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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춥고 가난했던 요셉과 마리아의 첫 번째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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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로 오신 주님(사 52:7-10; 딛 3:4-7; 눅 2:1-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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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rl Rahl, 「Herbergssuche」 ⓒWikimedia Commons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아기 예수로 오시는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예배 가운데 함께 하길 축원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은 성탄절입니다. 처음 미국에 와서 신기했던 것은 한국과는 달리 성탄절 전야에 예배를 드리고 정작 성탄절 날에는 예배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성탄절 예배를 하는 곳도 있지만 그리 흔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성탄절 전야 촛불예배로 함께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고 성탄절에는 가족끼리 모여 정을 나누는 게 보통의 미국 교회의 모습이지요.


    누가 성탄절을 제일 기다릴까요? 아이들이지요. 가정마다 크고 작은 성탄 트리를 장식하고 성탄절 날 아침에 산타 할아버지가 두고 갔을 성탄 선물을 기다립니다. 아이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성탄 선물의 종류가 바뀝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장난감이던 것이 나중에는 제법 비싼 종류로 바뀌지요. 크리스마스카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며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기도 하고, 뜻밖의 사람들에게 카드를 받는 것은 소중한 기쁨입니다.


    올해는 불행하게도 세계 곳곳과 마찬가지로 캘리포니아에 내려진 통제령으로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은 고사하고, 집에도 여러 사람들이 모이지 못합니다. 모처럼 근사한 곳에 가서 외식하는 것도 금지됐고, 여행도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2020년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솔직히 2000년 전 이스라엘 땅과 거리가 너무 멉니다. 마치 편안한 소파에 앉아 커피 한잔하면서 조선 시대 사극의 한 장면을 보는 그런 아득한 거리감보다 더 먼 것이지요. 그래서 어쩌면 코로나로 인한 오늘의 혹독한 현실이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2000년 전 유대 땅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억하는데 도움을 줄지도 모릅니다.


    거의 2000년 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경배했던 사람들. 그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고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버겁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을 예배하던 예루살렘마저 잃고 뿔뿔이 디아스포라로 곳곳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사람들도 간혹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피폐한 삶을 살아갑니다.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에게마저 쫓겨난 그리스도인들. 그들이 기억하는 크리스마스는 어떤 것일까요? 또한 그 기억을 기록하는 교회 공동체의 신앙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오늘 누가복음을 통해 전해지는 크리스마스의 기억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눅2:1-3)


    호적을 등록하는 게 오늘날에는 보통의 일상이고 의무입니다.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보통 병원에서 태어나지요.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시청에 가서 출생신고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옛날 이스라엘에서 호적을 등록하는 것, 인구 조사를 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불온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왜 인구조사를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때는 로마의 식민지 시대입니다. 그럼 뻔한 것이지요. 인구조사를 통해 군대를 징집하고, 세금을 거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대상 21장 1절을 읽어보면 이러한 행동을 사탄이 하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세는 다윗의 뒤에는 사탄이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열심당의 원조인 갈릴리 유다의 봉기도 인구조사에 반대해 일어난 것으로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인구조사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인구조사를 더욱이 자기 나라 왕도 아닌, 식민 지배를 하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칙령으로 수리아 총독이 시행했으니 얼마나 백성의 반감이 컸겠습니까?


    또한 그 때의 인구조사라는 것이 오늘날처럼 쉬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인구조사를 위한 호적 등록을 하려면 저마다 자기의 출신지역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던 요셉은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습니다. 교통수단이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걸어가거나 노새를 타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지요.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의 형편을 잘 압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해산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지요.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사흘 길을 걷는 게 보통 일입니까? 이는 매우 비상식적인 일이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무리해서 그들은 가야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강제적인 압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 아닙니다. 로마의 식민지 백성입니다! 로마 황제의 칙령인데 누가 감히 거역합니까? 배가 불러 당장 애를 낳을 거 같아도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가면서 요셉은 길바닥에서 아이 낳는 일만은 피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급합니다. 방을 구하지도 못했는데 아내인 마리아는 아이를 낳을 것만 같습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성경에는 “여관”으로, 영어로 “inn”으로 번역했지만 여기서 여관은 오늘의 호텔이나 모텔이 아닙니다. 이는 보통 가정집의 사랑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만삭인 마리아가 머물 곳이 없었다는 말은 여관에 남아 있는 방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루에 50불, 100불짜리 남아 있는 호텔방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태어나고 자란 고향 베들레헴에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추운 겨울밤 베들레헴에 비어 있는 사랑방이 하나도 없었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 고향을 떠나 이제 낯선 나그네가 되어 버린, 더군다나 만삭이 되어 가장 보호받아야 할 어린 여인의 처지를 맞이할 마음의 방이 굳게 잠겨 있었다는 것을 폭로하고 문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식민 통치자의 강압에 못 이겨 억지 걸음을 한 그들, 자기 고향에 도착해서도 아이를 낳을 방 하나조차 구할 수 없었던 그들, 이제 지친 몸 하나 기댈 방도 하나 구하지 못한 그들에게서 첫 아이인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향에서조차 나그네 취급을 받던 마리아와 요셉. 그들을 뜬금없이 찾아온 것은 양치는 목자 몇 명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이 장면을 읽으며 낭만적이라 여겼습니다. 새하얗게 눈부신 양을 치는 목자, 키 만한 막대기를 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양을 어르고 달래는 그런 목자,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그들이 마리아, 요셉 부부에게 말합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1-12) 주의 사자, 주의 천사로부터 이런 소식을 들었노라,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러 왔노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목자들, 양치기들은 흔히 말하는 배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동방박사처럼 예물을 들고 온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들판에서 양들과 함께 자고, 냄새 나고, 격식과 예의를 갖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상한 경험을 하고 나서 확인차 들린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자기들이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를 겁니다.


