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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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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⒇]  




    < 1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에는 오직 단 하나의 척도가 있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죽음이다. 모든 진정한 사랑의 끝에는 죽음이 서 있으며, 죽음으로 끝나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다.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항상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사랑을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기꺼이 불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사랑, 사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랑만이 진실하다. 그래서 그 대가를 기대하거나 어떤 조건이 붙는 친절은 허위와 가식이다. 인류의 참된 도덕적 시험, 가장 근본적인 시험은 언제나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비롯된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으로 원수 사랑을 증명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그래도 남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라는 것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건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관계에서건 용서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수는 미워해야 하고, 박해하는 사람에게는 보복해야 하는 것이 인간적 정서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미 일어난 불의는 원상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이미 죽었고, 우리는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맞은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고, 마음에 남겨진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물겠지만, 흔적은 언제나 남아 있고, 우리는 그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처받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당한 불의와 다른 사람이 저지른 죄를 복수하는 것이 정당한 일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도 ‘복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화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화해는 굴종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렇습니다. 불의는 보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의와 질서가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제와 구조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불의를 당하면 자존심은 상처를 받고, 상처받은 자존심은 복수를 통해 치유 받고, 또 굴욕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러나 복수를 하지 못할 경우 피해자는 병들게 됩니다. 자신이 비겁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용기 없는 자신을 증오하거나, 억울함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법체제를 원망하면서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만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한 불의에 대한 복수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의무의 문제인 것입니다.


    < 2 >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마태 18,22)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십니다(마태 6,12).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44). 이렇게 해야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며(마태 5,45),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야 한다(마태 5,48)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예수께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처럼 온전해지기 위해서라는 말일까요?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용서는 보복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도덕적 우월감도 아니고, 용서하지 않고 분을 품고 있으면 자기 자신이 파괴되기 때문에 취하는 심리적인 자기위안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가바드기타』가, “용감한 사람을 보기를 원하면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을 보라. 영웅을 보기를 원하면 미움을 사랑으로 되돌려 보내는 사람을 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용감한 사람, 영웅이 되기 위하여 용서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명령하실 때, 예수께서는 우리를 동네북으로 만들거나, 오른쪽 뺨을 맞고도 다시 왼쪽 뺨을 내놓음으로써 갑절로 희생당하는 희생자 집단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희생자 집단이나 ‘마조키스트’들을 만들어 내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은 이미 충분한 희생자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라는 위장된 도덕성 안에서 사실상의 무관심을 정당화하거나 공분의식조차 없는 구역질나는 중립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명령하신 것은 끝없이 돌고 도는 보복과 복수의 쳇바퀴를 멈춰 세우라는 초대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인간적 가능성이 아닙니다. 용서할 수 있는 용기는 우리가 용서받은 사람들이라는, 우리도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깨달음과 겸손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의 용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용서받은 것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용서는 우리에게 해를 가한 다른 사람을 향한 관대함의 행위이기 보다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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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를 따름의 윤리를 확립한 비운의 천재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 3 >


    그러나,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는 결코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용서할 수 있는 죄가 있는가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죄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을지 몰라도 사람 사이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죄, 용서해서는 안 될 죄가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는 사과와 보상과 배상, 법적 책임을 짐으로써 해결될 일이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라는 것도 육체의 상처와 마찬가지로 많은 경우 시간과 망각이 치유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공동체 혹은 역사에 대한 죄도 용서될 수 있을까요? 아니 용서해야 할까요? 나치와 유대인, 아프리카에서 백인과 흑인, 북아일랜드에서 천주교와 개신교, 이슬람과 기독교, 보스니아에서의 인종청소,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에서도 용서는 가능할까요? 아니 용서해야 할까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설령 우리가 그것 때문에 왜 기독교인이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느냐는 비난을 받고, 왜 하나님처럼 온전해지지 못하느냐고 비난받는 일이 있어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단호하게 용서를 거부해야 합니다.


    아돌프 히틀러 암살 계획에 동참한 디트리히 본회퍼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비록 독재자이고 전범이자,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고, 1천만 명이 넘는 러시아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인마이지만, 목사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암살 계획에 참여한 것이 정당한 것인가 하는 논쟁이었지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본회퍼는 설령 그가 살인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할지라도, 미친 운전자는 차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질 용기, 설령 그것이 지옥에 떨어질 심판이라 할지라도, 책임을 무릎쓸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지요. 본회퍼가 말했듯이 값싼 용서가 있듯이 값비싼 용서도 있습니다. 원수사랑은 값비싼 은혜입니다.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사랑,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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