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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이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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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0-09-29 | 조회조회수 : 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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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순 | 캘리포니아

그날 아침,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옆 가게의 왕창 부서져 내린 벽을 보는 순간, 결국 다리가 꺾이고 말았다. 난 그 자리에 폭삭 주저앉았다.

바로 그 시간에 홀연히 솟아난 기억 속의 장면, 금방 본 TV 속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동생이 벌 받던 장면. 언제적 일인데 이리 차곡차곡 접혀 있다가 의식 안으로 불쑥 들어왔단 말인가!

아침 뉴스는 코로나로 점철된 그 위에 또 다른 충격이었다. 이곳 캘리포니아, 만 번이 넘는 마른 번개가 불씨를 만들어 여기저기 산불을 냈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북쪽으로 오십여 마일, 또 남쪽으로도 그만큼 떨어진 곳에서까지. 가슴이 무언가에 눌리는 듯했다.

팬데믹으로 영업시간을 절반으로 줄인 시간에 맞춰서 평소보다 늦게 가게를 향했다. 문 밖은 뉴스를 증명해 주는 놀라운 현실 속에 있었다. 9월인데도 100도에 가까운 무더위, 또 매캐한 불 냄새를 대동한 연기와 재가 길과 차는 물론 하늘을 덮고 안개처럼 빽빽하게 이웃을 가렸다.

해에게서도 빛을 빼앗아버렸다. 빨간 탁구공 만하게 보이는 해는 두터운 연기 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려 온갖 힘을 쓰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시야를 가린 누런 연기는 두려움을 더해 주었다. 엉금거리듯 운전했다. 경험해 본 적 없는 낯선 상황, 더듬거리며 운전하는 나에게 뒤의 운전자가 바쁜지 경적을 울린다. 오금이 저려오는 난 정신을 바짝 차려 운전을 해야 했다.

어찌어찌 가게에 당도하여 이마의 땀을 닦는 내 눈에 비친 옆 가게의 앞면!! 그 큰 유리벽은 천정부터 바닥까지 박살이 나 있었다. 도대체 누가, 왜, 아무런 힘이 없는 소상인들을 향해서 이런 짓을 해야 했단 말인가!

절망감이 두려움이 되어 다리의 힘이 빠졌고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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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망연히 앉아 있는 내 머릿속에 들어와 펼쳐지는 사건 하나, 지금은 노인이 된 동생이 혼나던 이른 봄 어느 날의 장면. 그때 초등학교 1학년 동생의 주머니 안에서는 사탕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 주머니에서 사라지곤 하던 돈의 행방과 범인을 찾아낸 순간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험한 표정을 지으셨다. 다짜고짜 동생을 번쩍 안으시더니 눈 녹은 물이 떨어지는 처마의 물받이 아래, 배수구 바로 위에 앉히시곤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셨다. 절대 금 밖에 나오지 말라시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난 동생 주위에서 발만 동동거렸다. 동생도 어쩔 줄 모르고 물줄기를 피해 보려 했지만 헛수고. 좁은 공간에서 입만 벌리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동생의 머리가 다 젖었다. 놀라고 있던 난 젖은 머리를 보고정신을 차렸다. 겉옷을 벗어 동생의 머리에 올려 주었다. 그제야 동생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때 안방에 계셨던 아버지께서 큰 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들어간 나에게 의외로 인자한 표정으로 동생의 머리 위에 옷을 올려 준 것을 잘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곤 동생한테 가서 ‘아버지를 불러 용서를 빌고 다시는 돈뿐 아니라 어떤 것도 훔치지 앉겠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고 전해 주라고 말씀하셨다.

동생이 아버지를 불러 용서를 빌고 또 다짐을 한 후 벌이 끝났다. 그후 동생이 아버지의 주머니는 물론이고 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간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지금까지 만날 때마다 더 넣어 주지 못해 안달하는 것을 보면 동생의 나쁜 버릇은 그때 고쳐졌다고 확신한다.

경찰은 옆가게 주인에게 전화로 상황을 알리고 조사를 한 다음 공기총으로 쏜 듯하다며. 우리 가게의 창도 점검하곤 떠났다.

세상 어디에도 안전지대가 없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바이러스, 무섭게 피어오르는 불길의 소식과 숨쉬기조차 어려운 연기를 안고 있는 공기. 거기에 박살난 유리 벽 등의 일들이 한꺼번에 달려와 속수무책,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로 만들었다. 영락없이 그 봄날, 동그라미 안의 어린 동생과 같은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때 동생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아버지를 부르는 것밖에 없었다. 나쁜 버릇을 고치시려 엄한 벌을 내리시고, 벌 받는 아이의 주위를 살피시며 당신 부르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던 아버지를.

바로, 절망 안에 있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시리라. 그날 아침, 홀연히 떠오를 그 기억은 하나님 아버지를 간절히 불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사인으로 받아졌다.

꽁꽁 언 가슴을 두 손으로 눌러가며 어린 아이의 옹알이같이 웅얼웅얼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의 보드라운 손길이 가슴 위를 쓸어 주시는 듯, 큰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오며, 회개의 기도가 차곡 차곡 새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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