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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 하나님의 부르심과 안식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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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3:1-8 히 4:1-13 요 3:31-36) 창조절 일곱째주일(10월18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우리는 지금 창조절기에 창조주 하나님에 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은 동시에 창조주 예수님인 것을 세 본문 말씀을 통해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2,000년 전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빛 가운데 사는 당신의 백성(이방인까지 포함한)을 친히 먹이시고 돌보시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조금 더 본격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님을 연결시키는 말씀이 나옵니다. 복음서 말씀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구약과 서신서의 말씀은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모세를 불러 사명을 주시고(구약 출애굽기), 또한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신약 히브리서). 먼저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특별히 오늘 세 본문 말씀 가운데, 요한복음과 히브리서 말씀은 개역개정으로 읽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공동번역 말씀으로 보겠습니다.


    “위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신다.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시다는 것을 확증하는 사람이다.”(요 3:31-33)


    무슨 말씀입니까? 개역 개정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요3:31a)’라고 되어있죠? 바로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 위에 계신, 위에서 오신 분’이신 예수님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놀랍습니다. 그리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참되신 하나님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좀 더 깊은 말씀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하시는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요 3:34-36)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은 곧 말씀이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위임 받으신 분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주셨다고 합니다. 말씀에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요 3:34b)’이라고 하죠?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三位), 곧 세 가지 ‘자리, 품위, 인격’이지만 일체가 되어 한분으로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위로부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시고, 하나님과 동등 위격입니다. 따라서 그를 믿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한 분노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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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위일체 하나님


    2. 삼위일체 하나님


    여기서 삼위일체 교리에 관해 조금 더 살펴볼까요? 북아프리카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 아리우스(Arius, A.D. 250-336년)라는 부제(副祭)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똑똑하고 웅변을 잘했으며 금욕적 삶을 살았고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無)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스스로 있는 자이시며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았던 아들을 무에서 만드셨다. 따라서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으며, 아들은 피조물이다.”


    이렇게 아리우스는 예수님을 피조물로 본 것입니다. 그것도 첫 번째 피조물로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가장 훌륭하신 분이지만, 하나님은 아니라는 주장을 합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좋아했습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아리우스의 생각과 용기를 상당히 도전적이며 매력적이라고 보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오늘날도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를 중시하는 이들은 이러한 삼위일체 교리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적 예수로 이 땅에 오신 분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구세주)’로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아리우스를 추종하는 이들이 생겨나자, 로마제국의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75-337년)는 교회가 나누어지면 제국이 분열될 것으로 생각하고, 주후 325년경 지금의 터키 니케아에 있는 자신의 별궁에 교회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교회회의를 열어 이 논쟁을 해결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결과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의 교리가 틀렸음을 확정했습니다. 그 결과가 ‘니케아 신경(Nicene Creed)’이죠? 우리가 오늘날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원형 신경으로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성부와 성자 관련 부분만 살펴볼까요? 


    “우리는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아버지, 한 하나님을 믿사오며, 하나님의 아들, 성부에게서 나신 독생자, 즉 성부의 본질(ousis)로부터 나신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요. 나셨으나 지음 받지 않았고 성부와 동질 (homoousios)이시며 그를 통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지음을 받았으며, 그는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강림하사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셨으며, 산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오실 것 입니다.”


    결국 아리우스는 교회에서 쫓겨났고 멀리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책도 불태워졌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의 신앙 문제에 국가가 나서서 결정한 것은 좋지 못한 선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에 정치가 개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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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선언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와 니케아


    물론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신학자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카파도키아(터키 중심부 지방으로 에 위치)의 세 명의 경건한 교부, 가이사레아의 바실(Basil, 주후 330-379)과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주후 335-394),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주후 329-390) 역시 큰 공헌을 합니다. 도시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카파도키아는 지하 교회만도 천 개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2백만 명 이상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구체적으로는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의 형태는 신 앞에 선 단독자의 모습이지만,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과 울부짖음을 듣고 모세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구약의 본문은 모세를 만나고 그를 불러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해방의 역사입니다.


