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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쟤를 보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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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1-03-30 | 조회조회수 : 5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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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편지] 러시아 최영모 선교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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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도착할 때부터 약 5년간 필자 부부의 적응을 도와준 고려인 부부와 러시아인 부부. 우측에서 두번째가 필자 최영모 목사.


자꾸만 머뭇거리는 남편을 아내가 채근한다.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나가야죠" 남편은 잘 준비된 말로 아내를 설득한다. "나는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부전공했고, 교회에서도 선교 업무를 담당했으며, 선교지에도 방문한 경험이 있소. 당신은 단지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낭만적으로 생각하는가 본데, 선교는 그런 것이 아니오." 아내는 잠잠해진다.


며칠이 지나자 아내는 다시 재촉한다.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하나님과 약속했고, 결혼 전에 나와도 약속했잖아요." 그러자 남편의 말에는 짜증이 살짝 묻어나온다. "나가는 선교사도 중요하지만, 보내는 선교사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요."


하지만 남편의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불편해진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쟤를 보내소서"로 읽어도 말씀은 매 순간 바늘이 되어 그의 마음을 찌른다. 괴로워하던 남편은 마침내 결심한다. '그래. 이렇게 마음 불편하게 사느니 차라리 선교지에 가서 죽어버리자.' 그리고 기도한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그 순간 놀랍게도 내면 한가운데로 기쁨의 강물이 밀려온다. 순종할 때 주시는 깊은 평화를 맛보며, 남편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흐른다.


1993년 12월 5일, 필자 부부는 다섯 살과 세 살인 두 아들을 데리고 러시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파송 예배 때 요한 웨슬레의 말을 인용해 '하나님 외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고 죄밖에는 부끄러워할 것이 없으며,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선교사가 되겠다'라고 인사했던 것을 기내에서 생각해본다. 그것이 얼마나 치기 어린 다짐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와의 첫 만남은 회색빛으로 시작했다. 아침 10시에도 어둑한 하늘은 온통 침울하게 젖어있고, 한낮에는 잠시 희뿌연 하다가 오후 4시가 되면 다시 어둠이 내려앉는다.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의 12월과 1월은 낮에도 어두운 흑야(黑夜)의 계절이라는 것, 그리고 해가 화창한 날은 한 해에 불과 두 달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다.


러시아 제2의 도시인데, 도로에는 차가 거의 없다. 극심한 인플레와 지속적인 식량부족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마저 사라지게 한다. 달러를 환전하는 외국인을 속이는 사람들은 지천에 깔려있다.


환전하려고 하는데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내 앞에 착한 인상의 러시아인이 다가와서 서로 환전을 하자고 했다. 내심 잘됐다는 생각으로 환전을 하고 돌아서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돈을 자세히 세어 보니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였다. 급히 뒤돌아 저만치 가고 있는 그를 뒤쫓아 따라잡았다. 숨이 차 헐떡거리면서 필자는 상대방을 위압하려고 태권도 자세를 취했다. 겁먹은 표정으로 돈을 돌려주면서 그가 한 말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에또 마야 라보따(이것은 나의 직업이다)." 직업이니까 그런 행위라도 너그러이 봐달라는 의미인가. 계속 인상을 쓰고 있어야 하건만 그의 말에 필자는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얼어붙은 이방인 선교사의 마음은 쉽게 녹지 않는다. 추위와 눈과 어둠이 사방에 깔린 이곳에서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가라앉은 마음 한쪽으로 피어오르는 상념이 시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아예로플로트(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이자 러시아의 대표적인 항공사)로 향하는/ 한 줄기 외길이/ 혹한의 눈보라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낯선 메트로 앞의/ 공중전화에서/ 표정 없는/ 숫자를 두드리면// 순간의 불꽃은/ 영원으로 이어진/ 긴 침묵이기에// 다시 만날 때는/ 다시 만나는 것 같지 않은/ 새로운 만남이어라 (졸시 '회색 마을' 전문)


최영모 목사 / 총회 파송 러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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