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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高峯) 김치선의 개혁신학 사상의 특징(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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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0-07-31 | 조회조회수 :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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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3. 초지일관한 청교도적 회개 부흥 신앙 사상

고봉은 당시 캐나다에서 함흥으로 처음으로 파송된 영재형 선교사의 청교도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함경도 지역에 파송된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유주의적이었다. 영재형 선교사는 뒤늦게 파송된 진보적 선교사 윌리엄 스코트(William Scott, 1886-1979)와 심각한 신앙적 갈등을 겪었고, 이에 대해 선교부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런데 선교부는 영재형 선교사를 신앙의 불모지인 일본으로 좌천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고봉은 일본으로 건너간 영재형 선교사를 따라서 온 가족이 일본으로 떠났다. 고봉은 일본 고베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이 때부터 영재형 선교사와 선교활동을 함께 시작하였다.(김동화, 『한국의 예레미아 김치선 박사를 추모하며- 나에게 있어 영원한 것』, 서울: 기독교 연합신문사, 1998, 45-46.) 그는 보수적 신앙을 가진 양아버지 선교사를 평생 섬기면서 그로부터 복음 사역자로서의 인격과 영성을 성실하게 닦았다.

고봉의 신앙의 열정은 10살 때 마을 서당 훈장 김응보 옹의 영향 아래 신앙으로 입문 후 흔들림없이 초지 일관하였다. 16세 때 영재영 선교사를 만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실천하는 정통개혁신앙의 훈련을 받으면서 20세에 3.1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출옥 후 영생중학교에서 학업을 끝낸 후 연희전문을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엄재형 선교사의 권유에 따라 일본 고배신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목사 안수 후에는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와 달라스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다시 고베와 동경 신주구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해방전 귀국하여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대한 신학교를 설립운영하고 창동교회 개척, 한양교회 목회, 송파 중앙교회 개척과 300만 부흥전도단 창립으로 초지일관하였다. 고봉의 독특성은 최초의 미국 구약학 신학박사를 한 그의 학문적인 논리보다는 눈물로 청중의 영혼과 마음에 호소하고 감동을 주는 초지일관하는 청교도적인 신앙의 열정이었다.

고봉은 기도의 사람으로 3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복음화운동에 앞장 섰다. 그는 6.25 한국전쟁 이후에 나타난 민족의 위기를 직접 체험하면서, 한국의 예레미아로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민족의 파수꾼이 되어 한(韓)민족과 한국교회가 범한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그의 부흥설교의 주제는 회개, 부흥, 성령이었다. 그는 눈물로 기도하고 전국을 돌면서 전도했다. 해방 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기도, 회개 그리고 기도뿐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는 단지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한 부흥운동이 아니라 민족을 살리기 위한 한국교회의 내면적 성장을 위하여 부흥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교회 부흥운동도 말씀에 입각한 회개 운동이었기 때문에 개혁신앙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창립하고 명예회장으로 계시는 김명혁은 김치선의 설교와 열정에 대해 다음같이 피력한다: “김치선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마다 회개와 은혜 사모의 메시지와 함께 전도의 메시지를 전하시곤 했습니다. 2만8천 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조건 왕십리로 달려 갔습니다. 왕십리 들판에 우물을 파기 위해서였습니다...저는 서울대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전도와 목회를 계속했습니다....모두가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은혜와 감동과 도전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김명혁, “추천사: 한국교회에서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와 같은 영적 거목이 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12-13.) 당시 한국 기독교 인구가 30만 명 정도 되고 한국 인구가 3천만 명 정도 되었을 때 1/10이라도 전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3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복음화운동에 앞장섰다.

4. 사회개혁적 애국적인 눈물의 신앙 사상

고봉은 일제하에서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사회개혁에도 적극적이었다.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한 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정도 옥고를 치렀다. 그는 하나님 나라와 역사의식이 분명하였다.

그의 애국 사상은 1935년 그가 고베에서 고베중앙교회(神戶中央敎會)를 개척한 목회에서 나타났다. 특히 이 교회 교인들은 모두 주일마다 한복(韓服)을 입고 교회에 나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획기적이고 용기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 대부분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를 꺼려하여 될 수 있으면 한복을 입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봉이 시무하는 교회의 교인들이 이처럼 당당하게 한복을 입고 교회에 출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담임목사가 그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신사참배 강요와 일본의 내선일체(內鮮一體) 강요로 나타났다.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반대로 자진 폐교했다. 일본 내에서도 한인교회에 대한 일체의 탄압이 심해졌다. 그가 1938년 청빙받아 간 동경에 있는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의 강단에서 일본어로 설교해야 한다는 내선일체 규정을 준행하지 않고 한국어로 설교했다는 이유로 일본인들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힐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40년 경찰에 사상범으로 구속 연행되어 체포되어 여러 달동안 감옥살이를 하게되었다. 신앙이 좋다는 조선인이 목사가 한국어로 설교했다고 경찰에 밀고했던 것이다. 그는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에서 개척한 메구로(目黑)교회에서 설교할 때에도 언제나 눈물로 기도하며, 눈물로 설교하였다고 한다. 그의 눈물은 단지 감정의 눈물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과 미래를 염려하는 애국자와 선구자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귀중한 눈물이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살면서 선진국을 경험한 고봉은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를 위한 미래의 소망을 다른 곳 아닌 복음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하나님 말씀만이 민족의 아픔을 달래주고 민족의 미래를 열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 복음화만이 나라의 미래를 여는 것이었다. 그는 복음주의적 투철한 개혁주의 신학사상, 삶의 현장에 대한 열정을 갖고하나님 앞에서 민족과 교회를 가슴에 품고 복음사역을 하였다.

