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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선이고, 네가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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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창세기 3:9-13)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교회 절기상, 이번 주일부터 창조절이 시작됩니다. 창조절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 세상을 잘 가꿔가겠다는 다짐을 드리는 기간입니다. 창조절 첫 번째 주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세상과 사람들이 악하게 만들어간 세상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창세기 6장 12절에는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시게 된 이유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땅이 부패했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 의미는 땅 자체가 부패했다기보다 땅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부패하였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땅 자체가 부패했다, 망가졌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행위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땅과 사람의 행위는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아벨을 죽인 가인을 향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창4:11).”

    사람들의 행위는 조금씩 땅을 망가뜨렸습니다. 저희는 오늘 그 망가짐의 시작점이었던 선악과 사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선악과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의 부패가 시작되었고, 땅이 망가지게 되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선악과, 생명나무

    처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은 ‘보기 좋은(선한)’ 세상이었습니다(창1:31). 하지만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은 이후로 세상은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 세상이 됩니다(창6:5). 창세기 1-6장이 보여주는 창조 세상은 선악과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앞은 선한 세상, 뒤는 악한 세상으로 갈라지며 극단적 대조를 이룹니다.

    창세기 2장 9절에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가운데 만드신 두 개의 나무가 등장합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각주가 달려서 다른 번역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선악 지식의 나무’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나무가 단수로 쓰였음을 본다면, 이 나무는 각각 한 그루씩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줄여서 선악과로 쓰겠습니다. 선악과가 어떤 열매인지는 3장 5절에 나타난 뱀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는’ 열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를 의미합니다. 실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모르던 지식을 얻게 됩니다. 자신들이 벗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생명나무가 무엇인지는 창세기 3장 22-24절에 나타난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사람이 지혜를 얻었는데, 혹시나 영생의 능력까지 얻을까 봐 에덴동산을 봉쇄하는 이야기입니다. 즉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존재, 이 두 나무의 열매가 하나님에게만 속해있다는 점은, 고대 사회에서 신이 지식과 생명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갖춘 존재로 인식되어 왔음을 알게 합니다.

    지혜=선악 구분?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신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왜 ‘선과 악을 아는 능력’인가 하는 점입니다. 오히려 ‘무불통지(無不通知)’, 무엇이든 다 통하여 알지 못함이 없는 능력이 더 신적인 능력으로 느껴집니다. 아니면 모든 사람의 앞날까지 다 알고 있는 ‘미래 예지’ 같은 지식이 더 신으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왜 창세기는 ‘선과 악을 아는 능력’이 신의 지식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사실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무엇이 선한 일인지 알지 못한다면, 아무일이나 마구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행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행위를 ‘악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시 아담은 ‘선과 악’ 자체를 몰랐습니다.

    제가 열심히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적어놓았는데, 한 살짜리 아이가 컴퓨터 전원을 꺼버려서 이것이 다 날아갔다고 해서 그 아이를 ‘악한 녀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는 뭐가 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속으로 ‘악마같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이 지식은 사람들에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의 상황을 보면, 선악과를 통해 얻은 것이 일반적 지식이라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주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지식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지식은 하나님에 도달하지 못함을 창세기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이를 ‘선과 악’으로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저 ‘지식의 열매’라고 이름 붙이는 편이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왜 창세기는 하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열매에 ‘선악을 안다’는 이름을 붙여놓았을까요? 그리고 이것이 모든 사람의 손에 쥐어졌을 때, 왜 세상은 악으로 향하게 되었을까요?

    ‘선악을 안다’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선함이 무엇인지, 악함이 무엇인지 인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는 능력에 가깝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선악(히브리어 '또브 바라아')’이 함께 연결되어 창세기와 같은 형태로 사용된 경우는 신명기 1장 39절 밖에 없습니다. 이 본문에서 모세는 가나안 정탐 이후 이스라엘이 받게 된 벌을 이야기합니다. 자신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신명기 1장 39절은 이들과 반대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을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입니다. 여기에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이라는 말은 그저 ‘지식이 없는 아이’라는 의미로 가볍게 볼 수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하자면, ‘판단력이 없는 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정탐 당시 어른들과 같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았던 아이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선악을 아는 능력’은 분명 판단력과 연결됩니다. ‘판단력’이 왜 하나님에게 속한 지혜인가를 더 생각해보자면, 재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재판은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요구합니다. 또 성경을 보면, 출애굽 시절에 재판은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허락된 일이었고, 사사 시대에는 마찬가지로 선택받은 사사들에게 허락된 일입니다. 왕정 시대에는 왕에게만 허락된 일이 재판입니다.

    ‘선악을 아는 일’이 왜 신적 지혜로 연결될 수 있는가? 이는 당시 사회의 최고 권위가 수행할 수 있는 재판과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이 능력은 재판관의 판결과 연결되는 능력입니다. 왕정 시절, 재판관은 왕이었고, 왕은 하나님에게 이 능력을 받아 판결을 내립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한 솔로몬입니다.

    사람의 판단, 판결

    그런데 창세기는 이미 태초의 사람들이 그 능력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재판관과 같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재판관의 능력을 갖게 된 사람이 처음으로 지혜를 사용하여 판결을 내린 사건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을 받은 아담은 ‘당신이 만드신 여자가 악이며 유죄’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자신은 선하며 무죄라는 의미입니다. 하와는 ‘뱀이 악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은 선하다고 말합니다. 재판관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내린 판단은 ‘나는 선하고, 악한 것은 내가 아니다’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재판관이 되어 자신만이 선하다고 말하게 된 세상, ‘내가 아니라 네가 악하다’고 말하게 된 세상 속에는 선함, 보기 좋음은 사라지고 오직 ‘악함’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6장은 그런 세상 속에서 오직 노아만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합니다. 그만이 자신의 판단에 따른 선악 구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악을 구분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도 이런 모습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선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악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잘못 되었기에 지금 자신이 이런 모습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이 선하고 남은 악하다고 판단하기에 지금 사회는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잘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등을 극단적으로 구분하며 서로 대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일부 세력은 지금 정부가 무조건 악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안 좋은 일은 모두 정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코로나에 전염되었어도 정부 때문이고, 길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정부 때문입니다. 반면에 좋은 일은 다 자신이 선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코로나 증상이 완화된 것은 자신이 선하기 때문이고, 자신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선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분명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우리는 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항상 내가 선하고 다른 누군가가 악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의 원죄는 ‘선악과를 먹은 불순종’도 있지만, 이보다 ‘나만 선하다’고 판단한 모습에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악은 바라보지 않고 남에게 악을 전가하는 모습 속에 있습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은 표현은 다르지만,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세상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이 홍수로 멸망하던 때에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완벽하지도 선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욕망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참된 선함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내 뜻으로 남을 악하다 규정하며 세상에 악을 퍼뜨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르며 참된 선을 전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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