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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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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에큐메니안| 작성일2021-05-07 | 조회조회수 : 27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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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여섯째 주일(5월9일) 어버이주일 

(출 19:16-25; 계 5:6-14; 눅 24:44-53)



1. 나이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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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혐오와 차별 문화가 확산되면서 전통 미풍양속인 부모 공경과 어른에 대한 예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또한 세대 간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혐오와 차별은 더욱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아 다시금 부모님 공경과 어른에 대한 예의가 되살아나, 동방예의지국의 이름을 되찾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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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 혐오 문화의 확산


아마 성도 여러분들이 들으시면 놀라시겠지만, 요즘 세대의 혐오 문화는 상상을 불허합니다. 놀라운 것은 사람을 ‘벌레’로 취급하는 은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틀딱충(틀니를 딱딱거리는 노인), 연금충(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생활하는 노인), 할매미(시끄럽게 떠드는 여성 노인), 노인충(노인+벌레) 등. 과거에도 ‘노인네’, ‘꼰대’ 등 노인을 비하하는 말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윗세대를 벌레로 부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인터넷 공간의 익명성에 기대 상대방의 인격권을 쉽게 침해하는 세태 탓도 있지만, 세대 간 단절과 거부감 확산이 그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일보」의 조사에 따르면, 20·30대 청년층의 7.8%는 틀딱충과 연금충 등 노인혐오 표현을 온라인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사용한다고 합니다. 장년층의 9%는 ‘청년들에게 노인혐오 감정이 매우 많이 있다’고 답했고, 42.8%는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렇게 노인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부정적 인식은 한국 사회에서 노인으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가중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농경시대나 산업사회 초반 같은 옛날에는 어른들의 지혜와 경험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오늘과 같은 정보 기술 사회에는 오히려 젊은이들의 기술과 능력이 더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청년층은 세대 갈등을 줄이는 방안으로 ‘노인 세대가 시대 변화를 깨닫고 과거의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59.8%)를 첫 번째로 꼽았습니다. 그리고 장년층은 ‘청년층의 부양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사회 전반적으로 고령화에 대비해야 한다’(67.0%)를 꼽았습니다(「세계일보」, ‘세대 갈등’에 멍드는 한국, 2019.1.1.).


그렇다면 이러한 노인혐오의 본질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거리감이 상실’되어 ‘경계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종교적으로 보면 ‘성스러움에 대한 상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코로나 상황 때 일부 개신교회의 일탈로 개신교계 전체가 욕을 먹고 있었는데, 이것이 안타까운 것은 지금껏 종교가 표방해온 성스러움의 가치가 이제 우리 사회에서 한낱 우스갯거리로 전락했으며 신성한 종교적 가치가 물질적인 세속적 가치에 짓눌려 우리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영적인 가치와 방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 안의 ‘선악과의 빈자리’, 곧 죄의 본성이 터져 나와 다시금 차별과 혐오를 양산하는 구조로 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버이주일을 맞아 성스러움의 회복, 경계의 재설정, 적절한 거리감의 필요성을 깨닫고, 부모 공경과 어른 공경의 미풍양속이 다시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어른들에게도 요구되는 것이, 젊은이들에게 ‘꼰대’로 취급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소통하고 이해하고 격려하고 응원하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이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 그렇습니다. 어차피 마스크 썼으니, 우리 기성세대들은 입을 닫고 귀를 열고 지금 젊은 세대들이 무엇을 갈망하고 또 무엇을 힘들어 하는지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갑을 열어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성스러움’의 문제입니다. 곧 ‘경계’의 문제이며 ‘거리감의 적절한 설정’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이 부활절 여섯째 주일이지만, 오는 5월 13일은 ‘주의 승천일 (Ascension Day)’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먼저 복음서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한계시록 말씀은 이렇게 승천하신 어린양 예수께서 하늘 보좌에 좌정하시어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의 핵심이 되는 구약 말씀은 이러한 심판주이자, 거룩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곧 성스러운 것에 대한 거룩한 거리감이죠?