    3. 불타 없어지지 않은 떨기나무


    사실 이 당시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처가살이로 4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와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그 근심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함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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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출 3:1-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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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내산(호렙산)


    하나님의 산 호렙은 시내 산으로도 불립니다. 이집트에서 홍해를 지나 시나이 반도로 들어가게 되면 볼 수 있는 산으로 높이는 2,285m 정도 됩니다(참고로 황령산은 427m, 지리산은 1,916m, 한라산은 1947m, 백두산은 2750m입니다). 나중에 이곳에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 동안 거주하며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성막을 처음 친 곳도 이곳 호렙산입니다. 아무튼 이 산에서 떨기나무 하나가 불이 붙었는데, 놀랍게도 불타 없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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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떨기나무


    떨기나무는 광야에 있는 보잘 것 없는 나무입니다. 시내 산 중턱에 있습니다.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하루하루 의미 없이 살아가던 모세는 연약한 떨기나무가 불타는 것을 보고 아마도 자신의 신세와 같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모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 초라하고 연약한 떨기나무는 내 신세와도 같구나. 이제 불이 붙었으니, 곧 불 타 없어지겠구나. 사라지겠구나! 그래, 나도 이제 이렇게 미디안 광야에서 하루하루 살다가 없어지겠구나. 사라지겠구나!”


    이렇게 신세를 한탄하며 떨기나무에 붙은 불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b) 그렇습니다. 그 연약한 떨기나무가 불에 타서 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3-4)


    불타 없어지지 않은 떨기나무가 궁금해서 다가오는 모세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5-6a)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무슨 뜻일까요? 조상의 하나님, 곧 역사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조상들은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 역사 속에서 떠돌이로 살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떠돌이들의 하나님, 그리고 모세와 같이 연약한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출 3:6b)”게 됩니다. 신 앞에 선 연약한 인생은 이렇게 절대자 앞에서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7-8)


    이렇게 금방 불타 없어질 것 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연약한 떨기나무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생명이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애굽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내신다는 상징이죠?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초라하고 연약하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면, 그 어떤 사탄의 불길과 환란의 불꽃도 우리를 태워 없애버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인식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4. 오늘,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 잘 알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와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참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역시 개역개정 말씀이 어렵기 때문에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안식처에 들어가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살아 있으니, 여러분 가운데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기쁜 소식을 듣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믿지 않았으므로 그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히 4:1-2)


    우리를 하나님의 안식처에 들어가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안식처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이것은 하느님께서, ‘내가 노하여 맹세한 대로 그들은 결코 나의 안식처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었기 때문에, 그 안식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도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일을 다 마치시고 쉬셨습니다.”(히 4:3)


    사실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핵심은 ‘창조’가 아니라, ‘안식’입니다. 6일 동안 일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셨다는 것이 바로 창조의 핵심이죠?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일곱째 날에 관하여 성서 어디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기록된 말씀대로입니다.”(히 4:4)


    그러나 삼위일체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참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들은 결코 나의 안식처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들은 먼저 그 기쁜 소식을 전해 듣고도 순종하지 않은 탓으로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히 4:5-6a)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안식을 누릴 기회는 아직도 남아 있(히 4:6b)”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아 안식을 누리지 못했지만, 이제 다른 사람들은 안식을 누릴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은 히브리서의 수신자들로, 박해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볼 수도 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 곧 오늘 우리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이라는 날을 하나님께서 다시 정하십니다. 그 오늘은 다윗에게 주신 말씀이며, 또한 여호수아 시대에 ‘다른 날’로 말씀하신 오늘입니다. 조금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성경 말씀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면,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됩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오늘이라는 날을 다시 정하시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앞서 인용한 대로 다윗을 시켜, ‘너희가 오늘 하느님의 음성을 듣거든, 완악한 마음을 품지 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그 뒤에 하느님께서 또 다른 날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히 4:7-8)


    따라서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완악한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히브리서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아직도 참 안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마치고 쉬신 것처럼,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간 이도 그의 일손을 멈추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 안식을 누리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옛사람들처럼 순종하지 않다가 낭패를 보아서야 되겠습니까?”(히 4:9-11)


    5.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


    이렇게 우리는 오늘 세 본문 말씀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을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오늘’도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말씀으로 초청하고 참 평안으로 인도하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결산을 받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산의 때에 우리는 물론이고 모든 피조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판단할 때가 가까웠다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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