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교회는 어디에...북간도 독립운동을 추동한 캐나다장로회교회들과 설립자들(1906~1923) > 신학과 설교 | KCMUSA

북간도교회는 어디에...북간도 독립운동을 추동한 캐나다장로회교회들과 설립자들(1906~1923) > 신학과 설교

본문 바로가기

  • 신학과 설교

    홈 > 목회 > 신학과 설교

    북간도교회는 어디에...북간도 독립운동을 추동한 캐나다장로회교회들과 설립자들(1906~1923)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에큐메니안| 작성일2021-02-08 | 조회조회수 : 7,442회

    본문

    268404892c3320f1b2e49f7e3aab50f5_1612824739_7067.jpg
    ▲ 간도국민회 중부지방회 본부 국자가교회 교인들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제공


    지금까지 92개의 교회 이름과 설립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당시 교회는 청나라 또는 동북군벌의 위협, 중국 지주들의 위협, 일제 군경의 위협, 마적과 토비들의 위협, 공산주의에 의한 위협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믿었다. 성도들은 독립과 해방의 날을 확신하며 고뇌하며 흔들리며 낙심하며 절망하며 아주 특별한 조선인 디아스포라교회를 세웠다.


    북간도의 조선인 디아스포라 교회들


    북간도교회는 공동체가 되어 첫째, 성도들의 가난과 수탈과 착취와 안전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풀어나갔다. 영생동교회, 장은평교회, 구세동교회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둘째, 수평적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다. 천민의 삶을 억압하였던 유교의 양반관료계급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흔적을 연통라자교회, 훈춘성내교회, 남별리교회 등에서 볼 수 있다.


    셋째, 구국신앙으로 일제 식민지에 저항하였다. <3.13> 용정만세시위에 참여한 대다수가 캐나다장로회 교우들이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 5월 1일까지 연변에서 46회 만세시위가 열렸는데 천도교와 대종교가 주도한 소수의 집회를 제한 나머지 집회는 장로교회와 지도자들이 주도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군은 경신대학살에서 장로교회와 그 마을들을 표적삼아서 초토화시켰다. 청산리백운평교회, 장암동교회, 의란구교회, 남별리교회, 금당촌 교회 등 50여 개에 이르는 교회가 불에 탔거나 참변을 당하였다.


    넷째, 활발한 구국교육의 장이 되었다. 1928년 조사표에 의하면 캐나다장로회에 속한 교회와 캐나다장로회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가 60여 개였으며, 서굉일은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 선생> 238쪽에서 <십자군>이라는 잡지에 나온 글을 재인용하여 1913년에 북가도 캐나다장로회 산하에 교회와 학교가 병립한 교회가 36개였다고 쓰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대부분의 교회들이 산하에 학교를 세웠다. <3.13> 용정만세시위운동에서 학생 동원을 맡았던 정동학교, 광성학교, 창동학교, 명동학교가 다 미션스쿨이었다.


    다섯째, 사회주의 사조에 휩쓸려 교회가 내홍과 분규를 겪으며 양분되었다. 교회 내 진보주의자들은 계급혁명과 소비에트정권 옹호, 약소민족 해방을 약속한 레닌과 연대를 주장하는 이동휘가 위원장으로 있는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교회를 떠났고, 남은 자들은 사회주의의 흐름으로부터 공격당하며 흔들리는 교회를 지키고자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자세로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다. 안타깝게도 간도국민회는 진보 크리스천의 대표격인 이동휘가 임시정부를 탈퇴한 후에 구춘선 회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자동적으로 해체되었다. 일본군에게 최초의 참패를 안겨주었던 조선의 최대 기독교 독립운동단체인 간도국민회가 사회주의가 던진 이념분규로 말미암아 스스로 무너진 것은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경종이 아닐 수 없다. 그 후로 교회와 미션 스쿨은 제국주의의 앞잡이, 아편과 미신으로 매도당하면서 북간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했다.


    북간도 조선인들 교회의 신념


    북간도교회 설립자들에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었다. 어디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며 쉴 수가 없었던 그들은 교회 안에서 자유와 평안과 위로를 받았다. 교회는 그들에게 피난처였으며 안식처였다. 이방인으로서 유리 방랑하며 고달프게 살던 그들은 십자가에서 절대 평화와 구원, 절대사랑과 희망을 체험하였다. 그들은 캐나다장로회의 치외법권 영역 속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과거의 자신들처럼 불안과 공포, 절대절망에 빠져있는 북간도의 동포들을 절망과 죽음에서 구원하고자 화산 같은 가슴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둘째, 교육 구국의 의지를 가진 독립 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학교 창립자 또는 교장과 교사로서 민족교육을 주도하였으며 역사의식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체육과 군사훈련까지도 모색하였다. 교육 구국의 신념으로 양육한 학생들이 <3.13> 용정만세시위 학생동원과 질서, 안전 유지를 책임 졌다. 그리고 훈춘현, 연길현, 화룡현 만세시위에서도 기동성과 조직력을 발휘하였다. 그 후 그들은 독립운동단체를 만들었으며 청년들과 함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3.13> 만세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와룡동 창동학교와 명동학교는 교회 설립자들이 세운 학교이고 광성학교와 정동학교에는 교회 설립자들이 교사로서 학생 교육을 주도한 학교들로서 많은 독립운동의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셋째, 구국 신앙을 가진 독립 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서양의 국가들처럼 조선인들이 기독교를 믿고 개화되어 생활과 사회가 근대화 되면 나라를 되찾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들은 한 마을에 한 개 교회와 한 개 학교를 세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교회와 학교 설립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캐나다선교사들의 독립운동 지지는 그들에게 기폭제가 되었으며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들은 성경 공부와 사경회, 시찰회와 노회, 청년회를 비롯한 각종 신도회 활동을 통해서 함께 기도하며 독립의연금을 모으며 정보를 교환하였다.


