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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당한 의심과 불신앙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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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32]


     


    < 1 > 


    예수님의 제자 도마, 곧 쌍둥이라고도 불린 도마는 의심하는 신앙인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제자는 도마만이 아니었습니다. 빈 무덤을 찾아간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이 있던 곳, 다시 말해 그들의 일상생활로 다시 돌아갔습니다(요 20:9-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마가 의심과 불신앙의 전형으로 각인된 것은 요한복음 20장 24절부터 29절까지의 말씀 제목이 ‘도마의 불신앙’이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도마의 ‘불신앙’이 아니라, 도마의 정당한 ‘의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더 구체적으로는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주님을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증언’에 대하여, 도마는 ‘증거’를 요청합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요 20:25)


    도마의 의심은 정당합니다. 남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믿겠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의 신앙경험에 대한 고백이나 설명이 아니라, 스스로 경험하고 깨달아 믿겠다는 것입니다. 도마는 과학시대의 실증주의자, 합리적 이성의 전형입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어야 믿을 수 있는, 다시 말해, 보이고 만져질 수 있는 것만이 사실이고, 입증 가능한 것만을 믿을 수 있다는 신념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드레 후,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를 하십니다. 이것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문은 잠겨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도대체 어떤 몸이기에 홀연히 제자들 가운데로 들어오셨다는 말일까요?


    홀로그램일까요? 부활한 몸은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고 시간이동,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이상한 몸인가요? 유감스럽게도 복음서는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아니 부활한 몸이 어떤 몸인지 설명하려는 의도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인사를 하시고 나서 주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요 20:27)


    < 2 >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도마를 그린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특히 ‘미켈란젤로 매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의 1601년의 작품, ‘의심하는 성 도마’를 기억하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마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자신의 옆구리에 넣어 만져보게 하는 장면을. 삶의 질곡과 세월의 험난함이 찢어진 옷과 얼굴 주름마다 새겨진 세 제자들의 시선이 어둠에서부터 오직 한 곳, 예수님의 옆구리, 창에 찔려 찢겨진 상처를 향하고 있고, 도마는 손가락으로 옆구리 상처를 만지고 있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당혹함과 조심스럽게 상처를 살펴보는 꼼꼼한 진지함이 도마의 얼굴에서 교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도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져보거나 확인하지 않습니다. 도마는 다만 십자가형의 상흔이 남아 있는 주님의 몸을 보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마 16,16)라고 고백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자 하나님으로 고백되는 곳은 오직 요한복음 20장 28절, 로마서 9장 5절, 그리고 목회서신(요한1서 5:20)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마의 고백에 이어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 20:29)


    주님을 보고 믿는 사람보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더 복이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믿음을 보이는 증거 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도들의 증언 위에 세우려는 요한의 의도가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심하는 도마를 탓하거나 질책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보고 믿는 사람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을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보고 믿는 사람도 복 있는 사람이고, 보지 않고 믿는 사람도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보고도 안 믿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일까요? 보고 믿는 사람도, 수많은 신앙 체험을 한 사람의 믿음도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일까요? 가시적인 증거들이 필연적으로 신앙을 생기게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일까요? 이것도 진실이지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복 있는 까닭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히 11:1). 바라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증거로 채택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도마의 관심은 어떻게 죽은 사람이 부활할 수 있느냐, 부활한다면 부활 이전의 죽은 이의 몸과 부활한 이 후의 몸의 차이는 무엇이냐는 과학적 질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마는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도마가 확인하려고 한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몸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같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가 아닙니다. 도마가 확인하려고 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과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 바로 그 분과 같은 분이냐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한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선포하신 분이, 바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분과 같은 분이냐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신 분,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분, 그러나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음모로 십자가형을 받으신 분이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신 분과 같은 분이냐는 것입니다. 죄가 없지만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세상의 온갖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 부활하신 분이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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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ravaggio,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년경) ⓒWikiCommons


    < 3 >


    도마는 의심과 불신앙의 전형적 인물로 보이지만 사실은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고, 솔직한 인물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께서 유대 지방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셨을 때, 모든 제자들은 말립니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유일하게 도마만이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합니다(요 11:16). 도마는 주님과 함께 죽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죽음도 불사하는, 어찌 보면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도마는 솔직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자, 도마는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 14:2-5)라고 말합니다.


    이런 솔직함, 무모할 정도의 용감함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다른 제자들의 ‘주관적 증언’보다 ‘객관적 증거’를 구하는 그의 의심이 정당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도 이런 도마를 나무라거나 탓하지 않으십니다. 의심 없는 신앙은 맹신입니다. 떠오르는 의심을 피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의미 없는 의심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과학적 의심이건, 역사와 정의에 대한 의심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형태의 의심이건 의미 없는 의심은 없습니다. 의심이 필연적으로 불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직한 의심, 진지한 하나님과의 대결은 우리를 더 견고한 믿음과 두려움 없는 대화로 인도합니다.


    < 4 >


    종교와 과학, 신앙과 이성의 갈등의 역사는 사실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서구 근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자연철학’으로서 종교의 변증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의 시작과 함께 천체운동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갈등과 대결이 시작되었고, 그 후에는 진화론, 물리학, 생물학에 이어 최근에는 뇌 과학 등을 중심으로 대결 혹은 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결의 한 극단에는 과학적 무신론이, 다른 한 극단에는 ‘창조과학’ 혹은 ‘지적설계론’ 등이 있습니다. 과학은 무신론으로 향하면서 종교를 조롱하였고, 종교는 기술과학의 한계와 그것의 파괴적 영향을 근거로 종교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과학을 비웃어 왔습니다.


    과학적 무신론은 신을 객관적으로 증명해보일 수 없다는 것, 실험할 수 없다는 것, 종교가 오히려 더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역사적 사실 등을 근거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 인식의 한계, 생명의 한계, 죽음 이후의 세계에 근거하여 종교의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 인구의 84%가 어쨌든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현실로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과학과 종교의 진정한 대화는 과학과 종교의 ‘각각의 한계’에서가 아니라, ‘각각의 충만한 성취’, 한 가운데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종교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근본가치’를 서로 존중하면서 대화할 때, 인간과 우주에 대한 탐구가 오히려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창조 이야기는 과학과 충돌한다고 주장되고 있지만, 사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우주와 지구의 생성에 대한 과학적 해명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피조물성은 신에 대한 인간의 한계로서가 아니라, 신에 대한 겸손의 표현인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성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 역시 인간이 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만큼이나 과학적 사실이 아닙니다.


    역사적 경험은 인간이 신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신이 인간, 그것도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의 목수와 비천한 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야기의 혁명성은 주목하지 않습니다. 과학을 종교의 변증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나, 종교가 과학적 무신론의 비판대상으로 사용되는 것은, 과학과 종교 모두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대화는 왜 해야 할까요? 상대를 개종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대화는 진정성이 없습니다. 상대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솔직한 대화를 할 때, 그 대화는 서로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진정한 깨달음으로 이끈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그리스도교가 과학이나, 이웃 종교들과 대화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대화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 계약에 신실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대화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성육신 사건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 다시 확실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분, 성령을 통하여 방언의 은사를 주시어 소통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으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는 대화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에 일어나는 의심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두려움 없이 의심하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빌 4:7).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에큐메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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