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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례전 ⑵] 세례는 죄사함의 표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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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에큐메니안| 작성일2021-02-08 | 조회조회수 : 3,70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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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tacombs of San Callisto, 「Baptism」 (3세기경) ⓒPinterest


    세례에 대한 부분은, 『기독교강요』 제4권에서 다루어진 많은 쟁점들과 같이, 종교개혁 전통과 로마교회의 추종자들 사이에 벌어진 16세기의 신학적 논쟁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칼빈은 재세례파들과 주된 의견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들이 이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첫째, 세례는 가톨릭교회에서 변하지 않은 채 유일하게 남아 있는 참된 교회의 흔적이고, 둘째,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개혁자가 세례에 대한 재세례파들의 견해들, 즉 유아세례에 대한 그들의 거부와 이전에 “정당하지 않은” 교역자에 의해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재-세례”의 실천을 논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의 의미


    칼빈은 세례에 대한 정의를 내리며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한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 입문의 표징을 세례라고 한다(IV.xv.1).


    세례는 신자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의 지체로서의 지위를 알리는 표징입니다. 세례는 사회학적으로나 협소하게(제도적으로) 교회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한다는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아버지의 인자하심이 성령께서 아들과 연합시키신 모든 사람들에게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의 표징인 세례는 동시에 그들의 칭의와 성화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우선, 세례는 죄의 용서의 확실한 표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와 함께 신자들의 죄를 유일회적으로 용서하시며, 그리고 그의 용서는 그들이 세례 이전에 저질렀거나 혹은 이후에 저지른 모든 잘못들에 유효합니다.


    따라서, 단 하나의 표징이면 충분합니다. 이 표징이 세례이며, 그것은 회개의 유일한 성례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저 ‘고해성사’ 같은 것을 불필요하게 만듭니다(IV.xv.3,4). 게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죽고 그 의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을 알리는 세례는 또한 신자의 성화의 표징입니다.


    칼빈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로마서 6장 4절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칼빈이 제3권 ‘회개’와 ‘중생’에 대하여 말한 것에 비추어 해석될 수 있습니다(III.iii.5,7). 거기서 그는 육의 죽임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를 나타내며, 새로운 생명은 그 의 부활에 참여를 나타낸다고 말한바 있습니다(III.iii.9). 그러나 칭의와 달리 성화는 점진적으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칼빈은 세례를 “이 중생의 약속”으로 묘사합니다(IV.xv.12). 이점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중세 가톨릭과 개혁교회의 세례논쟁


    종교개혁 당시에 횡행하던 로마교회의 견해는 세례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시작된 원죄에서 해방시켜주고, 그가 타락 이전에 지녔던 의롭고 순결한 본성을 회복시켜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은 이것을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비판합니다. 원죄는 우리의 본성이 타락하고 부패한 것을 가리키며, 그로 인해서 우리는 우선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고, 이어서 성경이 “육체의 일”(갈5:19)이라고 부르는 것을 계속 일으킬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신중하게 유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세례가,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죄가 완전히 용서되었고 또 우리가 져야할 죄책과 그 죄책으로 인해서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모두 다 완전히 용서되었다는 확실한 표징이라는 것입니다(IV.xv.10).


    다른 하나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이 완전히 제거되어 우리가 타락하기 전의 아담이 지니고 있던 의와 순결함을 되찾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은 우리에게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앞에서 “육체의 일”이라고 부른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칼빈은 그가 회개와 중생에 대하여 말할 때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말했던 것을 다시 상기시켜줍니다.


    우리가 육체라는 이 감옥에 갇혀서 사는 동안 죄의 흔적은 항상 우리 안에 살아 있을 것이다(IV.xv.11).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죄의 세력과 날마다 싸워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세례와 동시에 시작된 우리의 육을 죽이는 일은 우리가 매일 추구해야 하며, 그 일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나설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의 세력과 싸우는 동안에,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충실히 붙잡고만 있으면, 죄의 세력은 결코 지배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칼빈은 바울 사도의 말씀을 통해서 이를 확증합니다.


