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안 믿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성경공부 | KCMUSA

성서 안 믿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성경공부

본문 바로가기

  • 성경공부

    홈 > 목회 > 성경공부

    성서 안 믿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페이지 정보

    본문

    [채수일 목사와 함께 ...읽는 성경 23]  




    < 1 >


    구원(救援)은 ‘건질 구’(건지다, 돕다, 고치다, 치료하다, 막다, 금지하다 등의 뜻)와 ‘당길 원’(당기다, 잡다, 취하다는 뜻)으로 구성된 단어로서, 위험이나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 철학 이전 시대, 구원은 부, 명예, 권력, 건강, 장수 등을 의미했고, 행복(그리스어로 eudaimonia)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주전 460년경-370년)는 개인적 구원을 인간의 영적인 태도에 근거한 것으로 보았습니다만, 정치적이고 법적인 의미의 구원(그리스어로는 soteria, 라틴어는 salus)도 있었습니다. 플라톤(Platon, 주전 428/427-주전348/347년)은 구원을 국가 안에서 법이 타당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리스의 지배자 숭배에서는 제국의 구원과 동일시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시대 이후 구원은 키케로(Cicero, 주전 106년-주전 43년)에 의하면, 가정과 국가의 질서와 번영으로, 17세기, 18세기 이후에는 국가적 목적으로서의 보편적 행복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종교마다 구원 이해도 다릅니다. 부족 종교는 구원을 행복론적으로 이해하고, 그리스의 신비주의 종교전통은 신비한 합일, 유교나 도교는 성인이 되는 것, 옛 이집트 종교나 로마의 황제숭배, 일본의 신도 등은 지배 권력의 안정을 구원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른바 히나야나(Hinayana) 불교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으로 받아드렸습니다. 이슬람은 살아서 낙원에 들어가는 것을 구원으로 봅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 경험과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의식에서 구원을 노예적 삶으로부터의 해방, 하나님의 정의로운 지배가 관철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인도 게르만어(kailo)에 어원을 두고 있는 구원(고틱어로 hails)은 ‘총체적인, 온전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빈번히 등장하는 구원이라는 단어(그리스어로 soteria)는 ‘성취되고 행복한 영원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 파멸과 죽음에 의해서 극복될 세계에 하나님과의 끊어질 수 없는 사귐 속에 있는 생명이 선물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구약성경은 물질적인 구원을 말하고, 신약성경은 영적이고 내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다고 분리하여 증언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구원의 원형은 출애굽과 갈대바다에서의 이스라엘의 승리, 그리고 땅의 분배에 있습니다. 포로기 이후의 문헌들에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구원경험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묵시문학 시대에는 구원이 우주적이고 매우 강력하게 미래적이면서 초월적인 차원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운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예수라는 이름은 야훼께서 속량하신다는 의미). 구원이라는 단어 외에도 하나님의 나라(공관복음서), 생명(요한복음), 정의, 자유, 화해(사도 바울)라는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세계를 다시 받아들이고, 모든 악마적 세력으로부터 그의 피조물을 해방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지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됩니다. 구원은 병과 적과 죽음의 파도로부터의 구출로 경험됩니다. 특히 예수님의 치유이야기, 몸의 부활 사건은 구원을 영적인 사건으로만 축소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세례와 성만찬이 구원경험의 일차적 장소가 됩니다. 그리고 종말론적 미래에 성취될 인간과 모든 피조세계의 온전한 구원에 대한 희망도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구원은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이해되어 왔습니다. 고대 교회에서 중세교회까지 구원은 보편적, 우주적 속량,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종교개혁시기에는 구원을 위한 인간 편에서의 노력을 배제하고, 오직 믿음이 강조되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자 동시에 의인이었습니다. 밖에서부터 주어지는 주님의 말씀, 그리스도를 통해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구원은 개인화되었고, 특히 마틴 루터(M. Luther, 1483-1546)의 ‘두 왕국론’은 구원의 정치적, 사회적 측면을 뒷전으로 밀려나게 했습니다.


    계몽주의도 구원의 내재적 실현에 관심을 가졌는데, 20세기에 들어 구원 개념에 화해의 의미가 부각되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K. Barth, 1886-1968)는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도록 선택되었다고 합니다. 비슷한 구원의 낙관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1965년)에서도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총체성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여성신학은 구원의 총체성과 경험관련성을 강조했습니다.


    < 2 > 


    그런데 오늘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3,15-18)에 의하면,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은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함으로써 믿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이라고 합니다. 심판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사도행전은 더 급진적입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2)


    이 말씀은 가장 전형적이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오해를 받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이 병자들을 고쳐준 후, 유대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 앞에서 한 증언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4장 12절의 말씀 직전에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다른 종교들과 그리스도교를 비교하여 말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메시아인지에 대한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대결 과정에서 한 말입니다. 메시아는 다윗왕국의 영광을 회복할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시고, 바로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들이 치유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전형적인 말씀은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은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겠다는 도마에게 하신 말씀으로써, 여기서 길은 곧 십자가의 길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구원의 배타성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가려는 사람은 십자가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난의 예견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주장만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을 보장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의하면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함으로써, 종교생활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임을 말합니다.


    게다가 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너무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태 7,14)고 합니다. 결국 다수가 아니라, 아주 소수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기준이었다면,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그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6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환란과 고통을 주실 것이요, 선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을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입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의 마음에 적혀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들의 양심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롬 2,6-15)


    그렇다면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선택이시니, 우리는 우리의 기준으로 누가 구원받을 수 있고, 없는지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지요. 다만 율법 있는 사람, 곧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가 믿는 종교에 의해서 판단될 것이고, 율법이 없는 사람, 곧 종교가 없는 사람은 그의 양심에 의해 판단될 것이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성경이 주는 답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에큐메니안

    KCMUSA,680 Wilshire Pl. #419, Los Angeles,CA 90005
    Tel. 213.365.9188 E-mail: kcmusa@kcmusa.org
    Copyright ⓒ 2003-2020 KCMUSA.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