요즘 세대가 성스러움을 잃고 어른 공경을 잃어가는 이때,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다시금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성스러움을 이야기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 곧 전도서 말씀처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지금 우리 사회에서 부모 공경과 어른 공경의 필요성도 간접적으로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늘로 올려지시니


복음서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4장 말씀은 누가복음의 마지막 말씀이죠?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승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아니 우리들을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르시죠? 말씀을 볼까요?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4-48)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저 유대인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나 부활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하며, 우리가 바로 이 사명의 증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신 이유는 위로부터 능력이 임할 때, 곧 성령께서 임할 때, 죄사함의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세상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침내 승천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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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오토 <그리스도의 승천>(1304-6)과 안드레아 만테냐 <그리스도의 승천>(1461)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자, 그렇다면 승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실까요? 이것을 요한계시록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도 늘 찬송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3.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5장은 일곱 인으로 인봉 된 두루마리와 승천하신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께서 승천하시어 말세의 비밀을 담고 있는 두루마리를 개봉하시는 것입니다. 이 두루마리를 개봉함으로 심판과 영생의 구원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요한의 환상입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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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베르크 묵시록 삽화 <하늘 보좌 앞의 예배> (1000-20)와 랭브르 형제 <밧모섬의 성 요한>(1411-16)


요한이 본 환상을 장소에 대한 묘사로 살펴볼까요? 하늘 예배당을 묘사하고 있는데,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아가죠? 한 가운데 보좌가 어린양과 함께 있고 그 주위에 짐승의 형상을 가진 네 생물이 있습니다. 넓은 예배실이 있으며 그 주위에 장로들의 의자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요한의 자리입니다. 이러한 하늘 예배당의 중심에 어린양이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서 있는데, 어린양이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일곱 뿔은 어린양의 힘, 곧 신적인 권세를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일곱 눈은 말씀에 나와 있는 대로,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이십사 장로는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을 찬양하는, 말 그대로 성도들을 대표하는 이들이며 네 생물은 모든 만물의 대표로, 하나님의 수행원(천사장)입니다. 심판이 시작되고 최후의 결정 때까지 그 심판을 시행하는 수행원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말씀을 볼까요?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계 4:7-8a).


그러나 후대에는 복음서 기자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곧, 유다의 사자이신 왕 되신 그리스도(마태복음), 소(송아지)같이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마가복음), 죄에 오염되지 않는 사람이요, 인자이신 그리스도(누가복음), 하늘의 신비 되신 독수리 같은 그리스도(요한복음)를 뜻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의 찬양을 받으시는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취합니다.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7-8)


봉인된 두루마리를 취함으로 어린양은 종말 때의 왕, 곧 심판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성도들의 기도를 향으로 피워 올리며 노래를 부릅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


새 노래를 부르죠? 어린양이 세상을 심판하시기에 합당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린양에 대한 새 노래의 내용이 놀랍습니다. 이 노래는 어린양의 승리가 어디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어린양의 희생적인 죽음에 있습니다. 곧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민족 중에, 거룩한 한 민족(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속량함을 받습니다. 당신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합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대속의 결과이죠? 로마서 8장 말씀을 한번 찾아볼까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어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이러한 이스라엘과 택하신 사람들을 위한 대속적 죽음에 관해, 이제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가 찬양합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1-12)


어린양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을 찬양하죠? 그리고 이번에는 모든 피조물이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3-14)


이렇게 심판주이신 어린양, 그의 백성을 미리 택하시고 의롭고 영화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이 찬양합니다. 따라서 그 거룩함 앞에 우리는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명을 어떻게 했을까요? 구약 말씀은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받았을 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4. 경계를 넘어,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시내산을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했는데, 그 목적은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여 세계만방에 제사장 나라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이렇게 미리 예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언약을 체결한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경계를 설정한다는 것입니다. 곧 거리를 두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결함을 요구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출 19:16-19)


시내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에게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출 19:20-22)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태양도 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본 자는 죽습니다. 이사야의 고백도 그렇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본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만 시내 산에 올라오게 하시고, 제사장과 백성은 경계를 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산 주위에 경계를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 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경계를 넘어,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그들에게 알리니라”(출 19:23-25)


5. 동방예의지국을 다시 세우자!


출애굽기 19장에는 무려 5번이나 “경계를 넘어오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강조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악과의 빈자리’, 곧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경계를 넘어오지 말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는 것을 막기 위한 경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은 함께 올라오라고 명령하시죠? 특별히 아론을 부르시는 이유는 그가 대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대제사장인 아론은 영원한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말씀을 찾아볼까요?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 피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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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 반 에이크 <어린양에게 경배> (1432)


이러한 영원한 대제사장인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어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 사회의 혐오와 차별의 문화는 거룩한 것에 대한  ‘거리감 상실’과 ‘경계가 무너진 것’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한 어린양 예수께서 심판주도 되신다는 것을 잊어버린 결과입니다. 종교적으로 보면 ‘성스러움에 대한 상실’이라고 말씀드렸죠?


따라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인 ‘선악과의 빈자리’가 터져 나와 우리 사회를 차별과 혐오를 양산하는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따라서 거룩함에 대한 경외를 회복하고, 동시에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를 회복하여 동방예의지국을 다시 세우시는 저와 여러분, 특히 우리 젊은 세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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