    바울은 중생한 사람 즉 자기를 예로 든다. 그는 항상 자기의 육의 흔적 과 싸우며 비참한 노예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려 해도 전 적으로 헌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롬7:18-23). 그래서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하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롬7:2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평생 감옥에 갇혀 있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의 위험한 상태를 생각하고 심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이 공포심을 극복하게 하기 위해서 위로의 말을 첨부 한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롬8:1) 하였다. 바울은 주께서 일단 은혜로 안으로 받아들이시고 그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접붙이시고 세례에 의해서 교회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신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는 동안은(비록 죄에 의해 포위를 당하고 자기 속에 죄를 지니고 다닐지라도) 죄책과 정죄에서 사해졌다고 가르친다(IV.xv.12).


    마지막으로, 세례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 에 접붙임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 자신과 밀접하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복을 나누게 된다는 확실한 증거를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표징입니다(IV.xv.6).


    칼빈은 제네바 예배 규정에서 세례의 바람직한 형식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세례 받을 사람이 있을 때마다 우선 그를 회중 앞에 소개하고, 온 교회가 증인이 되어 그를 주시하며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를 하나님께 드린다. 학습교인이 배워야 할 신앙고백문을 낭송하며 세례에서 받을 약속을 열거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학습교인에게 세례를 준다(마 28:19). 그리고 끝으로 기도와 감사로 그를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IV.xv.19).


    이어지는 세례에 대한 재세례파와 가톨릭적 견해들에 대한 칼빈의 비판은 위에서 살펴본 세례의 교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첫째, 만일 세례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선언하시는 기회라면, 세례의 정당함은 그것을 집례하는 사람의 가치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칼빈은 교황 제도 하에서 불경건한 우상숭배자들에게 받은 세례는 정당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두 번째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재세례파의 주장을 거절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은 영원한 것이며, 철회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III.xxi.1). 이 사실을 토대로 칼빈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반박합니다. 세례의 목적은 죄의 용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그들의 죄가 이미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가톨릭 신학은 정확히 그 반대를 주장했고, 그 결과 죽음의 위험에 처한 신생아에게 산파가 세례를 베푸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택하셨다고 말하며 논박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창17:7) 바로 그런 뜻이며, 어린아이들의 구원은 이 말씀에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IV.xv.20).


    가톨릭 교리에 대한 논박은 또한 칼빈에게 그것의 결론을 거절하게 했습니다. 그는 세례는 성만찬과 같이 그의 교역이 공개적으로 인정되는 사람들에 의해 집례되어야 한다고 단언합니다(IV.xv.20).


    유아세례 논쟁


    죽어가는 신생아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논의는 유아세례에 대한 재세례파들의 반대로 인해 그 당시 뜨거운 쟁점이 되었고, 칼빈에게 유아세례에 대한 한 장을(IV.xvi) 따로 쓰게 했습니다. 제세례파는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성경에서 찾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논박하려고 한 주장입니다. 그가 생각할 때, 유아세례는 성경적이지만, 직접적인 증거의 부재 로 인해서(이를테면 그것에 대한 성경구절이 없다), 이 주장은 단지 간접적으로만 구체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칼빈은 계약의 신학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렇게 합니다.


    칼빈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새 계약은 옛 계약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것들은 모두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보이는 의식이 다르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할례에 속한 것이 모두 세례에도 있기 때문입니다(IV.xvi.4). 따라서 새 계약이 옛 계약을 대치했을 때, 변화된 것은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이 아니라 그 약속의 형식, 곧 의식입니다.


    비록 계약을 의미하는 의식들 이 변화했을지라도, 그것들이 의미하는 계약은 변하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단지 하나의 계약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칼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요점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의 본질적 인 주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계약의 세습적인 특성에 근 거를 두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그와 하나님 사이에 체결된 계약은 단지 그 자신에게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또한 그의 전체 혈통에게도 타당합니다. 계약의 통일성은 칼빈에게 다음의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참으로 여호와께서 옛날에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은(창17:14 참고) 옛 날 유대인들에게 못지않게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대해서도 유효하며,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관계된 것과 같이 기독교인들에게도 관계된다는 것 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 따라서 유대인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계약 의 상속자가 되어 불신자의 자녀들과 구별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자손이라 고 불렸다(스9:2; 사6:13). 그와 같은 이유로, 기독교인의 자녀들은 거룩하다고 간주된다(IV.xvi.6).


    물론, 단지 세례 받을 수 있는 기독교인 부모들의 자녀들만이 그렇습니다.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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