고봉은 1944년 귀국하여 남대문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민족 복음화를 표어로 내걸었으며, 애국심이란 “우리가 한국사람이니 그것이 골육지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골육지친인 것을 알아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마음”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일제 강제점령 막바지의 위험한 상황에서 서울의 모든 교회들이 새벽기도회를 쉬고 있는 상황에서 남대문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처음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고 매일 새벽 강단에서 엎드려 민족을 위하여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는 매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조국이 광복과 더불어 고봉은 이제껏 그의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민족의 복음화의 열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그리고 이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때부터 그가 전개한 운동이 3천만의 십일조 3백만을 하나님께 바치자는 운동이었다. 그는 매 설교 시마다 “한국에는 2만 8천의 자연부락이 있소. 동리마다 교회를 세웁시다. 우리 성도들이 집집마다 감나무 한 그루씩 심어서 그 수입을 몽땅 선교비에 투자한다면 민족복음화는 물론 세계를 복음으로 덮으리이다"하고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때부터 그를 조국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렀다.

고봉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민족의 살길은 로마서 9장 1-2절을 근거로 복음이라는 것을 설교하였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니 그것이 골육지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골육지친인 것을 알아.” 그는 해방 후 혼란과 위기의 극복의 유일한 길이 복음을 통한 국가의 재건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국가의 재건과 민족의 구원 이라는 두 가지 목적으로 3백만 복음화 운동을 일으켰다. 3백만 복음화 운동은 복음화일꾼 양성하는 일(신학교)과 전국 2만 8천 동네에 우물파기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구약의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아의 심정을 갖고, “눈물의 선지자”로서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여 세상을 거룩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신학교 학생들에게 영농법과 침술법도 철저히 가르쳤다. 김명혁은 그가 김치선 목사의 설교에서 받은 은혜를 간증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예레미아’라고 불리던 김치선 목사님은 새벽기도회 시간은 물론 설교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고, 은혜 사모와 전도의 매시지를 선포하셨는데 그 메시지들이 저의 신앙 인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재료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김명혁, “추천사: 한국교회에서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와 같은 영적 거목이 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12.)

2009년 10월 26일 경기도 안양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민족부흥 일념 고봉 김치선 목사 유업 잇자”는 세미나에서 미국에 거주 중인 고봉의 차녀 김동화씨가 ‘나의 아버지 김치선 박사’라는 제목으로 교회사에 숨겨진 여러 가지 이야기를 연대별로 펼쳐내며 “항상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모습에서 아버지가 민족과 한국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절실히 느꼈다”고 증언했다.

최선은 고봉이 민족 복음화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먼저 김치선 박사는 한국교회와 사회가 사는 길은 오직 십자가 복음 뿐이라 생각하고 초교파적으로 복음을 전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고봉은 1950년 전후에 손양원, 밥 얼스와 함께 한국 최초의 한민 연합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민족 복음화“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그 열매가 1970년대 민족복음화 운동으로 신현균 목사에 의하여 이어졌고, 1970년 ”한국기독교 부흥협의회“가 설립되었다. 신현균으로부터 김준곤, 조용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빌리그래함 전도대회가 1973년 ”5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로 진행되었다.

고봉은 해외유학파로 일제말에 귀국해 1944년 3월 당시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남대문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인 김구를 만나게 되어 민족적인 목회를 하게된다. 그가 본래 가졌던 복음주의적 부흥신앙과 김구의 민족주의가 결합하게 된다.(박명수, “추천사: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가 나오길 기대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23.) 그래서 김치선은 복음으로 민족을 새롭게 하는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민족 복음화운동은 해방 후에 3백만 복음화 운동으로 나타났다. 고봉은 3천만 민족복음화를 위해서는 그중의 1/10인 3백만명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 그가 시무한 남대문교회는 민족 복음화의 구심점의 역할을 했는데 서울 역 앞에 위치해서 해방 이후에 월남한 많은 신자들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곳이었다. 그러나 3백만 명 복음화운도은 6.25 한국 동란, 장로교단의 분열, 고봉의 독자노선, 1952년 남대문교회 사임으로 역사에 묻히고 말았다.(이종전, ‘김치선과 3백만 부흥운동의 의의,“ 개혁논총 39(2016), 171;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킹덤북스, 2018, 6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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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박사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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