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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의 영혼의 밤] 3장 육신의 문제와 통증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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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통증을 대할 때 눈물을 흘리는 모습보다는 참고 이기는 강한 모습을 원하고,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기분이 좋아지기를 바란다. 육신은 통증이 수반하는 죄책감을 원치 않아서 용서를 거부하며, 혹 자신이 버려질까 두려워 통증 해소를 원한다. 통증 경감은 성경적 상담의 주된 목적이 아니다. 통증은 성경적 상담의 시발점이 되어 육신의 정체를 밝히고 육신을 대면하는 시작이기 때문에 도리어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생길 수도 있다.


    진정한 성경적 치유 사역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여타의 심리치료와 구분이 된다. 통증을 없이 하는 것은 중요하나 그렇다고 해서 통증이 없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통증이 그대로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알 수 있다면 차라리 통증을 선택해야 한다. 통증에서 해방되는 것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상담의 목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당신이 감히 고통을 알기라도 하느냐고 묻더라도 대답은 마찬가지다.


    통증은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럽다. 그래서 많은 심리치료사들은 통증을 덜어주는 것만으로도 그게 어딘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절대로 그 통증을 덜어주는 치료를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처절한 통증의 틈바구니에서 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가 하는 점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상담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통증에서 해방은 시켰으나 하나님을 깊이 만나 교제하는 디퍼 워크로 인도하지 못하면, 과연 하나님이 왜 그 절절한 아픔을 허락하셨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현재 겪어 나가는 통증만으로도 버겁고 힘들다. 그런데 이 통증이 장차 올 영광에 접점이 되지 못한다면 이것보다 더 통탄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믿음의 목표점은 단지 현재의 이 지독한 가난과 질병과 고난으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왔다가 제대로 인간 대접도 못 받고 떠나가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허망하게 잊히는 존재가 되면 말이 되겠는가? 그러면 어찌 하나님이 공평하시다고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피나는 아픔 속에 있었다면 그 피비린내 풍기는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뵙고, 비록 환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죽음 너머의 세상을 보는 안목으로 이 세상을 경영하는 믿음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 이 책이 지향하는 목표점이다. 


    통증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삶의 질 또한 달라진다. 통증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발견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또 사회적으로는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다변화시키는 동력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방법으로 통증을 경감하기 위해서 자구책을 만들어 아픈 자신을 보호하려는 모든 방어기제를 ‘육신’이라고 정의했다. 통증을 경감하기 위해 만들어진 파괴적인 육신이 있는 한편, 언뜻 유익을 주는 듯한 교묘한 육신이 있다. 전자는 비교 의식, 시기, 질투 등의 감정이나 자기중심적 사고, 외모지상주의 등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후자는 일중독, 조종, 회피, 집착, 종교 생활 등의 양상을 띤다. 모양이 어떠하든 이 모든 육신은 스스로 연명하기 위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통증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육신을 따라 살면 열등감, 불안감, 죄책감이 잠시 없어지는 듯하지만 결국은 한계를 맞는다. 육신을 따라 살면 숨겨졌던 통증이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열등감, 불 안감, 죄책감이 다른 환경을 맞아서 새로운 이차적 통증으로 몰려온다. 그러면 우리는 더 깊은 혼돈에 빠지며 통증 또한 더 강해진다. 따라서 통증을 경감하는 본연의 의무를 띤 육신은 또다시 하나님의 방법을 외면하고 이전보다 더욱 강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이러한 악순환의 삶을 이어 가면 육신은 가족 구성원에게로 점점 영역을 확장하여 대물림과 집단육신으로 번져 가기에 영혼의 밤은 더욱 춥고 깊어져 간다.


    이때 불신자는 더욱 강한 육신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시도를 반복하며 각양 중독에 사로잡힌다. 인위적인 믿음으로 사는 신자는 이차적인 통증이 몰려오면 불신자와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 자신의 삶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에 민감하지 않기에 통증이 더해지면 종교 생활이라는 육신으로 발전되기 십상이다. 이는 심각한 유혹이다. 스트레스 많은 현대인의 삶을 종교활동으로 위로받으려 하는 것이다. 종교활동은 최저의 비용으로 최저의 통증과 최고의 효과를 내는 듯해서 하나님을 능히 대신할 수 있는 전형적인 우상숭배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통증을 대면할 때 흘리는 ‘눈물’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마음이 경직된 피상담자에게는 감정이 느껴질 때 억누르지 말고 자연히 올라오도록 두는 것이 치유의 중요한 과정이라는 점을 인지시킨다. 마음이 약할 때나 맺힌 한이 풀어질 때 눈물이 난다. 눈물은 상담자를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반응이다. 양파를 썰 때 나는 눈물과 슬플 때 쏟는 눈물은 화학적 성분이 다르다. 슬플 때의 눈물에는 스트레스, 호르몬 등으로 쌓인 독성이 미량으로 배출되기에 치유의 능력이 있다. 이와 같은 원리로 집단 ‘눈물 테라피’를 하기도 한다. 이처럼 눈물을 통해서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는(마 5:4) 방법이 얼마나 창의적인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께서 잡히던 밤에 통증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주목해 보자. 주님은 극도의 통증을 가감없이 있는 대로 느끼시고, 있는 그대로 제자 들에게 표현하셨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38-39).


    오랜만에 상처 난 부위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일들이 또 일어난다. 있는 그대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자마자 ‘이번에는 도저히 통증이 없어질 것 같지가 않다’라는 느낌이 온다. 그 순간 또다시 더 깊은 절망이 눈앞에 만져진다. 심각하다. ‘그래, 이번에도 틀렸구나. 도무지 한줌 빛도 보이지 않는 캄캄함이다.’ 또다시 심해의 고요와도 같은 깊은 실망과 절망이 몰려온다. 버려진 듯 내팽개쳐진 느낌이다. 사방 어디에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또다시 있는 그대로 통증을 느껴야 한다. 이제는 통증 속에서 기다릴 때다. 한 번 더 기다려 보라! 그러면 통증 뒤에 비겁하게 숨어 있었던 육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통증은 죽음을 알리는 신호다. 육신이 죽고 영이 하나님 안에서 태어나는 해산의 고통이야말로 통증의 클라이맥스이며 통증은 육신이 십자가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죽음은 삶의 시작이며, 지금의 통증 뒤에는 반드시 십자가로의 초대가 나타난다. 통증은 십자가 훼방꾼인 육신의 정체를 밝히는 하나님의 도구다. 지금 혹 통증을 느끼고 있는가? 하나님의 귀한 초대다. 이제,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으로 깊이 들어가자.


    성경적 상담 세미나 문의: isaya5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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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이민 

    1981년 오하이오주립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2011년 정년 후 해외 직장생활을 접고 36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

    삼성물산 고문을 지냈으며, 포항공과대학교에서 산학협력교수,

    현재는 한동대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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