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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도 목사 설교 기획연재 2 “설명하는 자가 되지 말고 체험하며 사는 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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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당당뉴스| 작성일2020-10-21 | 조회조회수 : 6,8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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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포된 이용도 목사의 설교 어록 7가지

     


    “평양 장대현교회!”


    라는 말을 들을 때, 곧 우리 안에 떠오르는 ‘연관검색어’ 또는 ‘연관키워드’는 아마도 “1907년 평양대부흥”이나 “길선주 목사” 등일 것이다.


    장대현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위대한 메시지들이 선포되었을 것인가. 그런데 이 역사적인 장로교회에서 선포된 그런 설교들의 기록이나 흔적은 오늘까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이는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롭게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무언(是無言) 이용도(1901~1933) 목사가 선포했던 설교 흔적들이 전해진다. 1937년 변종호가 출간한 『서간, 시가, 그의 생애』에 이용도의 장대현교회 설교 두 편이 실렸다. 이후 1958년 변종호가 발행한 『이용도목사전』에는 장대현교회에서 필기해놓은 이용도의 설교 어록 7가지가 담겼다. 만약 어느 역사학도가 장대현교회에서 선포된 설교들을 수집한다고 하면, 그는 이용도에게 최소 2편의 설교 필기와 7가지 설교 어록을 신세 지게 될 것이다.


    각 설교의 제목은 “주를 따르는 자는 강하라”, “짐 진 자 다 나오라” 그리고 “어록 (3)”이다. 이 “어록 (3)”은 이용도 목사가 평양 산정현교회와 장대현교회에서 외쳤던 설교들의 어록 85가지와 기도 1편을 ‘어느 필기자’가 수집해놓은 것이다. 그 어록들은 대부분 산정현교회에서 기록된 것이나, 그래도 7가지는 장대현교회에서 등장한 것이다. 이는 아래와 같다.


    79. 주(主)는 체험할 것이지 말할 것이 아니다.

    80. 설명하는 자가 되지 말고 체험하며 사는 자가 되자.

    81. 값이 높은 보물일수록 나타나지 않는다. 주의 은혜는 나타나지 않는다.

    82. 목사는 가련(可憐)! 내수외호(內瘦外豪)!!

    83. 난 지 보름 된 아이 - 피는 생명, 생명은 피.

    84. 신앙 운동은 모험 운동이다.

    85. 예수를 믿지 않고 10년을 살아보시오. 예수를 믿지 않고 20년을 살아보시오. 그렇게 살아야 별것도 없어요.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주님의 생명을 붙잡고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 『이용도 목사 전집 4 – 설교와 성경』(주의 것, 2020), 72쪽에서.



    파편과도 같은 이 7가지 어록들만 가지고 이용도 목사가 어떤 큰 뜻을 장대현교회에 전하려 했는지 헤아린다는 것은 흡사 퍼즐 맞추기와도 같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파편 하나하나의 가치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하여 각 어록을 끊어 읽어도 맛과 멋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것들을 엮어 의미 있는 한 덩이로 만들어보고자 한다.


    이용도 목사는 장대현교회 회중에게, ‘말의 신앙’에서 ‘몸의 신앙’으로 이동하기를 촉구했다. “주(主)는 체험할 것이지 말할 것이 아니다. 설명하는 자가 되지 말고 체험하며 사는 자가 되자”고 한 것이다. 주님은 어떻다는 주장과 설명이 홍수처럼 범람한다. 지금도 그런데, 그때도 그랬는가. 주님이 누구라고 말로 외치며 싸우는 이들에게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보다 피로감이다. 주에 관해 말하는 이들은 많지만, 그 주님을 보여주는 이들은 어디에 있나? 주에 관해 많은 말을 논하나 주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자보다, 대단한 말이 없어도 주를 맛보며 살아가는 생활자가 진정 복되지 아니한가?


    어느 사람은 여기서, “어떻게 주님을 체험하느냐? 주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얘기냐?”고 물을 수 있다. 어록 순서를 따라가며 상상해보면 나름의 대답이 만들어진다. 곧 주님을 체험하며 산다는 것은, 값진 보물인 주의 은혜를 경험하며 산다는 것이다(81번 어록).


    다른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보여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보여주면 믿겠다면서 말이다. 이때도 이용도 목사의 대답은, “값이 높은 보물일수록 나타나지 않는다. 주의 은혜는 나타나지 않는다”(81번 어록)이다. 주의 은혜는 인간이 자기 시간표에 따라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종류가 애초 아니다. 내 맘대로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종류라면 이미 내게는 경외와 신비를 상실한 염가의 대상이 되었음을 입증할 뿐이다. 그러나 주의 은혜는 가장 귀한 것 - 따라서 가장 신비로운 것이며 또한 가장 경외해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82번 어록 - “목사는 가련(可憐)! 내수외호(內瘦外豪)!!”는 이전 어록들과 주제의 단절이 있는 것 같다. 그래, 어록들의 행간마다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의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더냐.


    이용도가 “목사는 가련(可憐)! 내수외호(內瘦外豪)!!”라고 한 까닭도 궁금하지만, 하고많은 문장들 가운데 왜 이것을 중요하게 받아 적어 보존하기로 했는지 그 어록 필기자의 뜻 또한 궁금하다.


