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제2의 고향"…탈북민 쉼터 '갈렙동산' [공동체에서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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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상당수, 초기 정착 어려움 겪어
함께 공동체 일구며 제2의 인생 시작
"고립 대신 소속감을 심어줘야"
[나보다 우리가 익숙했던 우리. 이제는 우리보다 나를 앞세운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가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는 사이, '함께'보다는 '혼자'가 친숙한 개념이 됐다. 점차 가속화되는 개인화 현상은 소통의 부재 등을 불러오며 단절과 고립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사회 공동체'가 붕괴될 거란 우려 섞인 전망도 나온다.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공동체성의 복원이 시급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돕고 이끌어주는 공동체들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보다 건강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특별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지난 12일 방문한 충남 아산 '갈렙동산'. 황수안 전도사가 산양 축사 공사를 하고 있다.ⓒ데일리굿뉴스
[데일리굿뉴스] 정원욱 기자 = 충남 아산 외곽의 한 마을. 이른 아침부터 산양 축사 공사가 한창이다. 불꽃이 튀는 가운데, 용접기를 든 황수안 전도사의 목덜미에 구슬땀이 흐른다. 철제 파이프를 몇 번 용접하자 축사 뼈대가 완성됐다.
산양이 뛰노는 축사를 비롯해 가지와 고추가 무성한 텃밭, 토종닭이 지저귀는 닭장, 그리고 널찍한 숙소까지. 이 모든 공간을 탈북민들이 손수 일궜다. 지난 12일 탈북민 공동체 '갈렙동산'을 찾아 목숨 걸고 국경을 넘은 이들이 어떻게 '제2의 고향'을 가꿔가고 있는지 들어봤다.
▲갈렙선교회가 세운 '갈렙동산' 전경.ⓒ데일리굿뉴스
"굶주리고 외롭던 시절 생각해보면, 여기는 정말 천국 같지요."
이곳에 정착한 지 3년째인 황 전도사는 넘치는 먹거리와 따뜻한 이웃이 있는 갈렙동산을 '천국'에 비유했다. 황 전도사를 포함해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탈북민은 총 5명이다.
이들은 아침저녁 함께 식사하고, 농사와 가축 돌보기 등을 분담해서 하고 있다. 햇살 좋은 날이면 커피 한 잔 들고 테라스에 모여 담소를 나눈다. 여름이면 직접 키운 수박을 쪼개 먹고, 겨울에는 화목난로 앞에 모여 고구마를 구워 먹는다. 그들에게 이 사소한 일상은 '회복' 그 자체다.
▲갈렙동산 곳곳에는 가축과 채소, 과일이 가득하다.ⓒ데일리굿뉴스
황 전도사는 북한에서 성경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10년간 노동교화소에 수감됐다. 옥수수밥 한 움큼에 고된 노동이 이어지는 감옥살이 속에서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버텼다"고 했다. 어렵사리 탈북한 뒤 한국 땅을 밟았지만 정착은 녹록지 않았다. 모든 게 낯설고 외로웠다. 그러다 갈렙동산을 만나 삶의 중심을 되찾았다. 이제 그는 자신과 같은 탈북민을 돕는 선교사를 꿈꾸고 있다.
그는 "처음엔 정말 모든 게 막막했다"며 "그런데 여기 와서 잘 적응했고, 지금은 (제게) 꿈이 생겼다"고 귀띔했다.
황 전도사의 말처럼, 탈북민들이 새로운 삶에 안착하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통일부에 따르면 2025년 3월 기준 국내 거주 탈북민 수는 약 3만4,000명이다. 이 중 상당수가 초기 정착 과정에서 생계 정보 부족과 사회적 고립을 겪는다. 2019년엔 서울 관악구의 한 주택에서 탈북민 어머니와 아들이 굶어 숨지는 일이 발생해 사회적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통일부 조사 결과, 탈북민 취약계층의 47%는 정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탈북민들은 비정기적으로 갈렙동산에 모여 식사 교제를 나눈다.ⓒ데일리굿뉴스
'갈렙동산'을 세운 김성은 갈렙선교회 목사는 "탈북민들에게는 함께 회복하고 사회에 정착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서 "이들을 위한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라고 운을 뗐다. 그는 지금까지 1,044명의 탈북민을 구출해 '북한판 쉰들러'로 불린다.
김 목사는 "탈북을 돕는 것만으로 사역이 끝나는 게 아니다"라며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도록 돕는 것까지가 진정한 영혼 구원"이라고 강조했다.
코로나19로 탈북 사역이 막힌 시기, 김 목사는 선교비를 쪼개 탈북민 쉼터 마련에 나섰다. 풍족해서가 아니라, 감시와 빈곤을 피해 목숨 걸고 탈출한 이들이 다시 고립과 가난에 내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김 목사 부부는 탈북민들과 함께 건물 벽돌을 직접 쌓아 올렸고, 당근마켓에서 중고 창문 등을 사 자재비를 아꼈다. 그렇게 세워진 갈렙동산은 탈북민들에게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제2의 고향'이 됐다.
▲김성은 갈렙선교회 목사는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하며 공동체 안에서 회복되는 삶을 살길 소망한다"고 전했다.ⓒ데일리굿뉴스
앞으로 갈렙동산은 거주 공간을 넘어 탈북민들의 쉼터이자 배움터로 거듭날 예정이다. 명절과 휴가철에는 전국 각지의 탈북민을 초청해 공동체 잔치를 열고, 분기별로 '북한 전도학교'를 운영해 김 목사의 27년 탈북민 구출 사역 경험을 전수할 계획이다.
김 목사는 "탈북민 대다수가 형편이 넉넉지 않은데, 명절이나 휴가철에 여기 모여 따뜻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며 "함께 예배드리고 고향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교류하는 공간으로 쓰였으면 한다. 무엇보다 탈북민들이 공동체 안에서 회복되는 삶을 살면서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하길 소망한다"고 전했다.
김 목사의 바람처럼, 갈렙동산은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에서 다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회복의 집'으로 조용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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