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출 17:1-7; 히 4:14-5:10; 마 4:1-11) 주현절 첫째 주일(1월10일) > 신학과 설교 | KCM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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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혹(출 17:1-7; 히 4:14-5:10; 마 4:1-11) 주현절 첫째 주일(1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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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에큐메니안| 작성일2021-01-08 | 조회조회수 : 4,68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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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현절을 맞이하며 예수님의 삶을 생각하다


    오늘은 주현절 첫째주일입니다. 지난 1월 6일은 주현일로 주현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주현절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심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태초의 이치(道)이신 말씀(로고스)의 육화, 곧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절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소금과 빛 된 삶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성탄절기를 통해 아기 예수께서 바라시는 새로운 세상을 살펴보았다면, 주현절기는 바로 그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 나라와 하늘의 질서를 구체적으로 만들고 실천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셨던 일들을 살펴보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주현절은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제자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받고 또 그 길을 따르는 절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삼위일체교회력 첫째 해 주현절기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겪으신 일과 하신 일들을 잘 나열해 보여줍니다. 이것은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주현절 첫째 주부터 여섯째 주까지 소개되는 예수님의 생애와 삶을 핵심 키워드로 나열해 보면, 첫째 주 ‘유혹’, 둘째 주 ‘막힌 담’, 셋째 주 ‘하나님의 증거’, 넷째 주 ‘증인’, 다섯째 주 ‘권세와 이름’, 마지막 주현절 여섯째 주 ‘재판 자리’ 등입니다(이것은 앞으로 이어질 주현절기 설교의 제목이 됩니다).


    먼저 오늘 주현절 첫째 주일 말씀은 ‘유혹’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서 모세와 다툽니다. 이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신뢰가 깨지며,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계신가를 묻습니다. 이렇게 유혹은 먼저 육체적 갈증과 굶주림으로부터 와서 공동체 구성원 서로간의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복음서 말씀은 이러한 육신의 갈증과 배고픔을 넘어, 유혹의 다른 두 차원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초월적인 문제 해결 방식’과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러나 서신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이러한 ‘먹고 마시는 문제’와 ‘초월적인 문제 해결’, 그리고 ‘세상 모든 영광의 갈망’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삶을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이 땅에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지금 경제가 어렵고 코로나 위기 상황의 정점에서, 굶주림과 배고픔, 곧 경제 문제를 단 한 번에 해결할 해결사를 우리는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해결사에게 경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혹입니다. 이러한 유혹을 잘 극복해야만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러한 유혹을 극복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유혹 (1) 신뢰의 상실에서!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오늘 본문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불평한 ‘므리바 물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한 사건이죠? 말씀을 볼까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출 17:1) 사실 오늘 본문 바로 앞 장인 출애굽기 16장에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고파 불평할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이 없어 목마르다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모세와 더불어 다툽니다. 모세는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출 17:2-4)


    놀랍죠?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또한 그들을 인도한 모세도 실망하여 하나님께 하소연 합니다. “조금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마실 물 때문에 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로 적용하면, 경제위기로 서로간의 신뢰가 무너진 것과 같습니다. 한 국가 내에서 서로간의 신뢰가 무너지면 나라가 위기에 빠집니다. 우리 사회의 근간인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민주주의 연구의 권위자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어크로스, 2018)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민주주의는 유사한 방식으로 무너진다!” 어떤 방식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질까요? 사실 트럼프 당선 직후,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의 민주주의조차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은 레비츠키&지블랫은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매우 유사한 패턴으로 무너졌음을 발견합니다.


    그 숨겨진 민주주의 붕괴의 요소는 무엇일까요? 이들은 3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후보를 가려내는 역할을 내던진 정당’, 둘째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인’, 셋째 ‘언론을 공격하는 선출된 지도자’ 등입니다. 이 3가지가 민주주의 붕괴 조짐을 알리는 명백한 신호라는 것입니다. 먼저 ‘후보를 가려내는 역할을 내던진 정당’을 살펴볼까요? 사실 우리는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 때문에 새로운 인물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아웃사이더는 트럼프처럼 민주주의의 붕괴를 이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을 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좋은 사람을 가려내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인’도 민주주의를 붕괴로 이끕니다. 상대를 권력 경쟁에서 퇴출시키려는 모든 의도는 민주주의의 붕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뢰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를 인정하는 관용이 필요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죠? 레비츠키&지블랫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치인이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일 때, 그들은 자제한다. 또한 경쟁자를 위협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 정치인은 상대를 권력 경쟁에서 퇴출시키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자제는 스스로 관용적인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줌으로써 선순환을 이뤄낸다.”


    지금 우리 정치는 서로간의 신뢰가 깨져 상대방의 의견은 무조건 반대합니다. 또한 고소, 고발이 난무합니다. 이런 ‘정치의 사법화’가 ‘사법부와 검찰의 정치화’를 낳았죠?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당회나 제직회, 공동의회는 물론, 교사회, 기관모임, 구역모임 등 모든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무시하려고 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신뢰할 때, 그 공동체가 건강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언론을 공격하는 선출된 지도자’도 민주주의의 붕괴를 알립니다. 레비츠키&지블랫은 이렇게 말합니다. “독재 정권은 종종 명예훼손이나 모욕죄 혐의로 소송을 함으로써 반정부 성향이 강한 언론을 ‘합법적으로’ 경기에 뛰지 못하게 막는다.” 우리 언론은 이미 ‘기레기’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짜 뉴스를 남발하는 언론을 개혁하지 말아야 하나요? 만약 언론을 개혁한다면 이것은 군부독재 때 언론을 길들인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표현의 자유는 있지만, 그 한계와 적정선은 어디일까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무튼 레비츠키&지블랫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듯이, “잘 설계된 헌법이 민주주의를 지킨다?”에 관한 이들의 답은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제도가 아닌 규범이다!” 그렇습니다. 지금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규범, 곧 윤리와 도덕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부동산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규제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윤리, 도덕의 문제입니다.