    드디어 1919년 1월 25일 국자가 소영자에서 열린 기독교대전도총회에서 그들은 파리강화회의 참여한 김규식의 요구대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만세계에 알릴 만세운동을 전개할 준비를 위해 30여명의 비밀요원을 선발하여 북간도지역을 분담하였다. 그리고 전 북간도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지휘할 <조선독립운동의사부> 만들었고 3월 13일에 룡정촌에서 <조선독립축하회>라는 명목으로 군중집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회장에 장로회 목사 김영학, 부회장에 배형식을 선출하였으며 연변의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독립만세시위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3만 명이 모이는 경천동지할 <3.13> 용정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북간도 조선인 교회들이 역사에 남긴 발자취


    1900년대 초반 4반세기 북간도는 조선독립운동으로 화산처럼 끓어올랐다. 그 중심에 캐나다장로회 교회들이 있었고 교회 창립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창립자들이었고 주요멤버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3.13> 만세시위 후에 <간도국민회>와 <훈춘한민회> 등을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결과로 교회는 1920년 일본군의 <경신대학살>의 표적이 되었으며 그 대가를 가혹하게 치러야 했다.


    북간도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의 화산처럼 뜨거운 신앙고백, 투철한 구국교육과 가슴 절절한 구국신앙과 그리고 사회주의 사조로 인한 각 분야의 내홍은 오늘 코로나사태에 직면한 한국교회에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20년대에 북간도교회가 겪은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해방이후 한국교회가 겪은 갈등의 예고편이었다.


    실로 북간도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모세의 광야교회였다. 광야교회는 우리가 길을 잃을 때 돌아가는 모형의 교회이며 한국교회의 DNA가 되어야 하는 십자가를 진 교회이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사에는 북간도 교회의 자리가 없다. 민경배가 쓴 <한국기독교회사>에도, 김명구가 쓴 >복음주의자 시각으로 보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 한국 기독교사 1 – 1945년까지>에도 옥성득이 쓴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에도 북간도교회는 전혀 거론 되지 않는다.


    교회가 있었던 곳은 그들의 조국이 아니어서 그들을 추모하지 않고 그들의 조국은 그들을 잊어서 추모하지 않는다. 교회 또한 그들을 어둠 속에 묻었다. 북간도의 독립운동은 자랑하면서 독립운동의 모체였던 교회는 제거해버린 역사 왜곡과 침묵이 가슴 아프다.


    참고서적

    양전백, 함태영, 김영훈,〈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차재명,〈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 

    중국조선족교육사 집필소조,〈중국조선족교육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0

    허청선, 강영덕, 〈중국조선족교육사료집 1〉, 연변교육출판사, 2002

    김춘선, 〈중국조선족사료전집 철학종교편2〉, 연변인민출판사, 2013

    류병호,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6 종교사〉,연변교육출판사, 2006   

    호이전, 문홍복,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97

    김택 외, 〈연변문사자료 제5집 교육사료전집〉,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88

    정협화룡현문사자료연구위원회편, 〈화룡문사자료 제4집〉, 화룡현문사자료위원회, 1992

    정협룡정현문사자료연구위원회편, 〈룡정문사자료 제 2집〉, 문사자료연구위원회, 1988

    김택, 〈길림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1995

    김연옥, 〈조선군사령부 間島出兵史 〉, 경인문화사, 2019

    서굉일 외,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임김약연선생〉, 고려글방, 1997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편집, 〈개척 〉, 민족출판사. 1999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9

    김춘선,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2016

    최석숭, 〈훈춘조선민족 이민사〉, 연변교육출판사, 2015

    양소전, 차철구 외 3인, 〈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2005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 연변인민출판사, 2001

    룡정 3.13 기념사업회 편찬,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


    이이소 기자


    KCMUSA,680 Wilshire Pl. #419, Los Angeles,CA 90005
    Tel. 213.365.9188 E-mail: kcmusa@kcmusa.org
    Copyright ⓒ 2003-2020 KCMUSA.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