    그 당시 주라 일컫는 이는 자신들이 섬기는 야웨 하나님 한 분뿐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험악해져 오직 로마 황제를 주라 부르라 협박당합니다. 주라 일컬음을 받는 황제는 그들을 세금으로 가혹하게 통치하고, 말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 채찍을 휘두릅니다. 식민지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워하며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주란 무섭고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멀리 있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저 초라한 말구유에 누인 아이가 주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전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저 평화롭고 순한 아이가 메시야라는 소식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말이었습니다. 천사들의 말이 진정 사실이라면 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꿈같은 것이지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14) 이러한 천사들의 외침이야말로 “로마의 평화”, “팍스 로마나”의 어둠 속에서 가장 귀한 평화인 것이지요.


    이렇게 양치기 목자들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기들이 들었던 말을 전해주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이 과연 알았을까요? 왜냐하면 그 이후 예수가 자란 후에도 예수가 그리스도요 구주라는 사실을 잘 몰랐다는 증거가 성경 곳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리아와 요셉의 첫 크리스마스는 그저 초라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탄생에 대한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이 일이 있고 난 후 80년이나 지나서야 기록된 것입니다. 누가는 왜 이런 초라한 기억을 그의 복음서에 옮기고 있을까요?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그건 바로 초기 교회의 상황 때문이라구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그리고 이제 성령 하나님으로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고백이 시간이 지나 오해 또한 커져갔던 것입니다.


    똑같은 예수님인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세리와 창녀들과 같이 식탁을 같이 했던 예수님,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 친구와 같은 예수님 등 예수님에 대한 믿음, 예수님에 대한 생각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신데, 하나님께 중보하시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신 것이지요. 저 하늘로 가신 예수님이신데 우리 곁에 함께 하시는 친구 예수님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사람 되심을 부정하고 영이신 하나님만을 고집하는 것이지요. 혼돈이 증폭되어 갑니다. 서로 너의 생각이 틀렸다면서 싸웁니다.


    이는 오늘날과 비슷합니다. 교단과 교파를 달리하며 예수님에 대해 달리 해석합니다. 신학교마다 다르고 신학자마다 다릅니다. 교회마다 목사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다릅니다. 이러한 갈등은 오늘날에 갑자기 생긴 게 아닙니다. 초기 교회 때부터 있었던 오래된 갈등입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 신자들은 “예수는 과연 누구신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는가?”라는 물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맨 처음 떠올린 것은 바로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말로 전해졌던 이야기를 추억하며, 사람들이 그렇게 높이는 예수는, 화려한 높은 보좌에 오신 것이 아닌, 베들레헴의 어느 말구유에 오셨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기쁨을 떠올립니다.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에게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 묻혔지만 뭔가 알 수 없는 기쁨이 그들에게 넘쳐났던 것입니다. 그 뒤로부터 그들은 예수 이야기를 해오고 있으며, 가진 것을 나누며, 서로 돌보고 섬기며, 복을 빌어주며, 먼 곳까지 찾아가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기쁨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들은 그 기쁨의 근원이 저 높은 곳에서 오는 게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눈이 부시게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어떤 영적인 존재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환상을 보게 하고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 기쁨의 근원은 오히려 아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아 세상에 처음 태어나자마자 말구유에 눕혀져야 했던 아기 예수임을 깨달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안타까운 베들레헴 마굿간 크리스마스의 기억임을 알았습니다. 늘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사랑했던 예수님,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그들을 끝까지 사랑했던 예수임을 알았습니다. 그 예수님을 잊지 못해서, 그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었던 예수가 너무나 안타까워서, 그들이 한 짓이 너무나 죄스러워서, 그들은 한시도 그를 잊지 못하고 그의 이야기를 하고 또 한 것입니다.


    우리는 대림절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오늘을 향해 오시는 아기 예수의 성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소망과 기쁨, 그리고 기대가 있는 까닭은 그 옛날 춥고 가난했던 요셉과 마리아의 첫 번째 성탄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의 안타까운 겨울밤을 기억해내고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삭인 아내와 태어날 아이를 위해 베들레헴 밤거리를 헤매며 방을 구하려 했던 그 겨울 밤.


    지금도 남미의 성탄전야 풍습은 마리아와 요셉으로 분장하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방을 구하고 문을 열어 아기 예수의 부모를 환대한다고 합니다. 우리 곁에는 작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추운 겨울 밤 아기 예수의 부모를 환대하는 그 몸짓처럼 우리 곁의 나그네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더불어 성탄절의 기쁨을 나눈다면 분명 우리 가운데 그리고 그들 가운데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우리 또한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길 바랍니다. 혹시 나의 마음이 만삭인 여인의 발걸음조차 문전박대했던 베들레헴 사람들의 마음처럼 닫혀 있지는 않은 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어려운 시기지만 우연히 마주칠 오늘의 나그네인 마리아와 요셉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우리 믿음의 식구들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활짝 열린 마음 한 가운데에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가, 그리고 그 사랑이 충만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민기욱 목사(미국 트리니티 한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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