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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빛을 따라] 고향이 되어 주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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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0-09-29 | 조회조회수 : 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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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코로나19가 명절 풍경마저 바꿔놓고 있다. 올해는 고속도로를 가득 채운 귀성 행렬을 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집안 어르신들이 다 세상을 떠나신 터라 고향을 찾아갈 일이 별로 없다. 고향 떠나온 지 50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곳에서 지냈던 유년 시절 기억은 내 정서의 밑절미임이 분명하다. 서해 바닷가, 뒷산과 앞산 사이 들판 주위로 점점이 박혀 있던 집들, 저녁이면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해질녘 바닷가에서 놀다가 밥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불호령에 깨나른하게 하나둘 집으로 향하던 벗들이 떠오른다.

여름밤이면 라디오를 들으러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고, 모기를 쫓기 위해 왕겨에 불을 붙이고 그 위에 쑥대를 얹어 연기를 피웠다. 마당가 오동나무 가지 위에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올리는 일은 날렵한 내 몫이었다. 마을 분들이 다 돌아간 후에도 멍석자리를 걷지 않고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 은하수를 우러러보곤 했다. ‘하늘엔 총총한 별, 내 가슴엔 도덕률’(칸트)이라는 말도 몰랐고, ‘밤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던 시대’(루카치)가 왜 그리운지 몰랐지만, 우유를 쏟아놓은 것 같은 은하수는 영원한 동경의 마음을 내 속에 새겨 놓았다.

그러나 고향은 기억 속에만 있을 뿐이다. 간척사업으로 우리 놀이터였던 갯벌과 바다가 사라졌고 앞산과 뒷산도 함께 사라졌다. 바다를 메우는 데 필요한 돌과 흙을 얻기 위해 허물었던 것이다. 그 일이 진행된 몇 년 후 고향을 찾아갔다가 그 황망한 광경 앞에 기가 막혀서 털썩 주저앉았던 기억이 새롭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래를 흥얼거렸다.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려”. 기억의 저장고가 사라졌다는 것, 그 속에서 함께 빚었던 삶의 이야기가 불도저 소리와 함께 스러졌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토머스 울프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의 주인공 조지 웨버는 자기를 길러준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15년 만에 산골 고향의 작은 읍으로 돌아간다. 기차 차창으로 계곡 밑의 작은 마을들을 바라보며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방황의 먼 여로를 거쳐 왔지만, 그래도 눈을 감으면 고향의 길, 거리의 집들,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고향은 옛 모습이 아니었다. 부동산 투기와 개발의 ‘광기’가 소읍 전체를 휩쓸고 있었다. 부동산업자들이 설치고 다니고 불필요한 거리와 다리가 놓이고, 커다란 건물이 세워져 고향은 이미 옛 모습을 잃고 있었다. 살풋한 정을 나누던 이웃들도 하나같이 다 변해버렸다. 웨버는 고향과 자신을 이어주던 끈이 끊어졌음을 느끼며 쓸쓸해 한다.

고향 상실이야말로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속병이다. 어디 하나 마음 둘 곳이 없다는 것처럼 쓸쓸한 일이 또 있을까. 가끔 저물녘 서해 바다 같은 쓸쓸함이 몰려올 때면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신 분의 음성이 떠오른다. 예수님도 외로우셨다. 그 외로움을 헤아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뿌리 뽑힌 채 세상을 떠돌 수밖에 없는 이들,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것과, 갈 수 있지만 가지 않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 되어줄 이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와 만나면 마음의 무장이 절로 해제되고, 자기로 존재하는 일이 두렵지 않고, 숨이 가지런해지는 사람이 하나쯤 있다면 인생이 제아무리 고달파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고향 상실의 쓸쓸함을 누군가의 고향 되기로 빛나게 전환할 수 있다면 삶의 비애는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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