    아무튼 레비츠키&지블랫도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고, 그 가운데서도 핵심 역할을 하는 건 ‘상호 관용(mutual tolerance)’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상호 관용’은 자신과 다른 집단의 의견도 인정하는 것을 뜻하며, ‘제도적 자제’는 주어진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둘 다 당연한 개념인 것 같지만, 이러한 규범들이 무너질 때, 민주주의도 함께 허물어진다는 것입니다.


    3. 유혹 (2)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 자신의 뜻에서!


    모세와 백성들은 이러한 상호 관용과 자제가 없었죠? 서로 다투고 불신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주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 17:5-6)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원망을 많이 합니다. 우리네 인생길을 광야 길로 비유한다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늘 끊임없이 원망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기본적으로 먹을 것과 마실 것입니다. 이것은 생존에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십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입니다.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출 17:7)


    이스라엘 백성이 다투었고,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사실 다툴 때, 중재자가 있거나 어른이 있으면 다툼을 멈춥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여 모세와 다툽니다. 그럼 모세는 어떤가요? 백성들은 그렇다 치고, 지도자는 제대로 정신 차렸나요? 오늘 출애굽기와 병행 본문이 민수기 20장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모세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9절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 20:9-11)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뭐라고 하나요? “반역한 너희여!”라고 말합니다. 공동번역은 “반역자들아!”라고 번역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칩니다. 물이 솟아나 온 회중과 짐승이 마십니다. 그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 20:12)


    하나님께서 누구를 책망하죠? 바로 모세와 아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닙니다. 목말라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그들에게 “반역자들아!”라고 외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들 앞에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아론은 광야에서 죽고,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놀랍고도 무서운 말씀입니다.


    민수기 20장 10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 20:10b)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혹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 곧 자신의 위대함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민수기서는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20장 8절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어떻게 합니까?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민 20:11)” 그렇습니다. 반석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반석을 치는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원망하며 지팡이로 반석을 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닌, 교만하여 자신의 ‘초월적인 문제 해결 방식’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야코포 로부스티 틴테레토의 <모세가 반석에서 물을 내다>(1577) 작품을 보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모세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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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코포 로부스티 틴테레토 <모세가 반석에서 물을 내다> (1577)


    4. 유혹 (3) 천하만국의 영광으로 다가오다!


    예수님도 이러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와 달리 잘 극복하십니다. 사실 복음서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쉬운 말씀이니, 말씀을 바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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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님의 세 가지 시험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1-3)


    첫 번째 시험입니다. 구약 본문 말씀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한, 마실 것과 먹을 것에 대한 시험이죠? 이에 대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유혹을 극복합니다. 그러자 마귀는 다시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마 4:5) 유혹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 4:6) 이제는 말씀을 가지고 마귀가 유혹합니다. 기적을 보이라는 것이죠? 초월적인 문제 해결 방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7), 이번에도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이죠? 결국 마귀는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을 합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8-9)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마지막으로 마귀에서 말씀하십니다. 물러가라고 하는 것이죠? 말씀을 볼까요?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마귀는 신뢰와 소통의 대상이 아닙니다. 물러가라고 외칠 뿐입니다. 그러자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마 4:11)들게 됩니다. 유혹을 극복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시험은 크게 보면 의식주의 문제, 곧 ‘경제적 문제’와 이것을 해결할 ‘초월적인 문제 해결 방식’, 곧 정치적 문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두 가지 모두를 완성할 수 있는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입니다. 물론 이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겠죠?


    아무튼 이러한 세 가지 유혹을 이긴 삶이 바로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리고 서신서인 히브리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멜기세덱은 구약에 나오는 아주 신비한 인물입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나, 갖고 있는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말씀을 찾아볼까요?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 14:16-20)


    5.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라!


    원래 제사장은 레위 지파의 직분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족보를 중시여깁니다.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인 마태복음이 족보로 시작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아무튼 아론으로부터 내려오는 완전한 족보가 없다면, 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레위 계열의 제사장보다 월등한 대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너희 믿음의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대제사장이 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했습니다. 첫째 사람의 연약함을 경험한 인간이어야 하고(물론 이것은 다 가능하겠죠?), 둘째 하나님께서 임명한 자로 그분의 권위를 덧입은 자이어야 합니다(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예수님은 인성으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연약하지만 죄는 없으신 분, 동시에 신성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대제사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대제사장은 연약한 인간적 속성만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1-4)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아론과 그의 후손과 같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5-7)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아들로 인정하시고 대제사장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에 계실 때, 곧 인간으로 현현하셨을 때(주현), 예수님은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었기에 인간적인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응답을 받고 유혹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 역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와 아론, 그리고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유혹 앞에 서 있습니다. 경제적 위기, 또한 위기를 극복할 초월적인 메시아에 대한 기대, 정치적 메시아겠죠? 그리고 우리의 모든 욕망을 채워줄 그 어떤 신적인 해결책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을 채워줄 그런 메시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제적 위기도 한 순간에 극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우리의 모든 욕망을 채워줄 그 어떤 신적인 해결책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에게 무릎 꿇고 경배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위험한 유혹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 히브리서 본문 마지막 구절은 유혹을 극복하기 위한 정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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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테르 파울 루벤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1577-1640)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받으셨고, 또 그 고난 받음으로 말미암아 순종함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순종함으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신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유혹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라!” 힘들고 어려워도 조금만 참아야 합니다. 이렇게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고, 말씀을 통해 유혹을 극복하고, 믿음을 통해 온전하게 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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