저엔 박쥐가 있었고, 브루스 웨인에게 박쥐는 트라우마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는, 배트맨이 되고자 오히려 박쥐가면을 쓰게된다. 오랜 트라우마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웨인, 공포와 두려움의 박쥐를 고담시를 수호하고 사람들을 지켜내는 배트맨의 상징으로 바꿔내며 자신도 구하고 이웃도 구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에 교회는 늘 함께해 왔다. 정치 경제적 격량속에 한국사회의 아픔이 곧 교회의 상흔이었고, 트라우마였다. 이점에서 한국교회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공동체이고 뿌리깊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애쓰고 힘써왔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방식은 아니어야 한다. 새로워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IT 업계의 모굴, SF 영화속 히어로가 그러했듯, 이제 뒤틀린 이념의 틀을 벗고 하나님 나라의 시선으로 새로와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라는 오랜 진영의 논리를 넘어, 참된 자유, 평화, 공존, 생명, 사랑의 가치를 위해 두손을 모으고 말씀을 깊이 상고해야 할 바로 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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