    이용도는 자신이 목사면서도 목사가 가련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 이유가 충격적이다. 내수외호, 즉 속은 가냘플지라도 겉으로는 호걸 행세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 자신이 목사였기에, 목사로서의 직업적 생리를 너무도 잘 알았을 테지. 그래도 ‘가련’이라고 한 것을 보면 비난이 아닌 측은함 같다. 그럼 왜 그렇게 보았을까?


    사람들은 어느 한 사람을 ‘목사’라고 부르면서 그 한 사람에게 자기는 하지 않는 무리한 경건의 요구를 당연시하기를 당연시한다. 즉 목사의 옷을 입혀주는 대가로 자기가 지지 않는 무거운 십자가를 그에게 지워준다. 그러나 가운을 입는다고 사람의 가냘픈 내면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위의 시선과 기대라는 압력에 짓눌릴 때 어느덧 교회의 영웅 행세하고 있는 자신을 보기 쉽다. 이용도 목사는 목사의 그러한 사회심리적 위치를 갈파, 측은하다 한다. 그렇다면 이 어록은, 쌀쌀맞은 싸르캐즘(sarcasm)이 아니라, 처절한 현실 인식에서 오는 ‘용기 있는 애통’에 가까울 것이다.


    사람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을 수는 없을까? ‘내 얼굴 관리’에 노심초사하다 녹초 되는 일 없이,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진정한 나다운 삶을 살 수는 없을까?


    이용도는 ‘주를 체험하며 사는 삶’을 이야기했다. 주의 은혜를 사모하며 사는 자의 마음에 머무는 평안은, 때로는 흔들릴지언정 뽑히지는 못하리라. 주변의 시선이 아무리 뜨겁고 거세게 몰아친다 할지라도 말이다.


    83번 어록은, 난 지 보름 된 아이가 피 흘리며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한 이용도가 그 장면을 가지고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사람이 결국 살고 죽는 것은 피에 달리지 않았던가. 피의 있고 없음에 달리지 않았던가. 피는 그렇게나 특별하고 희귀한 것이니, 절대로 ‘그냥 아무것’ 될 수 없는 종류다. 주의 은혜가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피 없이 살 수 없음에서 주의 은혜 없이 살 수 없음을 깨닫는 자는 복되다.


    이용도는 “주님의 생명을 붙잡고 살아보라”고 호소한다. 예수 없이 자기 힘으로 10년, 20년 야금야금 살아보아야 별것도 없고 생명도 없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 삶의 잘못된 것들을 예수 보시기에 합당하게 바꾸어가는 믿음으로 당장 살라고 하면, 머리와는 다르게 몸으로는 영 불편하게 느낀다. 루터의 거대한 종교개혁보다 더 크고 벅찬 것이 ‘나’라는 인간의 개혁. 우리는 때로는 은근하게 때로는 대범하게, ‘믿지만 다 드리지는 않는 삶’을 산다. 신앙 좋아 보이지만 속으로 들어가서 보면 안 드리고 움켜쥔 것들 한둘 아니라는 건 자기가 가장 잘 알지 않은가? 남 이야기 할 것 없다.


    이때 이용도 목사가 장대현교회에 제시한 길은, 말하자면, 예수는 예수이되 ‘모험적으로 예수’다. ‘모험적으로 예수!’ 모험하듯이 과감하게 예수를 따르라는 것이다. 간보면서 믿지 말고, 통째로 믿으라는 것이다. 주님과 줄다리기하지 말고, 그 줄 놓아버리라고. 또는, ‘주님의 밧줄’에 자신을 묶어 주님 앞에 포로로 자처하라고. 간보기로, 줄다리기로, 10년, 20년 살아보아도 똑같다면서, 더 좋아지는 것도 별로 없다면서. 10년, 2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주님을 체험하는 오늘 하루’에 한참 못 미친다. 그 가치, 그 의미, 그 행복에 있어 말이다. 주를 등 뒤에다 놓고 사는 나의 10년을 주님과의 친교적 하루로 바꾸어보면 어떨까.


    그러한 시간, 주님을 붙들고 또한 주님께 붙들리는 그러한 시간은, 10년, 20년 자기가 잘 살아본다고 했던 온갖 수고가 주지 못하는 ‘피’가 되어 준다. 그것이 없으면 사람이 죽는 피, 그것이 있으면 사람이 사는 피 말이다. ‘주와 동행하는 현재’라는 그 시간이 곧 생명의 피인 셈이다.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모든 생활에서 돌아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생활을 향해서 돌아가라”고 정리하면 어떨까. 그런데 이는 성서부터 교회사 전반에 흘러온 오래된 가르침이 아니던가. 1930년대 초 평양 장대현교회는 이용도 목사 덕분에 그 가르침을 상기할 수 있었고, 2020년 한국 ‘당당뉴스’ 독자님들은 이용도의 설교 어록을 적어둔 그 무명의 성도와 폐병환자 변종호(1904~1984)의 ‘출판 빚’ 덕분에 그 가르침을 상기하게 되니, 이는 큰 빛을 던져준 믿음의 선조들에게 진 큰 빚이 아닐 수 없다. 그 빚을 갚는 길이란, 그들 한 분 한 분이 전해주고자 했던 메시지, 즉 주님을 체험하며 사는 자, 주님께 삶을 맡기고 사는 자, 그러한 생활자 되는 길 외에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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